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피어나는 장미
제14장. 지워지지 않는 낙인
다음 항암 치료를 위해 병실에 들어섰을 때, 장미는 며칠간 자리를 비웠던 현우를 다시 만났다. 그의 얼굴은 예전보다 더 핼쑥해져 있었지만, 그늘진 뺨과 달리 눈빛은 이상하리만치 단단하고 깊어져 있었다. 그들은 각자의 링거대를 끌고 나란히 복도를 걸었다. 끼익거리는 링거대 바퀴 소리는 이제 그들의 불협화음 같은 발걸음에 맞춰진 익숙한 배경음악이 되었다. 그들은 시시한 농담을 주고받았다. 현우는 며칠간의 고된 재활 치료 과정을 이야기하며, 스스로를 ‘관절에 녹이 슨 깡통 로봇’이라 칭했다. 그들의 어두운 농담은 이제 서로의 상처를 확인하는 아픈 언어가 아닌, 절망의 한복판에서도 살아있음을 증명하는 그들만의 견고한 유대감이 되어 있었다.
"누나는 이제 좀 괜찮아 보여요. 눈에, 뭐라고 해야 하나… 빛은 아닌데, 뭔가 단단한 게 생겼어요." 현우가 링거대 기둥에 기대서며 옅게 웃으며 말했다.
"그럼. 죽지 못해 산다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살아내야만 하는 이유가 생겼거든." 장미의 목소리에는 차갑고도 단단한 불꽃이, 마치 젖은 장작이 마침내 불이 붙어 타들어가는 소리처럼 낮게 어려 있었다.
그 단단함의 근원을 확인하고 싶었는지, 현우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장미는 처음으로 민지와 민준의 배신에 대해, 감정의 동요 없이 마치 오래된 신문 기사를 읽듯 담담하게 털어놓았다. 이야기를 듣는 내내 침묵하던 현우는, 이야기가 끝났을 때 처음으로 진심 어린, 서늘한 분노를 보였다. 그의 눈빛은 동정이 아닌, 함께 싸워줄 전우의 그것이었다.
"그 사람... 누나의 이름, 재능, 시간, 사랑… 가장 소중한 모든 것을 훔쳐 갔네요. 그런데 왜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요?"
"할 수 있는 게 없었어. 봐, 난 지금 아무것도 아니니까." 장미의 목소리가 힘없이 스러졌다. 그녀의 시선이 앙상한 자신의 손목과 환자복 위로 떨어졌다.
그녀의 말에 현우는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누나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아니에요. '아무것도 아닌' 것은 쉽게 지워지고 잊히겠지만, 누나가 겪은 고통은 영원히 남을 거예요. 그건 낙인이에요."
그는 자신의 가슴팍을 툭툭 쳤다.
"지울 수 없는 상처이자, 평생 안고 가야 할 흉터죠. 사람들은 흉터를 가리려고만 하지만, 바로 그래서 강력한 거예요. 그 흉터, 그 낙인은 다른 사람은 결코 가질 수 없는, 누나만이 가질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무기가 될 수 있어요. 그들이 누나에게 새긴 주홍글씨를, 누나는 세상에 단 하나뿐인 예술가의 인장으로 만들 수 있어요."
그의 말은 장미의 내면에 깊은 울림을 주었다. 낙인(烙印). 지금까지 자신을 파괴하고 수치스럽게 한다고만 생각했던 그 끔찍한 고통의 흔적이, 오히려 자신을 새롭게 정의하는 유일한 증표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깨달았다. 민지와 민준에게는 평생 자신들의 죄를 상기시키는 지울 수 없는 상처의 흔적이 될, 그녀만의 새로운 존재 방식이었다.
그날 이후, 장미는 복수라는 감정의 늪에서 한 걸음 물러서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았다. '민지가 실패한다고 해서 내 머리카락이 다시 자랄까? 내 입안의 쇠 맛이 사라질까?' 아니.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 그녀는 깨달았다. 복수는 그녀의 새로운 시작을 위한 '발화점(發火點)'이었을 뿐, 최종 목적지는 아니라는 것을. 복수심은 그녀를 일으켜 세운 첫 번째 연료였지만, 그 불꽃으로 무엇을 태울지가 더 중요했다.
그녀는 병실에서 틈틈이 그려온 스케치들을 다시 펼쳐보았다. 병원의 차가운 풍경, 복잡하게 얽힌 링거 줄, 수액 펌프의 차가운 질감, 재활치료실에서 마주친 환자들의 일그러진 얼굴, 그리고 그 안에 담긴 희미한 희망들. 완벽한 비율과 선명한 색채 대신, 온몸의 고통과 감정이 녹아든 거칠고 투박하며 때로는 비명을 지르는 듯한 선들이 가득했다. 이것은 화려한 '디자이너 김장미'가 아닌, '환자 김장미'만이 그릴 수 있는 작품이었다.
그녀는 이 불완전하고 고통스러운 그림들이, 단순히 자신의 상처를 치유하는 데서 나아가, 지금 이 순간 어딘가에서 자신처럼 홀로 울고 있을 다른 아픈 이들에게 침묵의 위로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꼈다. 내 고통의 지도가, 길 잃은 다른 이들에게는 나침반이 되어줄 수도 있겠구나. 그것은 복수보다 훨씬 더 완전하고 위대한 승리가 될 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