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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이 Nov 07. 2022

내가 납작해진다고 네가 튀어나오진 않는다

철지난 이야기의 재생산을 막기 위하여

까놓고 말해 <분노의 추격자>는 새로울 것이 없는 서사에, 이제는 티켓파워를 많이 잃은 주연배우 제라드 버틀러를 얹어 가소로운 액션을 담아낸 진부하기 짝이 없는 영화다. 원제(<Last Seen Alive>)는 둘째치고라도 번역된 제목부터 80년대 분위기를 풍기고 있는데 가장 큰 문제는 여성 캐릭터에 있어 발전이 전혀 없다는 점이다. 영화에 등장하는 몇 안되는 여성은 대부분 아내로 그려지고 남성의 도움 없이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며 감정적으로도 무기력한 상태다. 평면적이고 수동적인 여성 캐릭터와 더불어 영화의 가장 큰 문제는 남성 캐릭터들조차 새로울 것이 없다는 것이다. 좋은 평가를 받아온 남성 중심의 서사는 입체적인 남성 캐릭터를 보완하는 평면적인 여성 캐릭터를 발판삼곤 했다. 하지만 <분노의 추격자>가 얄팍한 긍정 평가조차 받을 수 없는 이유는 여성 캐릭터를 희생시키고도 메인 캐릭터 전부가 개성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영화는 경찰로 보이는 한 남성과 범죄자로 보이는 다른 남성의 대화로 시작된다. 경찰은 범죄자의 목을 조르고 있고, 대낮에 겁도 없이 여자를 납치했다고 상대방에게 겁을 주고 폭력을 휘두른다. 언뜻 보아서는 선악을 가르기 힘든 두 남성 간의 알력 싸움처럼 보이지만 영화가 진행될수록 굳이 사용할 필요가 없었던 플래시 포워드 장면임이 드러난다. 무엇보다도 이 첫 장면 때문에 관객은 패터슨 경감(러셀 혼스비 분)에 대한 신뢰도가 하락한 상태에서 관람을 시작하는데, 패터슨 경감이 극에서 담당하는 역할이 거의 없음을 상기해보면 관객에게 강제된 혼란은 무쓸모에 가깝다. 패터슨 경감에게 폭력을 당하는 너클스(이선 엠브리 분) 또한 첫 장면만을 별도로 보았을 때 리사 납치에 있어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잔가지에 불과하다. 즉 강렬한 인상을 줄 수도 있었던 첫 플래시 포워드가 시간낭비가 된 가장 큰 이유는 조연인 패터슨 경감과 너클스마저 진부한 캐릭터이기 때문이다.



혼란스러운 플래시 포워드 장면이 끝나면 윌(제라드 버틀러 분)과 리사 부부가 차 안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다. 관객은 어렵지 않게 리사가 납치될 것을 짐작할 수 있는데 이는 히치콕이 말했던 서스펜스 효과와는 정반대로 기능한다. 플래시 포워드 장면을 제외하고라도 서스펜스가 증발한 이유는 이 단순한 장면에서조차 운전대를 잡고 있는 것이 윌이고 아내인 리사는 조수석에 앉아 우울한 표정을 짓고 있기 때문이다. 부부의 대화가 진행되며 부부의 문제점이 드러나지만 납치 사건과는 무관하다. 즉 안됐지만 부부가 차 안에서 나누는 대화 장면은 여전히 대부분 서사를 위해 기능하지 못한다. 오히려 플래시 포워드 장면에서 이어지는 긴장감을 떨어트리고 관객을 혼란스럽게 만들 뿐이며 오로지 종종 인서트되는 플래시백 장면을 위해서만 기능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 장면의 존재 이유는 서사의 중심인 윌과 윌의 보조 캐릭터로서만 활용되는 리사를 소개하는 것이 전부다.


