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동산 블루스 1편 - Part4

1억 5천만원의 무게

by sarihana

2부: 벼랑 끝의 연대

4장. 보이지 않는 아우성


시간 감각이 무뎌졌다. 지우는 살아도 사는 게 아니었다. 무기력하게 방 안에 틀어박혀 시간을 흘려보냈다. 밥맛을 잃은 지는 오래였고, 잠을 자다 깨면 악몽의 연장선이었다. 하루는 라면을 끓이려다가 냄비가 넘쳐 불이 꺼지는 줄도 모르고 멍하니 쳐다보았다. 텅 빈 집 안은 그가 잃어버린 희망처럼 차갑고 공허했다. 벽에 걸린 시계의 초침 소리만이 멈춰버린 듯한 그의 삶 속에서 유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러다 공허한 마음에 밤늦도록 인터넷 세상을 표류하던 어느 날, 그는 '전세 사기 피해자 모임'이라는 작은 링크를 발견했다. 화면에 뜬 단 세 글자, '피해자'. 그 단어가 심장을 쿵 하고 내려앉게 만들었다. 그는 며칠 동안 마우스를 쥔 채로 망설였다. 혹시나 하는 기대를 품고 들어갔다가 또 다른 현실의 끔찍함을 마주할까 두려웠다. 다른 사람들의 비극을 마주할 용기가 없었다. 혼자서만 무력하게 썩어 문드러지는 것보다 나을까. 아니, 어쩌면 더 깊은 수렁에 빠질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그를 짓눌렀다. 그의 손은 떨리고 있었다.


'도망칠까? 이대로 그냥 세상과 단절해버릴까?'


그는 눈을 질끈 감았다. 하지만 이대로 포기하면, 잃어버린 1억 5천만 원의 무게에 평생 짓눌려 살게 될 것 같았다. 그는 결국 떨리는 손으로 링크를 눌렀다.


수천 개의 메시지가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채팅방이었다. 그곳은 절규와 한숨으로 가득한 거대한 해우소 같았다. 스크롤을 내릴 때마다 손가락이 납덩이처럼 무거워졌다. 메시지 하나하나를 읽을 때마다 지우의 심장이 쿵, 쿵, 하고 불규칙하게 울렸다.


"매달 대출 이자만 200만 원씩 나가는데… 정말 죽을 것 같아요." 지우는 이 메시지를 읽으며, 늦은 밤까지 대리운전을 뛰며 겨우 빚을 막으려 애쓰는 40대 가장의 지친 얼굴을 상상했다.


"이제 겨우 스물여섯인데… 제 인생은 끝난 건가요? 1억이 넘는 돈을 어떻게 다시 모으죠?" 대학 졸업 후 취업해 처음으로 독립을 꿈꿨던 사회 초년생의 막막함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어머니 수술비까지 끌어다 넣은 돈인데… 부모님 얼굴을 어떻게 보죠?" 결혼을 앞두고 신혼집을 계약했다는 신혼부부의 메시지에선, 행복한 미래를 그려왔을 그들의 절망이 뼈아프게 느껴졌다.


그들의 이야기는 활자화된 비명이었다. 지우는 넋을 잃고 그 활자들을 읽어 내려갔다. 모두가 자신과 똑같은 덫에 걸려버린 피해자였다. 서른을 앞둔 사회 초년생, 결혼을 약속했던 신혼부부, 평생 모은 돈으로 자식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려 했던 노부부… 그들은 나이도, 직업도, 사는 곳도 달랐지만, 모두 같은 방식으로 벼랑 끝에 내몰려 있었다.


그 끔찍한 절망의 홍수 속에서, 지우는 자신만 혼자라고 느꼈던 고립감의 둑이 아주 조금 허물어지는 것을 느꼈다. 삭막한 절규와 분노로 가득한 채팅방 속에서 그는 '햇살가득'이라는 닉네임의 글을 발견했다.


"다들 힘내세요. 저는 이 돈만 찾으면 우리 딸내미한테 약속했던 2단 침대부터 사줘야겠습니다. 매일 밤 침대가 갖고 싶다고 노래를 부르는데… 이번 크리스마스에는 꼭 사줄 겁니다."


그 소박하고도 애틋한 희망이 왠지 모를 동질감을 느끼게 했다. 지우는 글을 읽는 순간, 자신이 고시원 창문 너머로 회색빛 서울을 바라보며 상상했던 장면을 떠올렸다. '솜이가 햇살 아래 뛰어놀 수 있는 넓은 집'. 그가 그토록 원했던 것도 거창한 부나 성공이 아니었다. 사랑하는 반려묘에게 따뜻한 햇살 아래서 편안하게 뒹굴 공간을 마련해주고 싶은, 그저 작고 소박한 꿈이었다. '햇살가득'의 글은 그에게, 자신들이 잃은 것이 단순히 돈이 아니었음을 다시 한번 깨닫게 해주었다. 그것은 사랑하는 존재에게 작은 행복을 선물하려던, 가장 간절하고 소중한 꿈이었다.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그래서 더욱 무겁게 다가오는 삶의 진짜 무게였다.


그 글은 절망의 잿더미 속에서 피어난 한 줄기 희미한 불씨 같았다. 지우는 그 불씨를 좇아 채팅방을 더 꼼꼼히 읽기 시작했다. 혼자서는 무력했던 세상의 벽이, 보이지 않는 사람들의 아우성과 함께 조금씩 허물어지는 듯했다. 그의 어깨를 짓누르던 1억 5천만 원의 무게가, 수많은 익명의 무게와 합쳐지자, 오히려 나눠진 듯 가벼워지는 기분이었다.


그는 이제 혼자가 아니었다. 휴대폰을 쥔 채 방 안을 천천히 서성였다. 그의 발걸음은 더 이상 불안에 쫓기는 것이 아니었다. 솜이는 그의 변화를 눈치챈 듯, 불안에 떨던 꼬리를 내리고 편안하게 잠이 들었다. 수많은 익명의 지우들이 절망의 어둠 속에서 서로를 발견하고 있었다. 그들의 목소리가 모여 하나의 거대한 외침이 될 때, 지우는 비로소 자신에게 남은 희망이 무엇인지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