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피어나는 장미
제23장. 민준의 진심
재단에서 봉사하던 민준은 우연히 장미의 그림을 보게 되었다. 재단 복도에 걸린, 다큐멘터리의 포스터로도제 쓰였던 바로 그 그림이었다. 무채색으로 그려진 텅 빈 병원 복도와 그 한구석에 웅크리고 앉아있는 작고 앙상한 여자. 그가 외면하고 도망쳤던, 기억 속 장미의 모습이었다. 그림 속의 차가운 공기, 고독, 그리고 절망이 물리적인 충격처럼 그의 가슴을 쳤다. 그림 아래에는 '사랑은 두려움 앞에서 부서졌다'라는 짧은 문장이, 그의 심장에 찍히는 낙인처럼 선명했다.
그는 심장이 멎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그가 외면했던 장미의 고통이, 이렇게나 명확하고 강렬한 형태로 남아있을 줄은 몰랐다. 그는 묵묵히 봉사하며 자신의 잘못을 뉘우쳤다고 생각했지만, 그 그림을 보는 순간 자신의 속죄가 얼마나 피상적이고 부족했는지 깨달았다. 그의 속죄는 장미의 고통을 보듬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죄책감을 덜어내기 위한 이기적인 행동이었음을.
그는 그림 앞에서 한참을 서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무거운 발걸음을 옮겨 장미를 찾아갔다. 그녀는 작업실에서 지혜와 함께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햇살 아래, 붓으로 물감을 튀기며 깔깔 웃는 지혜와, 그 모습을 보며 평화로운 미소를 짓는 장미. 그 풍경은 그가 기억하는 과거의 장미보다 훨씬 더 아름다웠지만, 동시에 자신이 결코 들어갈 수 없는 견고한 세상처럼 느껴져 가슴이 아렸다.
민준은 장미의 눈을 마주하고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그의 셔츠 소매 끝에는, 정원을 가꾸다 묻은 듯한 작은 흙 자국이 묻어 있었다. 장미는 문득, 진료실에서 보았던 의사의 넥타이에 묻어있던 김칫 국물 자국을 떠올렸다. 비정했던 세상의 흔적과, 이제야 땅으로 돌아온 한 남자의 흔적. 그 둘은 전혀 다른 색이었다. 그의 눈에는 오랜 시간 곪아 터진 회한과 진심이 가득했다.
"장미야… 내가… 내가 너무 미안해. 내 두려움 때문에 널 혼자 두고 도망쳤어. 네 고통을 감당할 용기가 없었어. 이제야 알았어. 네가 얼마나 아팠는지… 내 사랑은 너무나 나약했어."
그의 고백에 장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의 눈에서 지난 세월의 회한과 진심을 읽었다. 한때는 증오했지만, 이제는 그저 상처 입고 길을 잃었던 한 남자가 보일 뿐이었다. 지혜의 얼굴이 떠올랐다. 용서는 과거를 위한 것이지만, 화해는 미래를 위한 것이었다.
"민준 씨, 나는 당신을 용서하지 않을 거예요. 하지만 지혜의 부모로서, 함께할 거예요."
그녀의 관계는 이제 '부부'라는 틀을 벗어나, '동반자'로서의 새로운 의미를 찾아가고 있었다. 용서가 아닌, 화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