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에 대하여
1954년 프랑스의 한 영화 잡지에 실린 영화 평론가 프랑수아 트뤼포의 에세이는 영화판에 혁신을 불러일으킨다. 이전의 영화는 문학 작품을 원작으로 하여 재미와 감동을 주는 것이 주목적이었으나 영화는 단순히 재미가 목적이어서는 안 되며 그 자체가 예술작품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트뤼포의 주장이었다. 그의 주장에 따라 여러 비평가들이 함께 행동하기 시작하는데 영화사에서는 이러한 흐름을 누벨바그라 칭한다. 영화사는 누벨바그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는 말이 있다. 트뤼포의 주장 이후 프랑스에서는 할리우드로 대표되는 기존 촬영 방식(모든 것을 계산한 뒤 세트장에서 촬영하는 방식)에 대한 저항, 작가주의라는 개념이 새로이 정립되며 감독의 비중이 상승하는 등 형식과 내용적인 측면에서 괄목할만한 새로운 흐름을 탄생시킨다. 1950년대 이후 누벨바그 시대의 영화를 보고 자란 영화감독들이 1980년대에 들어 영상미와 시각효과를 더욱 중시하여 영화를 제작하는데 이들을 누벨 이마주 세대라 칭한다. 영화 "베티 블루"는 누벨 이마주 세대의 대표적인 감독 중 한 명인 장 자끄 베넥스의 작품이다.
영화가 처음 국내에 개봉했을 때 그 내용과 화면 속 이미지 때문에 화제성이 대단히 높았다고 하는데 1988년도에 개봉한 영화여서 그런지 35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에서야 처음 이 영화를 접한 나로서는 색감이나 구도, 장면전환 같은 시각적인 측면에 있어서 충격이 그리 크게 느껴지진 않았다. 다만 세월이 흐른 현재에 영화를 관람하더라도 선정성과 인물이 감정을 발산하는 방식, 캐릭터의 성격처럼 영화의 내용적인 측면에서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드는 영화라는 느낌을 받는다.
현실에 없을 것만 같은 사랑 이야기, 미쳤거나 미쳐가는 사람들의 사랑 이야기, 결핍이 있는 인간끼리의 틈새 없는 끌어안음. 영화를 본 뒤 몇 후기를 읽어보니 이런 식의 감상평이 많았다. 이런 평가는 경멸이나 혐오를 목적으로 하고 있지 않다. 그보다는 오히려 현실에서 찾아보기 힘들 만큼 이상적이고 낭만적인 그들의 사랑에 찬사를 보내고 있다. 자본, 직업, 집, 자동차, 원가족, 친구, 사회적 시선, 현실이라고 불리며 사랑을 방해하는 모든 요소가 영화에서는 마치 의도적으로 제거되기라도 한 듯 등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실제 현실에 존재하는 현실적인 장벽이라 여겨지는 것들이 영화에서는 때때로 조력자처럼 등장하기도 한다. 이것이 프랑스 영화 특유의 천진스럽게 발랄한 느낌 때문에 느껴지는 것인지 장 자끄 베넥스 감독의 특별한 시선에서 분출된 의도적인 따듯함인지는 모르겠으나 현실에 찌들어 경계심이 발동되려는 장면에서도 영화의 등장인물들은 결코 뒤통수를 치거나 훈계 따위를 하지 않는다.
영화는 낭만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사랑에 관한 낭만, 진정한 사랑은 무엇인가. 우리 모두가 이미 알고 있듯 그 어떤 껍데기의 꾸밈이 없어도 나를 나로서 온전히 받아들여주는 사람, 그리고 나 역시 그렇게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 두 사람 안에 필연적이며 역동적으로 휘몰아치는 격정의 감정을 그 어떤 다른 이유 때문에 포기하지 않고 곧바로 마주하며 정면으로 들이받아 버릴 때, 두 사람은 서로가 마치 원래 한 몸과 하나의 정신이었던 것처럼 무아의 지경에 이른다. 교육을 통해 지성화된 인간, 자본주의 체제에 종속된 인간은 결코 도달할 수 없을 것만 같은 낭만적인 사랑, 사랑에 대한 낭만. 그것이 바로 영화 베티 블루가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조르그에게 베티는 뮤즈였을까. 소설가가 꿈이었지만 현실의 장벽에 부딪혀 배관공으로 하루를 견뎌내고 있던 조르그에게, 베티는 다소 감당하기 힘들었을지언정 분명 새로운 길을 열어준 인도자임에는 틀림이 없다. 상자에 처박아둔 그의 원고를 꺼내 날을 새 가며 읽고, 익숙지 않은 타자기로 한 글자 한 글자 이 주가 넘도록 타이핑을 해 출판사에 투고하는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며 조르그는 감사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으리라. 태생적으로 격렬하고 즉각적이며 통제불가능한 인격을 타고난 베티를 바라보며 불편함을 느끼지 않을 현대인은 많지 않겠지만 영화가 도덕책이 되는 순간 예술에서 한발 멀어지고 말 것은 자명한 일. 현실의 얄궂은 모서리들을 곱게 제련한 듯한 한 편의 영화, 결코 아름답진 않지만 곱씹을수록 아름답게 느껴지는 그런 영화였다는 생각을 한다.
사실 3시간이라는 러닝타임이 꽤나 길기도 했고 두 주인공의 이해하기 힘든 행동을 바라보며 이해력의 한계를 경험하기도 했지만 익숙지 않은 형태의 사랑에 대한 영화는 언제나 묘한 여운을 남긴다. 완벽히 알지 못해도 인생을 살아가는데 무리가 없듯 우리는 늘 일정량의 이해와 일정량의 어림짐작으로 삶을 대하고 있으니 여운을 남겨 두고두고 곱씹을 수 있는 영화를 한편 봤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기쁜 시간이었음이 분명하다. 영화 전반의 내용과 큰 관련은 없지만 에디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비보를 받고 누드화가 그려진 검정 넥타이를 바라보며 에디에게 "검은색 넥타이가 이것밖에 없지?"라고 묻는 장면과, 식료품점을 운영하는 친구 밥이 화장실에 들어가 문을 걸어 잠근 아들을 꺼내기 위해 사다리를 창문에 갖다 대고 두 칸 오르자 어지럽다고 말하는 장면, 그렇게 구해낸 아들을 혼내겠다며 벽에 걸어두는 장면이 기억에 남는다. 극한의 로맨스에도 유머가 자리하고 있다는 점이 인상 깊었던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