단순히 리사가 무기력한 캐릭터이고 윌이 그런 리사를 구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캐릭터라는, 다분히 구시대적인 성 이분법적 역할 분배는 차치하고라도 여성인 리사에게 불화의 책임마저 떠넘기는 것은 그야말로 무책임한 서사다. 리사는 우울했지만 그 원인이 제시되는 대신 우울감으로 인한 외도라는 결과만이 제시되고 아마도 원인 제공자였을 윌은 순수한 구원자로서 자리매김한다. 윌은 부동산 중개업자로서 가난하지도 않고, 플래시백 장면으로 미루어 리사에게 소홀한 남편도 아니다. 심지어 리사를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리사의 외도조차 외면하는데다 우울한 리사를 처가에 데려다주기까지 한다. 인물 설정을 성별에만 기대어 한 것도 통탄스럽지만 한쪽 성별에 갈등의 원인을 몰빵전가하는 것은 그 이상의 문제가 된다. 단순히 여성을 무기력하면서 모든 문제의 원인 제공자로 묘사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런 리사를 굳이 구하려는 윌의 서사가 주저앉기 때문이다. 아내이지만 자신에게 만족하지 못하고, 외도까지 한 여성을 목숨을 걸고 구하려는 윌의 캐릭터 또한 설득력을 잃고 무너진다.



직업조차 묘사되지 않고, 아니 직업의 유무조차 묘사되지 않고 완벽해 보이는 남편 뒤로 외도하는 리사를 발판삼는 윌이 리사를 희생해서 얻는 것은 무엇일까. 리사가 스크린에서 사라지고 카메라는 윌에게만 포커스를 맞춘다. 액션이 중점이 되었어야 할 이후 시퀀스들은 <테이큰>에 한참 미치지 못하는데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브라이언 밀스(리암 니슨 분)는 전직 요원이었지만 윌은 부동산 중개업자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가진 것이라곤 건강한 신체뿐인 브라이언이 사력을 다해 가족을 구원하고 구시대적 가부장으로 회귀하는 것이 <테이큰>의 셀링 포인트이자 한계였다면 <분노의 추격자>는 양쪽 어딘가에도 미치지 못한다. 윌은 납치된 아내를 찾을 수 있는 전문가가 아니며 가진 것이라곤 분노뿐이다. 윌의 액션은 거칠고 투박하며 많은 것을 가지고도 처가로부터 무시당한다. 브라이언의 전 아내 레노어(팜케 얀센 분)는 딸 킴(매기 그레이스 분)을 제발 찾아달라고 브라이언에게 기대지만 윌의 장인과 장모는 윌조차 의심한다. 윌이 아내를 되찾아온다고 해도 가부장의 권위를 세우기는 어려워 보이며, 이는 구시대적인 사고를 가진 관객에게조차 영화가 소구할 구석이 없음을 스스로 증명해 보이는 꼴이다.


(아마도 제라드 버틀러의 팬을 제외한) 어느 관객에게도 소구점이 없어 보이는 <분노의 추격자> 혹은 이와 비슷한 영화가 계속해서 양산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여성 서사가 힘을 얻고 인기를 얻어가는 이 시대에도 낡은 가부장의 권위를 어떻게든 세우고 싶어하는 이들이 자본의 권력을 쥐고 있기 때문인 건 아닐까. 자본을 쥔 이들이 영화를 어떻게 제작할지는 그들의 자유지만, 목적을 이루기 위해 배우와 캐릭터성을 희생시키는 건 투자한 예산에 대한 무책임이다. 이제는 낡은 서사에 남성 캐릭터를 몰아넣고 어설픈 액션을 쏟아붓는다고 해서 팔리는 시대는 한참 지났기 때문이다. 납작한 남성 캐릭터를 살리기 위해 여성 캐릭터들을 더 납작하게 누른다고 해서 남성 캐릭터들이 살아 숨쉬는 건 아니다.


 


*이미지는 씨네랩 제공 및 네이버영화입니다.

*본 글은 씨네랩 시사회 초청으로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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