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로 살펴보는 정신과학
정신과의사로서 내담자들과 상담을 하며, 도달하는 길의 막다른 골목엔 대부분 “나라는 사람이 도대체 뭘까요?”라는 질문이 기다리고 있다. 진료실 안에서 던져진 이 질문은 내담자 개인의 삶을 넘어, 인간 존재 자체에 대한 질문으로 확장된다.
이 질문을 처음 진지하게 붙잡았던 것은 중학생 때였다. ‘사람은 어떻게 물건이 그 위치에 있는가를 인지하는가’에 대한 글을 보던 중이었다. 그때 내 머릿속에 떠오른 이미지는 영화 맨 인 블랙 속 장면이었다. 인간처럼 생긴 인조인간 안에 조그만 외계인이 탑승하여 기계를 조종하고 있는 모습.
육체라는 기계 위에 타고 있는 ‘나’라는 영혼. 지금 돌이켜보면 이는 철학에서 말하는 데카르트의 극장 이미지에 가까웠다. (최근 영화 인사이드아웃에서 여러 감정이들이 화면을 통해 외부를 보고 반응하고 움직이는 바로 그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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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편 ghost in the shell : 에고이론과 번들이론의 충돌
공각기동대 1편은 바로 이 문제, 즉 에고이론(ego theory)과 번들이론(bundle theory)의 충돌을 정면으로 다룬다.
• 에고이론은 ‘나’라는 지속적이고 독립된 주체가 있다고 본다.
• 반대로 번들이론은 ‘나’라는 것은 감각·기억·경험이 순간순간 모여 만들어낸 집합에 불과하며, 고정된 실체는 없다고 말한다.
정신과학, 뇌과학을 배우며 내가 깨달은 바는, 우리가 생각하였던 ‘나’라는 일관된 무언가는 없고 다양한 요인들이 전기신호와 단백질 합성체로 구성되어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비일관된 상황만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즉, 현실은 번들이론에 가깝다는 사실이다.
환자를 진료하다 보면, 외상 후 기억이 단절되거나, 해리 현상 또는 치매로 인한 인격변화를 겪는 사람들을 자주 본다. 그러한 경험은 “나는 하나로 이어진 존재”라는 믿음을 쉽게 무너뜨린다. 실제로는 시시각각 다른 ‘나’들이 연속적으로 이어질 뿐이라는 느낌을 강하게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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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 인간됨의 근거
공각기동대의 감독 오시이 마모루는 인터뷰에서 “인간을 인간이라 할 수 있는 요소는 기억이다”라고 말했다.
뇌과학적으로도 기억은 인간 정체성의 핵심을 이룬다. 기억은 단백질 소포체와 신경망의 시냅스 강화 과정을 통해 저장된다. 한 가지 기억을 떠올릴 때도 뇌의 여러 영역이 동시에 활성화되며, 조각난 정보들을 새로 재구성한다.
흥미로운 점은 이 기억이 언제나 재구성(reconstruction) 된다는 것이다. 즉, 내가 떠올린 기억은 과거의 실제 사건이 아니라, 변형되고 편집된 ‘정신적 현실’이다. 임상에서도 트라우마 환자가 전혀 사실과 다르게 기억을 구성하거나, 우울증 환자가 과거의 경험을 지나치게 부정적으로 편집하는 경우를 자주 본다.
결국 우리가 믿는 ‘인간을 인간이라 할 수 있는 중요한 요소’인 기억이란 것도 신경망이 짜낸 허상 같은 내러티브다. 하지만 그 허상조차 인간됨의 본질로 작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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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편 innocence : 인간의 불행
공각기동대 2편 이노센스는 한층 더 도발적인 문제를 제기한다. 기계와 동물은 현재에 충실하다. 반면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 것들을 끊임없이 추구한다. 이 때문에 인간은 태생적으로 불행할 수밖에 없는 존재로 그려진다.
여기까지만 해도 암울한데, AI와 가상현실 문제가 도입되며, 안 그래도 현실에 집중할 수 없는 인간이 이제는 현실이 진짜인지 가짜인지도 구별할 없는 지경까지 가게 되며 염세적이고, 아포칼립스적 세계관을 감독은 그려낸다.
에고이론에 갇혀 육체와 정신. 나와 너 등의 이원론적 사고에 머물러선 안되나, 일원론적 사고/물아일체의 영역으로 넘어가게 되면 우리라는 존재 자체가 희미해지고 나라는 존재가 사라지는 근원적 공포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는 진퇴양난의 상황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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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무 이후의 질문
결국 답은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멈추지 않고 계속 묻는 것이다.
부처가 무아를 설했을 때 사람들은 “내가 사라지는 공포”에 휩싸였다고 한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그 공포를 이겨내기 위해 행하였던 많은 것들이 인간을 지구의 지배자로 만들어 놓았다.
공각기동대의 메시지가 우리에게 남기는 힘은 바로 여기 있다.
답을 주지 않으면서도, 질문을 끊임없이 반복하게 만든다는 점. 그리고 그 질문을 통해, 비록 허상일지라도 나라는 존재를 살아내게 만든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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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가와 명상: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실천적 탐구
이 질문은 결국 나의 일상적 실천과도 맞닿는다. 나는 의사이자 요가 지도자로서, 사람들에게 명상을 권하기도 한다. 많은 사람들이 “내 안의 본질을 알고 싶다”라는 갈망을 품고 요가와 명상을 찾는다.
하지만 곱씹어보면 이 역시 이원론적 전제에 갇혀 있다. 육체와 정신을 분리하고, 정신적 성장을 더 고귀한 것으로 여기는 사고 말이다. 실제로 임상에서는 지나치게 정신적 성장에 집착한 나머지, 오히려 자신의 신체적 한계를 무시하거나 부정하는 경우도 본다.
우리는 두 가지 극단으로 빠지기 쉽다.
• 형이하학적 극단: 우리는 유전자를 전달하는 생체기계일 뿐이며, 모든 것은 유전자 전달 시스템의 안정적 작동을 돕는 도구에 그침. 생존과 번식만이 우리가 추구해야 될 것.
• 형이상학적 극단: 모든 것은 허무하고 실체가 없는 것. 우리가 하는 모든 노력은 부질없는 것. 세상과 나를 온전히 이해하려는 정신적 탐험만이 추구해야 될 유일한 가치.
나는 개인적으로 이 두 극단 사이를 오가며 살아가는 것이 인간이라고 생각한다. 내담자들이 불안 속에서도 질문을 던지며 조금씩 바뀌어 가는 것처럼, 나 또한 요가 매트 위에서 끊임없이 묻는다. “나는 누구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