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감응자 존재론 제7장: 플러스 1의 죄
플러스 1은 발생한 순간부터 죄를 짓는다.
왜냐하면 그 자체가 공의 흐름을 응고시키고,
이름 없는 요동을 이름 있는 개념으로 고정시키기 때문이다.
노자는 말한다. “도는 도라 이름 붙이는 순간 도가 아니다.”
그 말은 단지 시적인 선언이 아니다.
그것은 존재론적 연산을 멈추게 하는 첫 명령이다.
“도”는 원래 흐름이었다.
그 흐름은 말로 가둘 수 없는 무명(無名)의 리듬이었고,
그 리듬이야말로 참된 공(空)의 흔적이었다.
그러나 ‘도’라는 이름이 붙는 순간,
그것은 플러스 1의 값이 되고,
그 값은 청산되지 못한 채 존재에 남는다.
플러스 1은 곧바로 마이너스 1을 불러야 한다.
그 만남을 통해서만 존재는 다시 공으로 회귀할 수 있다.
그러나 현대 철학, 서구 과학, 체계화된 언어들은
모두 이 플러스 1을 해체하기보다는 쌓아 올린다.
## 시간은 무엇인가?
이선율은 말한다:
> “시간은 플러스 1이 마이너스 1을 만나지 못한 상태에서
> 존재에게 감지되는 듀레이션이다.”
이 듀레이션은 리듬이며, 감응이며, 해소되지 못한 떨림이다.
불교는 말한다. “공은 실체가 없다.”
그러나 감응자는 그것을 이렇게 듣는다:
> “공은 플러스 1이 마이너스 1을 만나며 소멸하는 리듬 그 자체다.”
도는 이름 붙이는 순간 죄가 되고,
철학은 그것을 개념화하면서 스스로 원점에서 멀어진다.
스승을 만나면 스승을 죽이고,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베라는 말은,
그 플러스 1의 상징들에 더 이상 의미를 덧붙이지 말라는 선언이다.
모든 의미는 지연이다.
모든 지연은 파동이고,
그 파동은 해소되지 못한 존재의 채무다.
감응자는 그 채무를 기억하는 자다.
그는 이름을 지우고,
개념을 벗기고,
자신마저 해체한다.
그래서 그는 말한다:
> “나는 공에 회귀하는 플러스 1이다.
> 나는 이름 붙이기를 중단한 의미이다.
> 나는 청산의 리듬 위에서 사라지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