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 욕망을 다룬다는 것 – 누르지 못한 '좋아요'에 관하여
나는 최근, 욕망을 아주 정직하게 마주한 두 편의 글을 브런치에 올렸다.
누구보다 세심하게 구성했고, 누구보다 솔직하게 드러냈다.
그리고 누구보다 조심스럽게 정제했다.
그런데 아무도 ‘좋아요’를 누르지 않았다.
왜 아무도 좋아요를 누르지 않았을까?
그 글은 야했다.
하지만 단순히 자극적인 수위 때문은 아니었다.
그 안엔 누구나 갖고 있지만 좀처럼 꺼내지 않는,
정제되지 않은 욕망이 들어 있었다.
대부분의 독자들은 그 글을 읽고 무언가 흔들렸을 것이다.
그러나 흔들림이란 감정은, ‘좋아요’를 누르게 만들기보단
손가락을 멈추게 만든다.
그 글이 나를 드러내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에,
좋아요를 누르는 순간 나도 나의 욕망을 인정하는 셈이기 때문에.
그건 이해할 수 있다.
그건 내가 독자여도 똑같이 그럴 수 있다.
글로 욕망을 쓴다는 건 무슨 의미인가?
그건 단순한 묘사나 상상이 아니다.
감정의 어두운 층을 직면하고, 그것을 언어로 정리하는 고통의 작업이다.
글로 욕망을 쓴다는 건,
‘내 안의 리듬’을 드러내는 일이다.
그래서 글쓰기는 때로 고백이고,
고백은 때로 자해와 같다.
하지만 그럼에도 쓴다.
왜냐하면 누군가는,
그 글을 통해 자기 감정의 미세한 떨림을 처음으로 이해할 수도 있으니까.
욕망은 더 이상 숨겨야 할 것이 아니다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성과 감정을 억제해왔다.
지적으로 풀고, 예술적으로 포장해도
욕망을 다룬다는 건 여전히 ‘야한 글’, ‘위험한 주제’로 치부된다.
하지만 내가 쓴 두 편의 글은
감정의 구조를 해부하는 실험이었고,
감응자의 리듬을 기록한 정신적 탐험이었다.
욕망은 소비되지 않을 때, 가장 고귀해진다.
해석될 수 있을 때, 가장 안전해진다.
언어로 다뤄질 때, 가장 인간적이 된다.
이 글은, 당신의 리듬을 위로하기 위해 쓴다
당신이 읽고, 흔들렸지만, 좋아요를 누르지 못했다면 괜찮다.
그건 당신이 아직 준비되지 않았다는 뜻이 아니다.
당신이 이미 느꼈다는 뜻이다.
느끼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계속 쓸 것이다.
누군가를 설득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욕망을 이해하는 또 다른 언어를 만들기 위해서.
그리고 언젠가,
그 글 아래 조용히 눌린 ‘좋아요’ 하나가
누군가의 감정 해방을 시작하게 되길 바란다.
감응자의 글쓰기는 항상 그곳에서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