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편, 상사맨 융화되나?
미생의 오 과장은 이른바 워커홀릭으로 불리며 자기의 삶을 회사에 쏟아붓는 캐릭터이다. 팀원은 고작 자신을 포함해 3명뿐이며 신입사원 역시 정규직이 아닌 계약직으로 채용된 전직 바둑기사 장그래. 설정 자체가 다소 현실감은 떨어지지만 만화의 전체적인 스토리가 워낙 탄탄하여 어느새 그럴만도 하다라는 착각과 함께 줄줄줄 읽어가게 된다.
이번 2편에서 말하고자 하는 테마는 조직 문화이다.
1차적으로 미생에서 나오는 오 과장과 같은 캐릭터는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다. 무슨 말이냐 하면 난 개인적으로 오 과장과 같은 선임과 같은 팀에서 업무를 해본 적이 없지만, 그렇다고 대한민국 7대 종합상사 외에도 중견 무역상사가 수없이 많은데 어찌 오 과장과 같은 캐릭터 한 명이 없을 수 있겠는가. 요지는 그리 많지는 않을 것이라는 예측은 가능하다는 것이다.
난 종합상사에 신입사원으로 입사하여 4년 동안 3명의 팀장과 함께 근무를 했다. 모두 스타일이 명확하게 다른 분들이었기 때문에 누가 좋다 나쁘다를 따지기에는 다소 어려운 부분이 있지만, 어찌 됐든 간에 중요한 건 팀장에게 내가 업무적 및 업무 외적으로 얼마나 많은 것들을 빼먹느냐이다. 빼먹다라는 표현이 다소 거칠다고 생각할 순 있지만 배움과 빼먹음은 다소 다른 뉘앙스이지 않은가. 배움은 업무적이든 업무 외적이든 간에 누군가에게서 긍정적인 것 또는 하지 말아야 할 것을 알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빼먹음은 종합상사라는 업계에서 리얼 상사맨으로서의 어떤 노하우나 그간 축적된 경험지식 그리고 회사 내에서 몇몇 사람들만 알고 있는 정보, 장기 클레임이나 장기화된 소송 등의 숨겨진 배경들을 나도 얻게 됨을 의미한다. 결국 뻔한 말로 들릴 수 있을 지는 몰라도 상사맨으로 살아남기 위한 '고급 정보'를 알고자 한다면 팀원보다는 팀장과의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더 나은 선택지라는 것이다.
또한, 종합상사의 조직 문화는 다양한 단어로 표현할 수 있겠지만 내가 생각하는 단어는 '역동'이다. 역동성이 떨어지는 종합상사는 침체될 것이고 구성원들의 긴밀한 협력관계 구축 자체가 불가능할 것이고 영업이 주(主)가 될 수 밖에 없는 상사의 매출과 영업이익은 자연적으로 하락세를 면치 못할 것이다. 즉, 영업 부서의 구성원이라면 영업만 해서는 안 된다. 결국 영업을 위해서는 자금 집행이 필요하고, 접대비가 필요하고 계약서가 필요하고 리스크 관리가 필요하고 또 가장 중요한 '결재'가 필요하다.
영업의 당위성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어려운 단어로 구구절절 설명할 필요없이 그냥 영업의 당위성은 '돈'이다. 돈이 되는데 무슨 이유가 필요한가? 난 관리 부서에서만 일을 했지만 내가 만약 영업 부서의 사람이라면 이 거래를 해서 돈이 나오는데 지금 리스크고 나발이고 뭐가 중요해? 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대기업군에 속하는 종합상사는 동네 오퍼상같은 구멍가게가 아니기 때문에 회사의 엄격한 전결규정이 있고 업무 프로세스가 시스템화되어 있다.
그렇다면 영업 직원은 관리 부서(회계, 자금, 금융, 기획, 법무 등등)의 담당자와 업무적, 업무 외적으로 긴밀한 협력 관계를 형성하는 것이 첫 번째 주요 포인트가 아닐까 싶다. 시스템이고 뭐고 결국 시스템을 운영하고 클릭하는 건 사람의 손가락이다. 돈을 버는 것도 사람이고 돈을 벌게 운영하는 것도 사람의 손가락과 클릭질인데 어찌 사람을 등한시하고 영업을 한다고 할 것인가. 내 말은 영업 직원이 영업을 한답시고 질펀하게 관리직과 부적절한 협력 관계를 맺으라는 것은 아니다. 이 글을 읽는 어떤 종합상사 영업 직원은 "영업도 안 해 본 놈이 뭘 안다고 이딴 말을 해?"라고 욕설과 함께 화면 오른쪽 상단 x 버튼을 누를 수도 있다. 그러나, 이 거래가 왜 진행되야 하는지 그리고 왜 진행되고 있는지, 어떻게 이런 거래가 진행되어 왔는지, 아니 더 깊게 들어간 백그라운드 등등을 허심탄회하게 털어줘야 이 고지식한 관리직 사람들을 움직일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그 팽팽한 긴장선에서 요리저리 설득도 하고 논쟁도 하는 과정을 통해 결국 내 이득만 챙겨가는 게 훌륭한 영업사원이라고 생각한다.
