나는 영원한 0점

by 사피엔



“본관 2층 공실, 소방안내문 아직도 있네요ㅠ”

휴무날 아침, 단톡방에 뜬 저 문장을 보고 나는 잠시 웃음이 나왔다. 폐기되어야 할 안내문 한 장.

누군가는 조용히 치우는 걸, 누군가는 굳이 ‘문제’로 만든다.



그러나 이 장면은 개인의 성격 문제가 아니다.

이건 구조가 요구하는 인간형이다.



사소한 결함을 발견해 보고하는 사람은 점수를 얻고, 사소한 결함을 조용히 치우는 사람은 기록되지 않는다.



저급한 조직일수록 ‘관찰’보다 ‘감시’를 선호한다.

수정보다는 보고가, 책임보다는 고자질이 더 빠르게 움직인다. 그렇게 조직은 사람들을 ‘문제를 고치는 인간’이 아니라 ‘문제를 들고 흔드는 인간’으로 길들인다. 그게 이 세계에서 더 안전하고, 더 이득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단톡에 안내문을 던진 그 고참은

우스꽝스러운 개인이 아니다. 이 조직이 매일의 규율로 길러낸, 감시–보고 체제의 전형적인 산물이다.

스스로도 인식하지 못한 채

‘감시를 덕목으로 착각하는 세계’가 복제해낸 하나의 표준형.



그리고 그 뒤에 따라붙은 전례 없이 크게 웃는 이모티콘.

그 웃음은 가벼운 장식이 아니라

“우리는 같은 눈을 가지고 있다”는 은밀한 신호였다.

권력은 이렇게, 사소한 표정 하나로 자기 진영을 그어낸다. 사건은 해결되지 않고, 감시는 서로를 정당화하면서 더욱 단단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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