ㅡ 비대해진 자의식과, 너무 일찍 접어버린 허무주의
진료실에서 한 20대 환자가 이런 이야기를 꺼냈다.
면접을 보러 갔는데
40대로 보이는 사장이 갑자기 이렇게 물었다고 한다.
“나 몇 살로 보여요?”
그 질문을 듣는 순간,
이 면접은 이미 면접이 아니었다.
그 이후의 이야기는 더 황당했다.
취직을 했는데, 사장은 틈만 나면 자기 이야기를 했다.
차 이야기 (내가 차가 3대나 있어~)
주식 이야기 (올해 내가 주식으로 1억이나 벌었는데~)
대 SNS 시대에 자랑이라 부르기엔 조금 애매한 것들이었지만
그 사람에게는 꼭 확인받아야 할 정체성의 증거처럼 보였다.
사장은 평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나는 열려 있는 사람이야.
불만 있으면 언제든지 편하게 말해.”
하지만 어느 날,
점심을 같이 먹지 않았다는 이유로 불려 가 이런 말을 들었다.
“네가 뭐를 잘못했는지 한 번 스스로 말해봐.”
“너. 내가 만만하게 보이니?”
그 이야기를 듣는 동안
나는 묘한 기시감을 느꼈다.
‘영포티’라는 말이 인터넷 밈으로만 존재하는 게 아니라
현실에서는 훨씬 더 날것의 형태로 살아 움직이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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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포티를 떠올리면
우리는 흔히 유행어, 패션, 외모 집착 같은 이미지를 먼저 떠올린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거기에 있지 않다.
영포티의 핵심은
젊어 보이려는 욕망이 아니라
자기 나이를 감당하지 못하는 불안이다.
그래서 이들은 자주 묻는다.
• “나 아직 괜찮지?”
• “내가 이 정도는 되는 사람이지?”
• “난 아직 현역이야, 그렇지?”
이 질문들은 상대를 향한 질문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자기 자신에게 던지는 확인 요청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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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로운 점은
이런 사람일수록 ‘열려 있음’을 강조한다는 것이다.
“편하게 말해도 된다”
“나는 수평적인 사람이다”
하지만 실제 행동은 그 반대다.
• 사소한 거절에 과민하게 반응하고
• 관계 속 위계를 끊임없이 재확인하며
• 상대가 얼마나 자신을 의식하는지를 시험한다
이건 모순이 아니다.
불안한 자의식이 선택하는 전형적인 방어 방식이다.
자기 위치가 흔들릴수록
사람은 말로 그것을 단단히 고정하려 한다.
그래서 별것 아닌 성취를 과장하고,
사소한 불복종을 ‘태도 문제’로 규정하며,
타인의 긴장 위에서 자신의 안정감을 유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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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지점에서
나는 유튜브 철학 채널이나 커뮤니티에서 자주 보던
‘도태남’ 담론이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도태남은 영포티를 바라보며 말한다.
“저렇게 사느니 차라리 포기하겠다.”
“저건 추한 발악이다.”
“저 나이에 저 정도면 실패다.”
겉으로 보면
도태남은 영포티와 정반대 위치에 서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조금만 들여다보면
둘은 놀랍도록 닮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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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태남의 세계관에는 이미 결론이 내려져 있다.
• 노력해도 안 된다
• 사회구조가 문제다
• 연애는 계급이고, 인생은 조작됐다
이 말들에는 일정 부분 현실 인식도 섞여 있다.
하지만 문제는 이 인식이 너무 빠르게 ‘종결 선언’으로 이어진다는 점이다.
아직 충분히 시도해보지도 않았지만
실패했다고 말하면
앞으로 실패할 위험은 줄어든다.
도태남의 허무주의는
냉철함이 아니라 자기 존중을 지키기 위한 마취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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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포티와 도태남 사이에는
커다란 간극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둘이 피하는 지점은 같다.
중간 지대다.
• 영포티에게 중간은 “이제 내려와야 한다”는 인정이다.
• 도태남에게 중간은 “그래도 한 번은 해봐야 한다”는 책임이다.
중간은 가장 현실적이지만 가장 감정 노동이 많은 자리다.
그래서 사람들은
과대망상이나 허무주의 같은 극단적인 서사에 머무르려 한다.
그곳이 덜 아프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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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쓰는 나 역시 완전히 자유롭지 않다
이 글을 쓰는 나 역시
영포티 세대에 발을 걸친 사람이다.
그래서 이 글은
조롱이 아니라 자기 경계에 가깝다.
비대해진 자의식은
어느 순간 우리 모두에게 찾아올 수 있고,
허무주의 역시
지금의 20대 만의 전유물은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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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포티는
젊음을 붙들다 현실을 잃고,
도태남은
현실을 포기하다 가능성을 잃는다.
중간은 비겁한 선택이 아니다.
가장 많은 용기를 요구하는 자리다.
그래서 오늘도 그 자리는 비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