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기 좋은 길 @ 캐나다 앨버타 주
'캐나다 밴프 국립공원'하면 딱 떠오르는 몇 곳들이 있다. 레이크 루이스(Lake Louise), 레이크 피토(Lake Peyto), 그리고 밴프(Banff) 도시 그 자체. 무려 12년 전에 대학생 때에(맙소사, 내 나이가 그렇게 됐다니...) 이 좋은 곳을 단체 관광으로 왔었는데 그때는 가이드에 이끌려 단체 관광버스에 몸을 싣고, 내가 어디를 가는지도 모른 채 그냥 이동해 다니기 일쑤였다. 이동하면서도 창 밖을 보지 않고 그냥 친구들하고 잔뜩 떠들기만 했었던 것 같다. 그때 다녔던 곳 중에 그나마 이름이 기억에 남는 곳들이 바로 저 곳들이다. 레이크 루이스는 유키 구라모토의 피아노곡으로 먼저 접했던 곳이라 더 신비스럽게 느껴졌던 것 같고, 레이크 피토는 빙하의 물 색깔이 너무 아름다웠어서. 그리고 밴프라는 도시 자체가 굉장히 예쁜 산들에 둘러 쌓여 있어서 기억에 남았던 것 같다.
이번에 신랑하고 여행을 가게 되었을 때, 남편은 처음이라 기대에 들떠 있었고 나는 무언가 기대감이 부족했던 것 같다. 아무래도 한번 다녀와서였을까. 그래서 이번에는 안 가본 데, 걸어서 갈 수 있는 데를 가보겠노라고 다짐을 했다. 그래야 감동도 커지고 여행도 재미나지 않을까 해서. 론리플래닛 밴프 편을 열심히 읽다가 문득 발견하게 된 곳이 있다. 선샤인 매도우(Sunshine Meadow), 이번에 소개하고 싶은 곳이다. 밴프에서 남서쪽으로 20분쯤 가게 되면 '선샤인 빌리지'라는 곳이 있는데, 그곳에서 이곳의 입구를 만날 수 있다.
선샤인 메도우(Sunshine Meadow)는 해발고도 2200 - 2300m, 산들 사이에 있는 평지 초원이라 오르막 하이킹이 아니고 거의 대부분 평지 하이킹이다. 하지만 2000m 이상의 하이킹을 처음 해 보는 사람들에게는 굉장히 높은 고도일 수도 있기 때문에 고산병 증세가 나타날 수도 있다. 나 역시도 태어나서 처음 가 본 2000m 이상의 하이킹이었어서 생각하지도 않았던 증세들이 나타나기 시작했었다.
어쨌든, 이곳은 밴프와는 다소 떨어져 있어서 바로 아래 스키장 주차장에서부터 셔틀을 타거나 아니면 밴프에서 셔틀을 타고 이동해야 한다. 고도가 높은 지대이기 때문에 6월 중순에서 10월 초까지만 개장이 되는 하이킹 트레일이다.
우리는 9월 초에 다행히 휴가를 얻어 일주일간 캐나다를 다녀올 수 있었고, 바로 첫날 이곳을 가게 되었다. 하지만 날씨 운은 따르지 않아 도착한 날부터 흐린 날이 계속되었고, 그 이후의 일기 예보도 계속 눈이나 비로 예상된 상황. 어쨌든 날씨에 개의치 않고 출발을 했지만 역시나 스키장 주차장에 도착할 때까지도 먹구름이 가득했다.
주차장엔 스키장 개장 철도 아직이어서, 차들도 별로 없고 한산해 보였다. 미국의 노란색 스쿨버스 한 대가 덩그러니 그 앞에 주차하고 있었는데, 설마 저 버스는 아니겠지? 싶었다. 애들이 이런 한적한 곳에 수학여행 왔을 리는 없고 뭘까? 생각했는데 셔틀 표를 끊고 나니 직원이 저 스쿨버스를 타고 트레일 입구로 가라 한다. 더불어 흐린 날씨로 인해 4시간 이후 정각이, 내려오는 셔틀 막차이니까 놓치면 걸어서 내려오란다. 4시간이면 충분하겠지? 싶었다. 산장에서 점심도 먹고 여유도 있겠네 싶었다.
셔틀에서 내리니, 저 멀리 개장하지 않은 스키장이 보인다. 산꼭대기에는 눈이 조금 덮여 있는데 누런 풀들이 곳곳에 가득한 것으로 보아선 아직 스키장은 개장이 조금 남았나 싶다. 녹이 슬어 보이는 허름한 리프트도 곳곳에 보인다. 그럼 내가 지금 아무도 없는 스키장의 가을을 걷고 있는 거야? 싶었다. 분명 평지 하이킹이라고 들었는데 초입은 조금 오르막인 게 조금 숨이 차기 시작했다. 계속해서 이러는 것은 아니겠지? 생각했다.