1편에서도 잠시 말했듯이 종합상사는 다툼이 많다(하극상을 시전했던 패기의 신입사원 경험담은 후술하겠다). 그래서 종합상사를 다니다가 다른 직장으로 이직을 한 사람들은 종종 다른 곳의 조직 문화에 적응하는데 오히려 애를 먹기도 한다. 왜? 어떻게? 뭘 위해? 라는 것보다는 이전에도 지속적으로 해왔던 거라서 하는 식의 프로세스로 인해 종종 업무를 해야 하는 당위성에 회의감이 들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종합상사는 사원 또는 대리의 직급을 가진 분들에게 매우 중요할 수 있는, 열정적인 습성 아닌 습성을 자연스럽게 얻게 되는 분위기가 조성되어 있다는 것이다(모든 부서가 그런 건 아니다). 결국 그 안에서 내가 얻고자 한다면 그 이상을 얻을 것이고, 수동적인 사람이 된다면 정장 입고 의자에 앉아만 있는 존재가 될 수도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또 하나, 내가 만약 관리 부서 사람이라면 될 수 없는 거래 그리고 되어서는 안 되는 거래 혹은 해결점이 필요한 거래에 대해 그저 '안 돼요, 이건 전결규정에 위배됩니다.'라는 말만 되풀이하는 기계가 되어야 할 것인가? 오히려 관리 부서에 속한 신입 미생들에게는 이러한 상황에서 나의 업무 능력을 키울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며 나의 존재감을 강하게 어필할 수 있는 최고의 찬스이다. '노맨'도 '예스맨'이 아닌 '피곤한 사람, 그러나 결국 날 도와주는 놈'이라는 이미지를 쌓아야 한다는 것이다. 최악은 물론 예스맨이지만 노맨은 어느 시점에서 한계가 올 수 밖에 없다. 영업 부서의 사람과 업무적으로는 정해진 룰을 가지고 대화를 해야 하나, 그 안에서 왜? 어떻게? 뭘 위해? 라는 테마로 접근하여 그 거래를 정확히 알아야 한다. 거래구조뿐만 아니라 그 안에 녹아져 있는 백그라운드와 숨겨진 스토리들을 알아야 적절한 스탠스를 가지고 움직일 수 있는 것이며 나의 팀장과 부문장들도 유기적으로 클릭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거 안 되는 거래에요.' 라고 품의서 딸랑 들고 오는 팀원과 '이거 이런 거래인데 이래이래하고 저래저래하고 또 사실은 속닥속닥...'이라는 리얼 스토리를 들고 자신의 생각이 뭔지 그래서 난 이렇게 생각하는데 책임자인 넌 어떻게 할거냐라는 화두를 던지는 팀원. 당신이라면 누구와 일하고 싶고 누구와 오래하고 싶은가?
종합상사의 직책자들은 비교적, 상대적으로 다른 국내 대기업 제조업 유형의 직책자들보다 오픈형인 분들이 많다(비교적, 상대적으로 많다는 것뿐이다). 즉, 사고의 폭이 넓으며 많은 해외 출장 경험으로 견문도 넓고 상대적으로 진짜 바보같은 꼰대짓은 잘 하지 않는다. 내 일이 있으면 내가 하고 네 일이 있으면 네가 하는 거지 내가 부장인데 내가 차과장인데 너도 앉아있어라는 식의 꼰대문화에 쩔은 이들은 상대적으로 적다. 젊은 생각의 조직문화가 종합상사의 특징이며 예스맨보다는 '대화가 가능한 사람'이 조직에서 성공(성공의 척도는 개인마다 다르지만 어찌 됐든 빠른 승진 정도로 보겠다)할 수 있다. 직책자 또는 그 이상의 자와 대화가 가능하다는 것은 매우 쉽지 않은 일이다.
사고의 범위를 항상 열어두는 것. 종합상사의 조직문화와 가장 근접한 것이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