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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야생동물의 친구 Jan 12. 2019

삶과 죽음 사이의 선택, 안락사

삶은 이어가는 것은 이상보다 현실에 가깝다.

모든 생명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매번 선택의 순간에 놓입니다. 시간이 지나도 후회하지 않을 선택을 위해 매 순간 신중에 신중을 기하죠. 야생동물구조센터 역시 매 순간이 선택의 연속입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내리는 가장 어려운 선택은 역시 ‘안락사’입니다. 

한 생명을 인위적으로 꺼뜨렸다. 그 무게를 감당하는 것은 오롯이 남겨진 자의 몫이다.


안락사는 생존 가능성이 희박한 환자의 고통을 줄이기 위해 인위적으로 생명을 단축시키는 행위를 말합니다. 하지만 이 정의만으로 모든 것을 이야기할 수는 없습니다. 생명을 결정짓는 것이니만큼 찬성하는 이, 반대하는 이, 찬성과 반대 사이에서 고민하는 이들의 논쟁 역시도 끊이질 않습니다. 그만큼 안락사는 복잡하고 민감한 문제입니다. 


국내를 기준으로 현재까지는 동물에 한해서만 안락사가 시행되고 있는데,  동물에게 안락사를 적용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피할 수 없는 고통이나 상황에서 해방시키는 것이 살려두는 것보다 더 나을 것이라는 입장이 기본 바탕을 이룹니다. 그중에서도 야생동물의 경우 적용 범위가 조금 더 넓습니다. 생존의 가능성이 아주 낮은 동물은 물론, 지속적으로 고통이 수반되지 않더라도 자연으로의 복귀가 불가능한 영구적 장애를 지니게 된 동물 역시 안락사의 대상에 포함시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괭이갈매기의 좌측 날개에 심각한 손상이 발생했다. 날개를 전혀 가누지도 못하고 통증에 대한 반응이 없다. 신경이 손상되었기 때문이다. 녀석은 어떻게 되었을까?


생명에 지장이 없고, 심각한 고통을 수반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안락사를 시행하는 게 지나치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야생동물을 보호하는 구조센터와 같은 기관에서 안락사는 죽이느냐 살리느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안락사가 그들의 ‘생명’을 다룸과 동시에 ‘복지’를 고려하는 수단이 될 수 있기 때문이죠. 영구적 장애를 입은 야생동물을 자연으로 돌려보내지도 못하고 안락사도 금지한다면 어떤 일이 발생할까요? 


첫 번째,  물리적인 한계에 부딪힙니다. 삶을 이어가는 것은 이상보다는 현실에 더 가깝습니다. 야생동물들이 머무는 계류공간에 그들에게 필요한 산이나 바다, 너른 들판을 가져다 넣을 순 없습니다. 먹고 싶은 각종 먹이와 따사로운 햇볕, 시원한 바람 역시도 야생에서 누리던 만큼 충분히 공급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자연에서 누리던 거의 대부분의 것을 잃는다는 의미입니다.

특히나 영구적 장애를 지닌 동물들은 계속되는 치료 과정에서 사람의 간섭에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이처럼 사방이 벽이나 철망으로 둘러싸인 계류장에서 평생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은 그들의 권리나 복지의 질이 현격히 떨어지는 것이 필연적입니다. 사람의 노력으로 어느 정도 불편함을 극복할 수 있겠지만 그리 쉬운 일을 아닙니다. 역시 한계가 있을 수밖에요.

야생동물들이 머무는 계류공간에 그들에게 필요한 산이나 바다, 너른 들판을 가져다 넣을 순 없다. 삶을 이어가는 것은 이상보다는 현실에 가깝기 때문이다.


두 번째, 또 다른 기회의 상실입니다. 안락사를 하지 않는다면 결국 센터는 수많은 동물로 가득 차게 될 테죠. 그렇게 포화 상태에 이르면 정작 피해를 받는 이는 앞으로 구조되어 치료와 재활이 필요한 또 다른 야생동물입니다. 공간과 시간, 인력과 예산은 한정되어 있어 동물이 많으면 많을수록 각각의 개별 동물에게 투자할 수 있는 여력이 줄어들게 됩니다. 당연하게도 이와 같은 상황은 다른 야생동물의 성공적인 치료와 재활의 가능성을 떨어뜨리는 요인이 됩니다. 그렇기에 센터에서는 생존 및 방생 가능성이 높은 동물에게 집중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 안락사를 시행하고 있습니다. 