오르막의 끝에 다다르니(사실 오르막이 그렇게 길지는 않다), 드디어 눈 앞에 초원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사실 누런 풀들이 가득한 산이어서 그렇게 기대를 많이 하지는 않았는데, 그 위로 듬성듬성 자라난 크리스마스 트리 같은 크고 작은 나무들이 정말 아기자기하다. 누런 풀들 조차 편안한 이불처럼 느껴져서 폭신폭신 푸근한 마음까지 든다. 눈 덮인 산들이 널리 보이는데, 군데군데 누런 풀들과 푸른 나무들이 어우러져서 유화 물감으로 산을 칠해 놓은 느낌이다. 엊저녁에 눈인지 비가 왔었는지 주변이 촉촉하고 풀 냄새들이 가득해서 올라온다. 눈 앞에 그야말로 파노라마 광경이 펼쳐지고 있으니, 언제 오르막이 숨이 찼었던 거냐고, 하나도 힘이 들지 않는다고 그런 다짐까지 생긴다.
몇 백 미터도 안 가서였을까. 저 멀리 벌써 첫 번째 호수인 락 아일 레이크(Rock Isle Lake, 일명 돌섬 호수)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 크지 않은 굉장히 귀여운 규모의 작은 호수였는데 물이 초록빛이었다. 이끼가 가득 낀 것이 아니라 맑은 초록빛이다. 순간 정말 신이 나서 서둘러 앞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가까이 가서 보니, 호수 가운데 아주 작은 섬도 하나 있다. 건조해져서 물이 빠질 때는 아마도 육지와 연결이 되겠지... 그리 깊은 호수는 아니었지만, 저 멀리 보이는 눈 덮인 산들과 함께 초록 빛깔의 호수. 그리고 누렇고 푸른, 군데군데 붉기도 한 이 초원과 한쌍의 그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 정말 이게 몸으로 느끼는 가을이구나! 싶어 한참을 그곳에 머물러서 사진을 찍고 눈에 담아가고 있었다.
평소에 가을이 왔음을 느끼게 되는 지표들이 몇몇 개 있다.
+ 날씨가 추워져서 여름옷을 집어넣고, 서랍에서 긴 옷들을 꺼낼 때.
+ 갑자기 책을 읽고 싶어 지고 입맛이 돌아 마구 먹게 될 때.
+ 옆구리가 허전하고 괜스레 외롭다 느낄 때.
+ 길을 걷다가 바닥에 떨어진 은행 잎을 보며 예쁘다 말하다가도, 은행 열매 냄새에 코를 찌푸리며 나무를 피해 걸어갈 때.
+ 달력에 아주 길게 빨간, 추석 연휴를 확인하며 올해는 얼마나 길게 쉴 수 있나 확인할 때.
나는 보통 이럴 때, 가을이 왔음을 느낀다. 아니, 알게 된다는 말이 더 정확할 듯 싶다. 변화하는 주변 환경이 나를 변화시키고 내 마음을 달라지게 만드는 그런 것. 그게 보통의 우리가 느끼는 계절의 변화, 가을의 문턱이 아닐까.
그런데 이곳에서는 그냥 눈으로 보고, 코로 누런 풀내음을 맡고, 가을의 서늘한 바람을 두 뺨으로 느끼며 가을을 느낄 수가 있었다. 머리로 인지하지 않아도 나를 내려놓으면 민감해지는 이 코와 뺨과 귀, 그리고 내 피부가 마음껏 가을을 느낄 수가 있었다. 이 얼마만의 평안해지는 느낌인지. 유명한 성당이나 절에 간 것도 아닌데, 내 마음이 그냥 그렇게 안정되고 힐링되는 느낌이다.
이 트레일의 장점 중 하나인데, 코스가 짧은 편이라 첫 번째 호수를 둘레길로 돌아 숲길을 조금 걷다 보면 곧바로 두 번째, 그리고 세 번째 호수에 다다르게 된다. 두 호수다 깊이가 무릎 아래로 올 만큼 아주 얕고, 물 속이 정말 맑게 보여서 등산을 하다 손을 담그면 아주 시원하게 호수를 즐길 수 있다. 호수 주위에 풀들 또한 달달한 모카향이 곳곳에 나고 있어 걷는 내내 무언가를 먹지 않아도 입 안이 아주 달달한 느낌이다.
