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의 파편들
'4층에는 방이 네 개 있었다. 그중 한 방에는 미쇼노라는 늙은 처녀가 들어 있었다. 다른 방에는 고리오 영감이라는 별명을 가진, 이탈리아식 국수와 전분을 만드는 전직 제면업자가 살았다.‘
- <고리오 영감>, 오노레 드 발자크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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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시원에 살아본 적이 있다. 그곳은 낡고 소외된 가난이 스며든 곳이었지만, 그럼에도 대체로 사람이 살 만한 곳이었다.
내가 살았던 그 고시원 안에는 분명 마음이 넘쳐흘러서 행복해 보이는 사람들이 있었다. 물론 아주 오래전에 가난에 잡아 먹히고 만 듯한 쪼그라든 사람들도 있었다. 그런 사람들은 오래전에 꺾인 나뭇가지처럼 바짝 말라붙어 있었으나, 그럼에도 미약한 생기가 조금은 남아있었다.
고시원은 5층 짜리 상가 건물의 4층과 5층을 쓰는 곳이었다. 엘리베이터가 없어서 4층까지 올라가려면 계단을 이용해야만 했다. 어두침침한 계단을 올라간 후 4층에 도착해서 제일 먼저 마주하게 되는 곳은 사무실이었다. 회색 빛깔의 사무실 문에 ‘출입금지’라는 팻말이 붙어 있다. 문 옆에는 손바닥 두 개 정도의 문구멍이 뚫려 있었는데, 그 구멍 안에는 고시원을 관리하는 주인 아주머니가 들어있다. 내 생각에 그녀는 그 구멍 속에서 먹고, 자고, 사는 것이 분명했다. 내가 문구멍을 두드릴 때마다 단 한 번도 빠짐없이 그 안에서 고개를 내밀었기 때문이다.
사무실 우측으로는 좁은 복도가 보인다. 복도를 따라 네모난 방들이 쭉 나열되어 있었는데, 그 복도에서는 냄새나고 오래된 시간들이 서로 뒤죽박죽 쌓여있는 느낌이 났다. 나로서는 좁은 건물 안에 어떻게 이렇게 많은 방이 들어있을 수 있는지 신기할 따름이었다.
복도를 지나 방 안으로 들어가면, 그 안에는 침대와 책상이 한 개씩 있었다. 그 외에 남는 공간은 두 다리를 벌리고 서면 꽉 찰 만큼이 전부였다. 그래서 방 안에 서 있기보다는 앉아있거나 누워있는 편이 훨씬 나았다. 하지만 책상이나 침대에 몸을 기대면 늘 삐그덕거리는 소리가 났는데 그 때문에 편히 앉아있거나 눕는다는 느낌은 별로 들지 않았다. 그것들은 사실 가구라기보다는 싸구려 장식품에 가까운 것들이었고, 그러므로 무너지지 않고 내 몸을 지탱해주는 것만으로도 다행인 것들이었다.
그때의 나는 4층에 살았던 것 같다. 4층이나 5층이나 별반 차이가 없어서 사실 그게 그거였을 것이다. 각 층에는 모두 회사의 탕비실 같은 곳이 있었는데 그곳에서는 마음껏 커피와 녹차를 타 먹을 수 있었다. 탕비실 식탁에 분홍색 꽃무늬가 그려져 있는 테이블보가 가지런히 놓여있던 것이 기억이 난다. 그 외에도 꽃을 연상시키는 여러 가지 소품들이 고시원 곳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어색하고 희망찬 꽃무늬가 고시원에 오래 자리 잡은 불안을 애써 감추려고 노력하는 것처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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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고시원에는 특별한 점이 두 가지 있었다. 첫 번째는 고시원 스스로 자신을 고시원으로 정의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고시원 건물 바깥에는 너무나 당당하게 '하숙집'이라는 글자가 적혀 있었다. 원래 '하숙'이라는 말은 누군가의 집 아래에 얹혀사는 형태를 의미한다. 집주인이 빈 방을 다른 사람들에게 내어주고, 거실이나 부엌, 욕실을 같이 쓰는 경우가 그렇다. 보통은 가정집에서 그렇게 하는데, 그 건물은 누가 보아도 가정집이 아니었다. 곳곳이 썩어가고 있는 그 낡은 상가 건물이 왜, 어째서 하숙집인 것인지 나는 정말로 궁금했다.
