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동산 블루스 1편 - Part2

1억 5천만원의 무게

by sarihana

2장. 낯선 이름의 편지


그 평화는 오래가지 않았다. 며칠이 지난 어느 날 오후, 퇴근길에 현관문 우편함에 꽂힌 우편물을 무심코 집어 들었다. 두툼한 광고지, 얇은 아파트 관리비 고지서, 그리고 익숙한 은행 로고가 찍힌 명세서들 사이에, 법원 마크가 선명한 봉투 하나가 눈에 띄었다. '김민철'. 계약서상 집주인의 이름이었다. 지우는 '주소지 이전이 아직 안 됐나 보네' 하며 대수롭지 않게 서류를 식탁 한쪽에 던져두었다.


하지만 이틀 뒤, 그리고 그다음 날에도 은행과 대부업체에서 온 '김민철' 앞으로 온 우편물들이 쌓이기 시작했다. 지우는 애써 태연한 척하며 인터넷으로 ‘집주인 앞으로 오는 우편물’ 따위를 검색했다. '흔한 일이니 걱정 말라'는 익명의 답변들에 잠시 안도했지만, 마음 한구석의 찝찝함은 쉬이 가시지 않았다. 밤에 잠자리에 누우면 낮에 보았던 은행 로고들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그는 애써 솜이를 끌어안으며 생각했다. '괜찮아, 윤호 선배가 등기부등본도 다 확인해줬잖아. 깨끗하다고 했어.'


결정타는 그 주 금요일에 날아왔다. 지우는 일주일 내내 불안함에 시달리다 결국 금요일 퇴근길, 굳게 마음먹고 우편함을 열었다. 평소보다 두툼한 대부업체의 봉투가 그의 손에 잡혔다. 거칠고 빳빳한 종이의 촉감이 불길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 겉면에 찍힌 선명하고 폭력적인 붉은색 '압류 예고'라는 글자가 지우의 심장을 얼어붙게 만들었다.


순간 세상의 모든 소리가 멀어지는 듯했다. 시끄럽게 오가는 자동차 소리, 상점의 음악, 사람들의 대화가 전부 먹먹한 소음으로 변했다. '압류'라는 단어가 그의 머릿속을 맴돌며 뇌의 모든 회로를 마비시켰다. 심장이 미친 듯이 쿵, 쿵, 하고 울렸다. 손끝이 차갑게 식었고,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흘렀다. 손에 쥔 봉투가 찢어질 듯 구겨졌다. 직감적으로 무언가 크게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단순한 주소지 이전 문제가 아니었다.


지우는 떨리는 손으로 노트북을 켰다. 손가락이 자판 위에서 삐걱거렸다. '압류 예고', '전세 사기', '깡통전세'… 검색창에 단어들을 입력할 때마다 손끝이 더 떨렸다. 수많은 기사와 블로그 글이 쏟아져 나왔다. 그중에서도 '전세 계약 전 확인 사항'이라는 제목의 글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글에는 '반드시 등기부등본상의 채무 관계를 꼼꼼히 확인하세요', '집주인 신원을 직접 확인하고, 신탁 등기가 되어 있지는 않은지…' 등의 내용이 담겨 있었다. 글을 읽어 내려갈수록 지우의 가슴은 점점 더 조여왔다. '윤호 선배가 등기부등본 깨끗하다고 했었는데… 혹시 내가 놓친 건 없나?' 그는 애써 담담한 척 계약서를 다시 찾아보았다. 서류는 깨끗해 보였다. 하지만 그 안의 복잡한 법률 용어들은 그를 미로 속으로 밀어 넣었다.


'혹시 내가 바보같이 속은 건가? 이 쉬운 것도 확인 못하고…'


익명의 인터넷 답변들이 더 이상 위로가 되지 않았다. '아니, 이게 흔한 일이라고? 다들 나 같은 피해자라는 건가? 그럼 나는…' 지우는 자신이 저지른 작은 실수 하나가 거대한 위협으로 변하는 것을 느끼며 공포에 질렸다.


그의 머릿속에 잔금을 치르던 날의 장면이 섬광처럼 떠올랐다. 윤호의 사무실. 지우의 심장은 기대감으로 벅차올랐지만, 윤호의 행동은 어딘지 모르게 불안정했다. 그는 지우의 질문에 명쾌하게 답하지 못하고 서류를 뒤적이며 시간을 끌었다. "걱정 마, 지우야. 서류는 깨끗하니까. 요즘 워낙 바빠서…" 윤호의 눈 밑 다크서클이 유난히 짙어 보였지만, 지우는 그저 바쁜 선배를 위해 잠시 불편함을 감수해야 한다고 스스로를 납득시켰다. 잔금을 치르자마자 윤호는 안절부절못하며 서둘러 자리를 떴다. "야, 지우야! 나 급하게 갈 데가 있어서. 축하한다!" 그의 마지막 인사는 이전의 힘찬 목소리와 달리 어딘가 모르게 초조하고 다급했다. 그때 지우는 그 미묘한 차이를 애써 외면했다. 그의 불안한 심리는 긍정적인 신호만을 골라 믿게 했다. 하지만 이제 와서 생각하니, 그 모든 순간들이 거대한 재앙을 예고하는 불길한 복선처럼 느껴졌다.


과거의 수많은 실패 경험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불안에 짓눌려 잠 못 이루던 고시원에서의 밤들, 땀 흘려 모은 돈이 줄어들까 두려워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던 시간들. 그 모든 불안이 이 한 장의 종이로 인해 현실이 되어버린 것이다.


지우는 떨리는 손으로 현관문 비밀번호를 몇 번이나 틀린 끝에 겨우 집 안으로 들어섰다. 텅 빈 집 안은 고요했다. 창문 밖으로 불어오는 바람 소리가 텅 빈 공간의 침묵을 더욱 강조했다. 창문에 비친 그의 초라한 그림자가 흔들리는 것처럼 보였다. 그토록 안락했던 공간은 이제 언제 빼앗길지 모르는 신기루처럼 느껴졌다. 그는 곧바로 윤호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전화는 받지 않았다. 불안한 심리는 긍정적인 신호만을 골라 믿게 했지만, 이제 와서 생각하니 그 모든 것이 불길한 복선처럼 느껴졌다.


그때, 거실 바닥에 웅크리고 있던 솜이가 야옹, 하고 작은 소리를 냈다. 녀석은 평소와 달리 꼬리를 잔뜩 내리고, 마치 주인의 불안을 감지한 듯 구석으로 숨어들었다. 솜이의 경계하는 행동은 지우의 심리 상태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었다. 따뜻한 온기가 가득했던 이 공간이, 순식간에 차갑고 위협적인 공간으로 변해버린 것이다.


지우는 텅 빈 거실에 홀로 서서, 거대한 절망의 무게를 온몸으로 느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