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점의 스펙트럼
[관점은 생각이 아니라, 서 있는 자리다.]
16편에서 우리는 말했다.
사람을 무너뜨리는 것은 사건이 아니라 관점의 붕괴라고. 언급한 바 있다.
사건은 늘 거기에 있지만,
그 사건을 받아들이는 각도는 사람마다 다르다.
현실의 무게가 삶을 누르는 것이 아니라,
그 현실을 해석하는 관점의 방향이
삶 전체의 하중을 결정한다.
같은 하루를 두고
누군가는 소모를 말하고,
누군가는 축적을 말한다.
이 차이는
의지의 문제가 아니고,
성격의 문제도 아니다.
관점이 이미
그 사람의 삶 속에
구조로 고착되어 있기 때문이다.
관점은 생각이 아니다.
관점은 사람이
세계 위에 서 있는 방식이다.
[관점에는 정답이 없다.]
그래서 질문은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관점에는 정답이 없는데,
왜 우리는 늘
정답처럼 말하고,
정상처럼 분류하는가.
관점이란 본래
사물을 어디서 보느냐의 문제다.
앞에서 볼 수도 있고,
옆에서 볼 수도 있고,
안쪽에서 볼 수도 있고,
한 발짝 떨어져
거리 바깥에서 볼 수도 있다.
같은 대상은
각도에 따라 전혀 다른 얼굴을 드러낸다.
그래서 관점에는
옳고 그름이 없다.
관점은 언제나 유동적이고,
한 번 선택되면 되돌릴 수 없으며,
어떤 답으로도
완전히 멈춰 서지 않는다.
정답이 없다는 것은
혼란이 아니라,
세계가 본래
단선으로 열려 있지 않다는 증거다.
[관점이 사회로 넘어가는 순간]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관점을
정상과 비정상으로 나눈다.
이 순간,
관점은 개인의 사유를 떠나
사회로 넘어간다.
사회는 관점에
진리를 묻지 않는다.
옳은지를 묻지 않고,
깊은지를 묻지 않는다.
대신 사회는
다음과 같은 질문만을 던진다.
이 관점이
현실을 통과할 수 있는가.
사건 앞에서
방향을 잃지 않는가.
문제를 문제로 인식하게 만드는가.
그리고 그 문제를
사람들이 견딜 수 있는 언어로
정리할 수 있는가.
이 질문에 답하지 못하는 관점은
틀린 것이 아니다.
다만
사회적으로 처리 불가능한 관점이 된다.
[정상은 진리가 아니라 통과 기록이다.]
그래서 정상은
진리의 이름이 아니다.
정상은 언제나
통과 기록의 이름이다.
가장 많은 사람이
불편 없이 버틸 수 있었고,
질서를 과도하게 흔들지 않았고,
유지 비용이 가장 낮았던 관점.
그 관점은
옳아서가 아니라,
지금까지 살아남았기 때문에
정상으로 남는다.
정상은 선택의 결과가 아니다.
정상은
시간을 통과한 관점의 흔적이다.
[사유는 관점을 바꾸지 않는다.]
여기서 사유의 역할이 분명해진다.
사유는 관점을 바꾸지 않는다.
사유는 관점을
더 깊은 곳으로
밀어 넣는다.
얼마나 깊이 파고들었는가.
얼마나 거칠게 질문했는가.
얼마나 많은 층위를
포기하지 않고 통과했는가.
그 깊이에 따라
관점은
의견으로 남기도하고,
방향으로 변하기도 한다.
사유가 얕으면
관점은 말이 되고,
사유가 깊어지면
관점은 세계를 통과하는 힘이 된다.
[관점이 본질을 겨냥하는 순간]
방향성을 가진 관점은
사건을 소비하지 않는다.
사건은 문제로 변하고,
문제는 구조로 드러나며,
구조는 결국
본질을 노출한다.
이 순간,
관점은 더 이상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에 있지 않다.
관점이 정상처럼 보이는 때는
사회가 허락했을 때가 아니라,
사물과 사회의 중심을
정확히 겨냥했을 때다.
[투명해진 관점이 남기는 것]
그래서 사유하는 사람은
체제를 부정하지 않는다.
다만 체제를
더 이상 숨지 못하게 만든다.
이 투명함은
질서를 무너뜨리지 않지만,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든다.
불편함 속에서
관점은 더 이상
조용히 지나가지 않는다.
[다음 질문]
이렇게
방향을 가진 관점은
어디에서 멈추는가.
이어 <사유문명론 18편 - 관점은 어디에서 멈추는가〉로 이어집니다.
<Finnegans wake>
“이브와 아담의 성당을 지나 강은 내달리고, 굽이치는 해안에서부터 굽어 흐르는 육지로 휘어들어 간 곳까지, 우리로 하여금 둘러싼 드넓은 비코의 시골 마을옆으로 호우드 성과 주위의 지역까지 되돌아오게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