다른 고시원에서 살아본 경험은 없으므로 비교하기가 어렵지만 내 생각에 고시원의 주인 아주머니가 자신의 고시원을 하숙집처럼 친근하게 운영하고 싶어 했던 것 같다. 그녀는 나이에 비해 아주 젊어 보이는 여자였으며, 고시원 주인답게 그 안에 들어 사는 사람들에 대해 매우 자세히 파악하고 있었다. 그녀는 우리보다 우위에 있을 수도 있는 사람이었나, 내 기억으로 그녀는 단 한 번도 우리를 오만한 시선으로 바라보지 않았다. 오히려 언제나 우리의 삶을 매우 존경한다는 듯한 태도를 갖추고 있었는데, 깨끗하게 정리해 둔 탕비실이나 깔끔한 사무실 주변만 봐도 그런 그녀의 마음이 그대로 느껴지곤 했다.
그녀는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문구멍 안에서 보냈지만 가끔씩 바깥에 나와있을 때도 있었다. 그럴 때에는 보통 복도나 계단에 쪼그려 앉아서 청소를 하는 경우가 많았다. 돌멩이처럼 작은 그녀의 뒷모습은 이상하게도 매우 우아해 보였는데, 그것은 아마도 그녀의 옷차림 덕분이지 않을까 싶다. 내 기억 속 그녀는 늘 무릎 아래까지 내려오는 긴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그녀의 노란색 원피스는 나뭇잎 그림자 사이로 비쳐 드는 햇볕처럼 잔잔하고 아름다운 분위기를 만들어냈다. 나는 그런 그녀가 정말 예쁘다고 생각했으며, 그래서 그곳에 사는 나의 삶이 그리 나쁘지는 않은 것 같다고 생각했다.
고시원의 두 번째 특별한 점은 바로 주인 아주머니인 그녀가 고시원 사람들을 데리고 몇 차례 외식을 했다는 점이었다. 그녀가 어떻게 사람들을 모으고, 왜 우리가 아웃백에서 다 같이 저녁 식사를 하게 되었는지 정확한 사정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내가 다만 기억하는 것은 고시원 사람들이 한 테이블에 둘러앉아서 그녀가 시켜준 오지 치즈 프라이와 투움바 파스타를 먹었다는 점이다. 테이블 정중앙에 앉아있는 그녀는 자신의 선행에 약간 취해있는 듯한 모습이었으나 나는 그런 그녀가 결코 밉지 않았다.
그날 저녁, 그녀는 자신의 오랜 기억들을 꺼내어 사람들에게 조금씩 나누어주었다. 4층에 사는 한 여자는 그 기억들을 음식과 함께 야금야금 먹었고, 한 젊은 남성은 그것들을 모두 튕겨낸 채 허공만 바라보며 멍하니 앉아만 있었다. 나는 그런 그들을 바라보며 참 재미있다고 생각했다. 억지로 붙여놔도 서로 피하기에 바쁠 것 같은 사람들이 한 자리에 모여 대화라고 할 만한 것을 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들 중에는 유쾌한 남자가 하나 있었다. 그는 자신이 동영상 편집 일을 한다고 했다. 그 일이 재미있냐고 누군가 물으니 잠시 정적이었다. 그래도 할 만하다고, 앞으로 전망도 좋다고, 그런 말들이 여러 입에서 흘러나왔다.
내가 이해하기에 그의 일은 시간을 쪼갠 뒤에 다시 이어 붙이는 일이었다. 자신이 편집하는 동영상 안에서 그는 전지전능한 신과도 같았다. 불필요한 시간은 잘라내고, 자신이 의도한 대로 스토리를 재구성한다. 그가 잘라낸 시간의 파편들은 완전히 사라지거나 다른 시간으로 재탄생한다. 결 그는 시간을 다루는 직업을 가진 셈이었다.
이윽고 유쾌한 그 남자는 다른 주제에 대해서 얘기하기 시작했다. 그 주제가 애니메이션이었는지 영화였는지는 자세히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만 내가 기억하는 것은 그의 얼굴에서 어떤 밝은 기운이 쏟아지듯이 퍼져나갔고, 이 때문에 그는 정말 행복해 보였다는 사실이다. 그는 결코 세계로부터 버려진 사람이 아니었다. 오히려 새로운 세계를 구축하는 사람, 시간을 건너뛰는 사람, 허구의 시간 속에 자신의 삶을 내던져서 행복감을 느끼는 사람이었다.
