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 and the City Season 3 EP 15
대한민국의 '세는 나이'는 드디어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하여, 나는 다시 39를 앞두고 있다. 올해의 생일 케이크에도 긴 양초 3개에 불을 붙일 수 있게 된 것이다. 나이를 소개할 때 아직 30대입니다,라는 멘트를 덧붙여도 괜찮다. 이렇게 30대 끝줄을 간신히(?) 붙잡고 있다는 안도감에 무색하게도 나의 몸 상태는 비루하기 그지없다. 이건 당장 작년과 비교해 봐도 여실히 드러난다. 작년에 요가를 시작해서 거의 1년을 했는데 처음 시작했을 때보다 오히려 요즘 들어 동작할 때 유독 버거워하는 나를 발견한다. 선생님도 몸을 더 들으라고 옆에서 더더더를 외쳐주시는데 나의 몸은 그 더더더를 못 따라간다. 몇 날 며칠을 주야장천 떠들어 재껴도 멀쩡했던 목 상태는 살짝 난조를 보이더니 며칠 전부터는 정말 말할 때 불편한 게 실감될 정도가 됐다. 수업할 때 저절로 큰 소리를 내거나 고함을 치는 걸 꺼리게 됐다. 어디 이뿐이랴. 마의 저녁시간인 저녁 8시 반부터 9시 사이에는 미친 듯이 졸음이 몰려온다. 며칠 전에 남편이 저녁 시간에 같이 책을 읽자고 해서 나란히 앉아 호기롭게 책을 펼쳐 들었는데 한 파트 겨우 읽고 아주 험한 꼴을 보이며 대차게 졸고 말았다. 열심히 책을 읽다 문득 눈을 든 남편이 입 벌리고 잠든 나를 보고서는 과연 무슨 생각을 했을지.. 흐흐. 요즘 부쩍 왜 이렇게 졸려하느냐며 책을 정리해 주고 얼른 자라고 했다. 그날은 정말 어찌어찌 씻고 침대에 눕자마자 바로 잠들었던 것 같다. 작년에 입던 옷들 중 안 맞는 게 제법 여럿 생겼고 먹는 양은 전과 비슷한 것 같은데도 금방 여기저기 살이 붙는다. 나의 몸은 이 세상 그 무엇보다 제일 무겁다. 이런 게 정말 나이 먹는다는 걸까.
39의 시간을 두 번 맞은 나는 이제야 나이 먹는다는 걸 알아가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10대에서 20대로, 20대에서 30대로의 전환은 그 나름대로 의미가 있었겠지만 성장에 방점이 찍혀있었지 노화의 의미로 받아들여지는 건 아니었다. 그런데 왜 이번은 다른 것인가. 물론 시간과 경험이 쌓인 만큼 더 익숙해지고 내가 의식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자동적으로 물 흐르듯 할 수 있는 것들도 있다. 그러나 요즘 실감하는 건 그런 게 아니었다. 똑같은 시간에 똑같은 일을, 이전에 하던 방법대로 하는데 전 같지가 않다. 원래대로 했을 때 예상되는 결과를 만들어 내려면 전보다는 시간과 힘을 조금 더 써야 한다는 걸 깨닫게 됐다. 그러니 같은 걸 해도 빨리 지치고 버거워하고 진이 빠졌다. 40대로의 전환은 어서 와, 노화는 처음이지, 의 느낌이었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무언가가 필요한 시점이 도래한 것이다.
왜 우리는 세월이라는 선물을 칭송하기보다 두려워하게 되었을까? 거치적거릴까 봐 두려워서? 실제로 세월이 흐를수록 주름이 늘고 피부는 처지며, 흰머리도 늘어나면서, 우리의 복잡한 인생사, 곧 각자의 독특하고 다른 복잡한 인생사가 그 위에 기록된다. 불현듯 거울은 우리에게 지난 세월과 유한성, 종착을 향해 가고 있는 인생사라는 모호한 선물을 비춰준다. 우리는 스스로의 힘으로 삶을 완성하려는, 독특한 현대적 환상 속에서 우리 자신의 지혜로 삶의 수수께끼들을 풀어보려 했다. 한때 자유와 운명을 즐기는 노마드였던 우리가 우리 자신을 세월로부터 해방시키려는 헛된 전투에 참가하는 운명이 되고 만 것이다.
