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36
며칠 전 엄마에게서 톡이 왔습니다.
그날 답장은 오지 않았습니다. 물음표를 안 붙여서 일까요?
다음날 아침 일어나서도 '대체 왜 물어본 거지?', '고춧가루 많이 사서 나눠주려는 건가?', '그럼 안되는데, 어차피 가야 되는데... 엄마가 모를 리 없는데???' 물음표가 가득한 채로 '이따 전화해서 꼭 물어봐야겠다!' 다짐한 채로 오전이 흘렀습니다. 점심시간이 되자마자 전화했는데 받지 않더군요. '대체 왜 고춧가루를 물어본 거지? 지금 고추를 빻고 있는 건 아니겠지? 이미 샀나?'
2시가 넘어가서야 전화가 왔습니다.
'띨리리리리릴'
"어~딸~"
"엄마, 뭐 해?"
"엄마, 성당 갔다가 장례식장 갔다가 오느라 못 받았어~"
"아, 그랬구나~"
"늙으면 다 죽나 봐~이구~"
"응??"
세상의 순리라는 것도 알고, 늘 인간은 필멸자라는 걸 알고 있는 저라도 엄마의 입에서 죽음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 건 참 슬픕니다. 엄마도 나이를 들어가는 걸 느끼나 봅니다. 성당생활하면서 장례식장을 수없이 다녀오셨을 건데 말이죠. 저런 이야기는 처음이었습니다. 코끝이 찡~해지는 걸 겨우 견디고는
"나도 늙고 인간이 다 그렇지. 다 죽는 거지."
MBTI 'F'인 주제에 'T'인 척하고 넘어가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말이다...."
엄마의 말줄임표가 길어지기 전에 원래 전화한 목적으로 빠르게 돌아가기 위해 엄마를 크게 불렀습니다.
"아, 엄마! 그건 그렇고 어젯밤에 고춧가루는 왜 물어본 거야? 나 피.ㄹ"
나 필요 없으니 우리 거까지 사지 말라고 말하려 했는데...
"아, 그거 고춧가루 집 올 때 가져오라고 하려고. 지금 다 떨어져 가는데, 너 어차피 가니까 혹시 남은 거 있으면 버리지 말고 이번주에 집 올 때 가져오면 되잖아."
"아??? 그래서 그런 거였어? 나 고춧가루 한 주먹정도밖에 없어. 요리 가끔 해 먹으니까. 근데 이것도 좀 오래돼서..."
"그래? 그럼 사면되지. 알겠어. 근데 고춧가루도 없이 사니?"
그날, 저녁에 헬스장에서 남편을 만나 이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남편이 웃으며 말했습니다.
"장모님, 적응력 빠르시네~자기가 장모님 닮아 적응이 빠른 거네. 벌써 보내버리시네 ㅎㅎ"
"그러니까 말이야."
"미리 말하지 말지 그랬어~"
"에이~ 미리 말해서 이렇게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잘 받아들이는 거지. 갑자기 그러면 더 힘들어하셨을걸?"
벌써 딸내미를 보낼 준비를 하는 엄마를 보니, 다행스러우면서도 묘한 감정이 들었습니다. 엄마가 무언가 있냐고 물어볼 때는 챙겨주려는 목적이었는데 말이죠. 이것도 어찌 보면 저의 남은 살림을 아깝지 않게 잘 챙겨주려는 목적이겠지요. 그래도 한국에 있는 게 좋다는 엄마 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2달이 지나버리고 남은 살림을 챙겨주는 엄마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러고 보니 이제는 전화하면서 '떠나서 잘 살 수 있겠니?', '넌 걱정도 안 되니?', '이 휴~꼭 가야겠니~'라는 소리도 더 이상 안 하십니다. 그때마다 제가 '잘할 수 있지~', '걱정 하덜덜덜 마~', '가서 잘 살고 자주 올게~'라고 다 철벽방어했었지요. 어느 순간은 '놀러 가면 네가 가이드해주나?', '이모랑 같이 놀러 갈 계획 세우고 있어'라고 말하는 엄마였지요.
제가 아는 엄마를 떠올려보자면 그렇게 마음에 묻어야지 하루를 또 하루를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엄마는 늘 그래왔습니다. 아픈 일, 슬픈 일, 맘대로 안 되는 일 많고 많이 겪었지만 그 속에서도 늘 희망을 보려 했고, 적응하면서 살아가려 했습니다. 그런다고 해서 아프지 않은 게, 슬프지 않은 게 아니라는 걸 엄마 집에 갔다가 헤어질 때 제가 '엄마, 건강히 잘 있어~'라면서 안으면 '왜 이래~'하면서 밀어내는 엄마, 그 큰 눈에 그렁거리는 눈물을 보기에 잘 알지요.
죽기 전에 후회하는 것에 대한 주제로 많은 책들이 나와있지요. 책마다 다르겠지만 공통적인 것은 '사랑하는 사람과 더 많이 시간을 보내지 않은 것'이라고 합니다. 저희 지금 떠나는 것도 '나중에' 부모님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입니다. 다만, 걱정되는 건 그 '나중'이 언제일지 알 수 없다는 것과 그 '나중에' 가족 모두 건강하게 잘 살아가고 있을지 모른다는 거지요.
이런 고민을 할 때면 남편은 저에게 말합니다.
"그러니까 지금 전략적으로 떠나는 거야. 시간도 확보하고, 자산도 더 빠르게 모으기 위해서 말이지. 지금 부모님 다 건강하시잖아. 나이가 들면 정말 우리 도움이 필요하실 거야. 그때를 위해 걱정은 좀 접어두고 부모님을 믿고 우리 자신도 더 믿어보자. 더 이상 때를 더 늦추면 안 돼"
그렇습니다. 나중에 더 후회하기 전에, 아직 젊을 때 우리 가정, 그리고 가족을 위해 씩씩하게 떠나야 될 때입니다. 가족을 제 자신을 더 믿으면서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