동영상 편집자 옆에는 중년의 여성이 앉아 있었다. 그녀는 누가 무슨 말만 해도 말없이 미소만 짓는 사람이었다. 그 미소는 허위가 아닌 진실이었으며, 그래서 나는 그녀의 이름도 모르면서 남몰래 그녀의 미소를 좋아했다.
그녀의 건너편에 앉아있는 쪼그라든 남자에게서도 행복을 찾아볼 수 있을까. 그는 아무런 표정도 짓지 않고 있었다. 그 얼굴은 얼굴이 있어야 할 자리에 겨우 붙어있는 가면 같았고, 쉽사리 떨어져 나갈 듯 불안해 보였다.
그럼에도 그 남자는 몸을 잔뜩 수그린 채 앞에 놓인 음식을 부지런하게 잘 먹었다. 누군가 음식을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는 것은 생각보다 행복한 일이었고, 그래서 나는 편안한 눈길로 그를 바라보았다. 나의 시선이 그에게 너무 가닿지 않기를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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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시원 사람들 모두에게는 행복의 파편이 한 두개씩 붙어 있었다. 누군가의 작은 웃음, 예의 바른 손길, 겸손한 눈동자와 서로를 격려하는 어깨들, 그리고 어쩌면 이제는 모든 것이 다 잘 풀릴지도 모른다는 불안한 희망도 그곳에 함께 있었다.
어쩌다 이곳에서 살게 되었냐는 뻔한 질문은 서로 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 질문에 대한 답변은 이미 질문 속에 들어있었다. 우리는 그냥 정말 ‘어쩌다’ 고시원에 오게 된 것이니까. 그러므로 그저 눈이 마주쳤을 때 살짝 웃으면 그것으로 충분했다. 나의 웃음이 당신의 가난을 가려주기를, 당신의 미소가 나의 불행을 덮어주기를. 우리는 그런 마음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던 것이다.
물론, 그들 중 누군가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겪게 되는 엄청난 괴로움에 빠져있었을지도 모르겠다. 나 또한 괴로운 상태에 있었으니까. 나는 나의 소외된 상태와 조각난 마음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바로 그날. 낯선 이들과 테이블에 둘러앉아서 같이 음식을 먹기만 했을 뿐인데도, 나의 소외와 결핍, 균열과 불안이 조금은 가려지게 되었다. 완벽하지 않은 사람들이 서로의 치부를 가려주는 것. 이런 것이 사람 사는 모습이 아닐지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얼마 전, <고리오 영감>을 읽으며 나는 내가 살았던 고시원을 떠올렸다. 책 속의 하숙집 사람들은 서로의 고통을 덜어주기에는 자신들이 무능하다는 사실을 알았다. 무능한 그들은 서로에 대해 무관심했으며, 그저 식충이처럼 살뿐이었다. 그곳은 가난으로 가득 찬 어둡고 비참한 감옥 같았다.
그러나 내가 머물렀던 고시원은 책 속의 분위기와는 달랐다. 물론 그곳에도 슬픈 가난이 있었으며, 불행이 흔히 만들어내는 무채색한 분위기가 존재했다. 하지만 그 고시원에는 긴 원피스를 입고 볕뉘처럼 부드러운 분위기를 만들어내는 주인 아주머니가 있었다. 시간을 뒤로 돌리거나 사라지게 하는 전지전능한 편집자도 있었다. 엷은 미소가 아름다웠던 중년의 여자와 비록 불운해 보이기는 했으나 그 누구보다 맛있게 음식을 먹던 쪼그라든 남자도 있었다. 우리가 서로의 이름을 알아야 할 필요는 없었다. 그냥 그렇게 각자가 살아가고 있음을 알아차리고, 눈이 마주쳤을 때 잠시 웃을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행복이 아닐까 한다.
그곳에서 살았던 시간은 몇 개월 정도였지만, 나는 나의 뒤를 이어 내 방에서 살게 될 누군가가 행복하기를 바랐다. 그 작은 방 안에, 탕비실에, 선반 위에, 좁은 복도에, 발꿈치를 들고 조심조심 걷던 누군가의 발자국 밑에 숨겨져 있는 행복의 파편을 찾아내기를. 그래서 자신만의 생기를 되찾기를. 건강하고 행복하기를.
나는 그때도, 지금도 그렇게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