두 번째 호수와 세 번째 호수 사이에 있는 심슨 뷰 포인트(Simpson viewpoint)에 다다르면 이 트레일 가장 바깥쪽에서 사람의 인적이 드문 계곡을 바라볼 수가 있는데 그 풍경이 아주 장관이다. 사람의 인적이 전혀 없는 빼곡한 숲이 저 멀리 보이고, 산 넘어 산. 깊은 계곡을 이루고 있다. 모든 산들은 꼭대기가 눈이 덮여 있어서 여름과 겨울을 동시에 보는 느낌이다. 걸음을 멈추고 계곡을 바라보고 있으면 주변이 정말 고요해서 바람 소리밖에 들리지 않는데, 이 바람 소리를 따라 계곡 위로 구름이 흘러가는데 그걸 물끄러미 바라보는 그 경험이 정말 잊을 수 없는 감동이다.
이 뷰포인트에서 감동을 느끼고 있던 그 찰나. 갑자기 먹구름이 몰려오기 시작해서 눈발이 날리기 시작했다. 시계를 보니 버스도 한 시간 반 내에 떠날 예정이다. 이때부터 주차장을 향해 급하게 걷기 시작했다. 온도도 급격하게 떨어지고 바람도 불기 시작하니, 정말로 추워지고 있었다. 문제는, 이때부터 약간의 고산병 증세가 나타나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갑자기 다리에 모래주머니를 찬 것 마냥 종아리가 처음엔 무거워지는 느낌이더니, 그다음엔 허벅지 마저도 엄청나게 무겁게 느껴졌다. 한걸음, 그리고 다음 걸음을 움직이는 게 너무 힘들어지는 거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것도 고산병 증세의 하나라고 하던데, 내 생애 처음 해 보는 2000m 이상의 하이킹이어서 몸에 무리가 갔던 것 같다. 하지만, 이 날 이후에는 그런 증세는 없었다. 때문에 혹시라도 고산 하이킹을 처음 해 보는 사람이라면, 평지 하이킹이라도 천천히 하기를 추천한다.
사실은 내려오는 길에 스탠디쉬 뷰 포인트(Standish viewpoint)에 들러 모든 호수 풍경을 볼 계획이었었는데, 나중에 가서는 함박눈도 쏟아지고 구름에 가려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또 버스 막차 시간도 거의 근접해서 뷰포인트 구경은 포기. 아무래도 사진 찍느라 천천히 걸어서 짧은 거리였음에도 불구하고 생각보다 많은 시간을 써서 그랬나 보다. 하지만, 맑은 날 이 뷰 포인트에 오르면 아래와 같은 절경을 볼 수 있다 한다. 아무래도 이 풍경을 보는 것은 다음 기회로 연기하도록 해야 할 것 같다.
캐나다 록키에는 아주 큰 호수들이 많다. 또 빙하가 녹아 생긴 호수들이라 에메랄드 빛깔의 정말 희한한 물 색깔을 띠고 있는 호수들도 많이 있다. 하지만, 가끔은 이런 작고 직접 물을 손으로 만질 수 있는, 말 그대로 접근 가능한 호수도 그리워진다. 또 여름이나 가을에 가면 꽃도 만발하고 주변이 너무 예뻐져서 경치를 구경하며 천천히 걸을 수 있는, 그런 길로는 딱 적당한 것 같다. 또 경사도 그리 급하지 않고 대부분이 평지이고 사람도 그리 많지 않아 조용하게 산책(? 나한테는 산책 같았다.)을 즐길 수 있어서 부모님을 모시고 걷기에도 적당하다고나 할까. 많이 걷는 것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새로운 경치는 즐기고 싶은 그런 사람들에게 꼭 추천하고 싶은, 숨겨진 밴프의 아름다움이다.
* 선샤인 매도우 트레일 관련 정보
- 이동: 밴프 근처 숙소에 머무른다고 가정할 때, 밴프에서 셔틀 타거나 선샤인 빌리지 주차장에 주차 후 셔틀 이동(http://sunshinemeadowsbanff.com/sunshine_meadows/shuttle.htm , 셔틀을 미리 예약해 두면 편하다.)
- 개장 시간: 6월 중순 - 10월 초, 8 AM - 5 PM이나 날씨에 따라 그때그때 변동
- 하이킹 소요 시간: 각자의 체력에 맞게 코스를 선정할 수 있는데, 제일 크고 예쁜 첫 번째 호수, 락 아일 레이크만 보는 경우에는 왕복 1시간이면 가능하다. 모든 코스를 다 도는 경우에는 왕복 2시간 반 - 4시간 정도 소요될 것이라고 예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