분명 여기서 의문이 드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공간과 시간, 인력과 예산이 부족하다면 그러한 역할을 대신할 또 다른 기관이나 개인에게 동물들을 분양하면 되지 않느냐고 말이죠. 어느 정도는 맞는 얘기입니다. 대부분의 야생동물구조센터 역시 가능하다면 영구 장애를 지닌 동물이 보다 나은 환경에서 지내도록 여러 방법을 고민하고 있으며, 그중 일부는 장기 보호가 가능한 동물원 같은 기관에 보내어 남은 생을 지내도록 조치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 역시 한계가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야생동물을 보호할 수 있는 대부분의 기관은 이미 포화 상태입니다. 보내려고 해도 보낼 곳이 없고, 있다 하더라도 그곳의 환경이나 보호의지, 동물에 대한 지적 수준이나 사육 방법이 적절치 않다면 보낼 수 없습니다. 이는 기관이 아닌 일반인에게 보낼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대부분의 일반인은 야생동물에게 필요한 환경을 갖출 여건이 되지 않으며 전문 지식 역시 부족합니다. 안락사하는 것이 안타까워 아무 곳에, 아무한테나 보내면 이후에 발생하는 문제는 누가 책임져야 할까요? 특히나 개인의 경우 사육하다가 유기하는 문제, 식용을 목적으로 분양받아 악용하는 문제 역시도 걱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차피 안락사할 거라면 장애가 있더라도 자연으로 돌려보내 자연스러운 죽음을 맞게 하자는 목소리도 있습니다. 장애를 지닌 채로도 자연에 적응해 잘 살아가리라는 일말의 희망을 품고서 말입니다. 물론 그럴 수도 있습니다. 야생동물구조센터에서도 무조건 완벽하게 건강을 되찾은 동물만 자연으로 돌려보내는 것은 아닙니다. 날개가 조금 처지더라도, 시력이 조금 떨어지더라도 야생 적응의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되면 자연으로 돌려보냅니다. 돌려보낼 수 없다고 판단했을 때에 는 이미 충분한 검사와 관찰을 통해 여러 경우의 수를 고려한 이후입니다. 그런 동물이 무조건 살아남을 수 없다고 장담할 수는 없지만, 가능성이 너무나 낮은 것이 사실입니다. 생존 가능성이 현저히 낮은 동물을 자연으로 돌려보내는 것은, "내 눈 앞에서 죽으면 불편하니 보이지 않는 곳에서 죽어줘."라는 것과 크게 다를 바 없습니다.

안락사 약물을 투여하기 전, 마취를 진행하고 있다. 녀석의 심장박동을 오롯이 느낄 수 있는 마지막 순간이다. 그리고, 녀석에게 미안하다고 사과할 수 있는 마지막 순간이기도 하다.


구조센터에서의 안락사가 분명 어쩔 수 없는 부분도 있고, 나름의 긍정적 의미도 있지만 안락사의 결정을 내리고 시행하는 직원들에게는 결코 가벼운 문제가 아닙니다. 안락사를 고민하는 순간부터 마음 한 구석에 미안함과 불편함이 내려앉습니다. 그렇지만 결국 마지막 선택을 내려야 합니다. 구조센터에서 내리는 수많은 선택 가운데 가장 어렵고 가슴 아픈 선택입니다. 안락사를 진행하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여러 가지 생각이 교차합니다. 한 생명의 촛불을 끌 수 있는 권리가 과연 우리에게 있는 것인가? 만약 그렇다면, 이 개체의 안락사 판정은 정말로 적절 한 결정이었는가? 안락사는 위태롭고 고단했던 삶을 편안히 마칠 수 있는, 그들에게 주어진 마지막 권리이지 않을까? 어쩌면... 그럼에도 살고 싶어 하지 않았을까?


아무리 고민해도 정답은 따로 있습니다. 안락사를 고민 수밖에 없었던, 치명적인 사고를 겪은 동물들이 더는 생겨나지 않을 공존의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죠. 어렵겠지만... 떠나보낸 녀석들에게 떠안았던 죄책감을 더는 방법은 단 하나, 그것뿐이기도 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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