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를 하오 Part18

다시 피어나는 장미

by sarihana


제18장. 민준의 진심


민준은 재단에서 익명의 봉사자로 묵묵히 허드렛일을 도왔다. 그는 일부러 장미와 마주치지 않을 시간을 골라 재단을 찾았다. 정원의 잡초를 뽑고, 무거운 화분을 나르고, 궂은 날에는 실내 바닥을 닦으며 땀을 흘리는 시간 속에서 그는 기묘한 평온을 느꼈다. 육체의 고단함으로 정신의 죄책감을 마비시키는 행위. 그것은 자신의 죄책감을 덜어내기 위한 자기만족적인 속죄의 시작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예정보다 일이 일찍 끝나 텅 빈 복도를 지나던 그의 발걸음이 자석처럼 한 그림 앞에서 멎었다. 다큐멘터리의 포스터로도 쓰였던, 바로 그 그림이었다. 무채색으로 그려진 텅 빈 병원 복도와 그 한구석에 형체만 겨우 알아볼 수 있게 웅크린 작고 앙상한 여자. 그가 외면하고 도망쳤던, 기억 속 장미의 모습이었다. 그림 속의 차가운 공기, 소독약 냄새, 사무치는 고독, 그리고 모든 빛이 꺼져버린 절망이 물리적인 충격처럼 그의 가슴을 쳤다. 숨이 턱 막혔다. 그림 아래에는 '사랑은 두려움 앞에서 부서졌다'라는 짧은 문장이, 그의 심장에 찍히는 지울 수 없는 낙인처럼 선명했다.


그는 심장이 멎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그가 외면했던 장미의 고통이, 이렇게나 명확하고 강렬한 형태로 박제되어 자신을 응시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그는 묵묵히 봉사하며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있다고, 언젠가는 용서받을 수 있으리라 막연히 생각했다. 하지만 그 그림을 보는 순간, 자신의 속죄가 얼마나 피상적이고 이기적인 자기 위안이었는지 깨달았다. 그의 속죄는 장미의 고통을 가늠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죄책감이라는 무거운 짐을 조금이라도 덜어내기 위한 비겁한 행동이었음을.


그는 그림 앞에서 한참을 서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무거운 발걸음을 옮겨 장미를 찾아갔다. 그녀는 햇살이 가득 들어오는 작업실에서 지혜와 함께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붓으로 물감을 튀기며 깔깔 웃는 지혜와, 그 모습을 보며 세상의 모든 평화를 담은 듯한 미소를 짓는 장미. 그 풍경은 그가 기억하는 과거의 장미보다 훨씬 더 충만하고 아름다웠지만, 동시에 자신과 그들 사이에 놓인 투명하고 견고한 벽을 느끼게 해 가슴이 아렸다. 자신이 버린 세상은 저렇게나 눈부시게 재건되어 있었다.


민준은 장미의 눈을 마주하고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그의 셔츠 소매 끝에는, 정원을 가꾸다 묻은 듯한 작은 흙 자국이 묻어 있었다. 장미는 문득, 진료실에서 보았던 의사의 넥타이에 묻어있던 작은 김칫 국물 자국을 떠올렸다. 비정하고 무심했던 세상의 흔적과, 이제야 땅으로 돌아와 참회하는 한 남자의 흔적. 그 둘은 전혀 다른 색이었다. 그의 눈에는 오랜 시간 곪아 터진 회한과 변명 없는 진심이 가득했다.


"장미야… 내가… 내가 너무 미안해. 내 두려움 때문에 널 혼자 두고 도망쳤어. 네 고통을 감당할 용기가 없었어. 어릴 적 어머니가 돌아가실 때,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무력감이… 지옥 같았어. 네게서 그날의 엄마가 보였어. 난 또다시 도망친 거야. 내 사랑은… 내 사랑은 너무나 나약하고 이기적이었어."


그의 고백에 장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의 눈에서 지난 세월의 회한과 진심을 읽었다. 한때는 증오했지만, 이제는 그저 상처 입고 길을 잃었던 한 남자가 보일 뿐이었다. 지혜의 얼굴이 떠올랐다. 이 남자 역시 지혜의 세상의 일부였다. 용서는 과거에 얽매인 나를 위한 것이고, 화해는 미래를 살아갈 아이를 위한 것이었다.


장미는 조용히 일어섰다. 그리고 그의 어깨에 손을 올리는 대신, 스스로 일어서기를 기다렸다.


"민준 씨, 나는 당신을 용서하지 않을 거예요. 당신의 도망이 내게 남긴 상처는 지워지지 않아요. 하지만… 지혜의 부모로서, 우리는 함께할 거예요."


그들의 관계는 이제 '부부'라는 틀을 벗어나, 깨진 조각들을 애써 붙이는 대신, 그 조각들로 새로운 그림을 그리는 '동반자'로서의 의미를 찾아가고 있었다. 용서가 아닌, 화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