- p 106, chapter 4 근대 사회가 만든 노년, 그리스도 안에서 나이 듦에 관하여
이 사실을 깨닫게 된 데에는 학생들의 몫이 컸다. 2002년 월드컵을 역사 속 이야기로 아는 이 혈기 왕성한 10대 중학생들을 감당하기엔 나의 기력은 부족하기 그지없었다. 놀랍도록 가파른 변화의 세상에 요동치는 호르몬을 더한 하이브리드 세대에게 나는 그저 속수무책이었다. 원기옥의 기운으로 사자후를 날리고 고함을 쳐도 그저 순간을 모면할 뿐. 이들에게는 전혀 먹히지 않았다. 언제 그랬냐는 듯 무례함과 장난은 자동 반복재생되었고 아무렇지 않게 모든 것을 튕겨내어 그 물리적, 정신적 충격은 오히려 나에게 되돌아왔다. 결국 내가 쏟아내고 나만 견뎌내야 하는 수렁에 빠졌다. 퇴근하면 모든 것은 거기에 두고 로그아웃하여 남은 일들은 내일의 소라에 토스하고 퇴근 후의 일상만큼은 오롯이 지켜내어 수성하자는 것이 원래 나의 철칙이었다. 그런데 가랑비에 옷 젖고 낙숫물이 댓돌 뚫는다고 그간의 충격들이 나의 일상에 조금씩 침범하여 균열을 냈다. 이는 며칠 전엔 가정예배 시간에 예배드리다가 예배중단이라는 초유의 사태로 번지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이대로 그냥 있어서는 안 되겠다, 뭔가 조치가 필요하다 직감이 왔다.
내가 선택한 첫 번째 방법은 큰소리치지 않는 것이었다. 내가 힘을 빼는 쪽에 무게 중심을 더 두기로 한 것이다(물론 목이 불편하다는 현실적인 이유가 이 방법을 선택하는 데 있어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긴 했지만). 조곤조곤 말했더니 야생 망아지마냥 날뛰던 학생들이 살짝 수그러들었다. 일단 내가 하는 말을 자기들도 들어야 하니 그랬을 것이다. 약발이 안 먹힌다 싶을 때가 언젠간 오겠지만 당분간은 유지하기로 했다. 이 방법을 써보면서 느낀 것은 내가 힘을 빼니 애들도 힘을 빼게 된다는 것이었다. 역시 힘으로 누르는 건 그만큼의 저항을 받을 수밖에 없고 내가 그만큼 힘을 갖고, 힘을 들여야만 가능한 일이었단 걸 알게 됐다. 실전적인 부분만이 아니라 영적인 부분에서도 이 원리는 동일하게 적용되었다. 내가 모든 것을 통제하려고 신경 쓰는 대신 그분께 하루 동안의 수업시간과 학생들을 맡겨드리는 기도 연습을 시작했다. 무엇보다 내 마음을 지킬 수 있게 도와달라고 구하고 학생들을 만났다.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께서 신실히 응답하시는 것들을 경험하도록 도우셨다. 모든 난리 상황의 주동자들이 나름(?) 차분한 모습들을 보이는 경우들이 있었다.
힘을 빼는 것. 요가를 하면서 배운 교훈 중에 하나였다. 선생님은 늘 내가 힘을 주고 버티고 있어서 원래 의도한 동작을 못하고 있다고 했다. 운동에서도, 삶에서도 난 어떻게든 내 힘을 써서 결과를 이루어 보려고 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 방법은 아니라는 걸 배우게 하시는 중이다.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는 예수님도 제자들에게 나를 따르라는 말씀만 하셨지 강요하거나 강조하지 않으셨다. 마지막 십자가에서도 그분이 하신 거라곤 그저 아버지 하나님께 자신을 의탁하시는 것 말고 다른 건 없었다. 매서운 바람이 외투를 벗기지 못하는 것처럼 무조건 힘으로 하려는 건 종이 한 장 차이로 폭력이 될 수 있다. 그게 남을 향해서건, 나를 향해서건. 나의 힘이 아닌 오직 그분의 능력으로 감당할 때, 그것이 진정한 나의 것이 될 수 있음을 난 30대 마지막 언저리가 되어서야 알아가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사십대는 종종 망상일 수 있지만 더욱 젊어 보이고 필요한 존재로 남고 싶고 점점 희미하게 다가오는 물러남의 가능성을 회피하려는 처절한 시도를 시작하는 나이(p137, 그리스도 안에서 나이 듦에 관하여)라지만 나의 사십대는 그런 나이가 아니었으면 좋겠다. 그러니 나에게 6개월 동안 39의 시간을 다시 주신 건 다가올 중년의 시기를 잘 맞을 수 있도록 준비하라는 뜻이다. 다시 39. 지금까지와는 또 다른 삶의 새 막을 열 때다.
그는 늙어도 여전히 결실하며 진액이 풍족하고 빛이 청청하니
여호와의 정직하심과 나의 바위 되심과
그에게는 불의가 없음이 선포되리로다
- 시편 92:14-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