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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이 Aug 23. 2021

인공지능이 디스토피아를 불러오지 않으려면

중요한 건 사람이다

필립 K 딕의 원작소설을 기반으로 한, 미래 배경의 sf영화가 유행하던 시기가 있었다. <아이, 로봇>이나 <마이너리티 리포트>가 대표적이다. 특히 <아이, 로봇>에 등장하는 로봇들은 당시에는 로봇이라는 이름으로 통용되었지만 지금으로 치면 인공지능이나 마찬가지다. 인간의 편의를 위해 인공적으로 만들어낸 이 미래의 존재들은 많은 sf영화에서 디스토피아의 기반이 되곤 했다. <스페이스 오디세이>까지 가지 않더라도 <터미네이터> 시리즈를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인간보다 월등한 지식을 쌓은 존재에 대한 두려움은 이를 창조해낸 것이 결국 인간이라는 것을 언제나 잊게 만든다. 어쩌면 이미 지구에 수많은 해악을 끼쳐온 인간들은 마치 업보를 받듯 언젠가 창조물로 인해 멸망하게 될 거라고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닐까. 와중에 밝고 유쾌한 분위기의 <프리 가이>는 색다른 관점을 제시한다. 결국 AI는 창조자의 영향권 하에 있으며 창조자의 의도가 반영된 행동을 할 수밖에 없다. 영화 <A.I.>에서 아들 대신으로 만들어진 인공지능 데이빗(할리 조엘 오스먼트 분)에게는 비극적인 창작 의도로 변색되긴 했지만 <프리 가이>의 가이(라이언 레이놀즈 분)는 자신이 인공지능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며 영화의 분위기를 유쾌하게 반전시킨다.


물론 데이빗과 가이에게는 커다란 차이점이 있다. 데이빗은 존재 자체로서 창조자의 의도에 부합했다. 부모의 사랑을 갈구하는 데이빗은 갈구 자체가 생산 목적이었다. 어느 정도 성장하면 부모의 품을 떠나 독립하고 새로운 가족을 형성하기도 하는 인간과는 달리 데이빗은 성장하지 않았고 성장 후의 삶을 학습하지도 못했다. 아마도 오래 전에 만들어진 영화인 만큼 새로운 데이터를 받아들이고 학습하는 AI라는 개념이 자리잡기 전이라 만들어질 수 있었던 애처로운 캐릭터가 아닐까. 반면 가이는 애초에 NPC(None Player Character), 배경처럼 만들어진 캐릭터다. 가이가 만들어진 목적이래봐야 같은 자리에서 같은 행동과 대사를 반복하는 것뿐이다. 하지만 가이는 끊임없이 학습하는 동시에 존재하지 않는 여인을 짝사랑하도록 만들어진 캐릭터다. 개발자인 키스(조 키어리 분)가 동료 개발자인 밀리(조디 코머 분)를 기반으로 한, 존재하지 않는 여인을 짝사랑하는 가이는 짝사랑이 목적(?)으로 개발된 캐릭터이기에 밀리가 등장하지 않는 이상 학습하지 못한다. 프리 시티가 변하기 시작하는 건 밀리가 게임 캐릭터인 몰로토프 걸로 등장하면서부터다. 학습 의지가 없던 가이는 몰로토프 걸을 만나면서 학습하고 변화하기 시작한다.



가이 캐릭터가 흥미로운 점은 학습하면서도 본연의 순정을 잃지 않는다는 점이다. 자신이 NPC라는 것을 알고도 충격에 빠지지만 폭력을 휘두르지 않고, 좋은 사람으로 남고 싶어하는 가이는 개발자인 키스를 닮았다. AI가 세상을 지배하는 디스토피아물에서 높은 확률로 AI의 폭력이 인간을 지배하거나 착취했던 것을 생각해보면 가이는 인공지능을 다룬 영화 중에서는 희한한 축에 속한다. 키스는 가이를 개발할 때 밀리에 대한 자신의 마음을 담아냈고 그 결과 외모빼고 자신을 닮은 순정남을 탄생시켰다. 그렇기에 가이는 몰로토프걸을 보호하는 것 이외의 행동을 거의 하지 않는다. 가이는 놀라운 속도로 학습하고 프리 시티 내부에 변화를 일으키지만 그 목적은 단 하나 몰로토프걸을 돕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가이의 성장을 지켜보면서 응원하는 이유는 가이가 결코 폭력적인 방향으로 성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가이의 변화는 늘 주문하던 커피를 카푸치노로 바꾸는 것에서부터 다양한 게임 아이템을 활용하는 데까지 나아간다. 커피를 바꾸면서도 점원 NPC가 카푸치노라는 말을 듣고 당황하자 농담이라며 원래 주문하던 커피를 다시 주문하는 가이는 다른 캐릭터들에 대한 배려심마저 보여준다. 그런 가이이기에 NPC들은 마지막까지 가이를 믿고 따르며 가이를 응원하게 된다.


자신의 기존 게임에 대한 애정을 품고 프리 시티를 지키고자 했던 키스와 밀리는 자신들의 고운 성정을 NPC에 그대로 담아냈고 NPC들은 가이와 함께 프리 시티를 지키고자 한다. 이와 결을 달리하는 것은 가이를 막기 위해 최후에 투입된 NPC 듀드다. 하지만 듀드가 가이와 같이 라이언 레이놀즈의 형상을 하고 있는 것은 결국 듀드조차 키스와 밀리의 코드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앙투안(타이카 와이티티 분)이 간과한 것은 개발자의 코드에 그 개발자의 진심이 담기게 마련이며 이를 기반으로 한 코드는 결국 개발자를 따르게 되어 있다는 점이다. 키스와 밀리가 개발한 빌드를 향해 달려가는 가이를 보고서야 이를 깨달은 앙투안은 최후의 수단을 택한다. 소프트웨어를 소프트웨어로 제어할 수 없다면 남은 방법은 소프트웨어가 담긴 하드웨어를 공격하는 것이다. 라이언 레이놀즈가 등장하는 영화답게 앙투안은 하드웨어 공격도 온전히 성공하지 못하지만 이는 결국 물리적인 하드웨어 공격이 진심이라는 소프트웨어를 당할 수 없음을 암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프리 시티를 제거하려는 앙투안에 맞서는 이들이 앙투안을 제외한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심지어 경비원 포함)이라는 점을 볼 때 한두명의 뛰어나지만 악한 개발자조차 다수의 선량한 시민을 당할 수 없기를 바라는 감독의 의도를 볼 수 있다.



그간 인공지능을 다룬 sf영화들은 인공지능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것처럼 보였다. <엑스 마키나>에 등장했던 에이바(알리시아 비칸데르 분)에게 입력된 목적은 모두를 파멸로 이끄는 결과를 낳는다. 다만 감독과 관객이 간과한 것은 에이바를 만든 개발자 네이든(오스카 아이삭 분)이 여타 인공지능을 대하는 태도에서 알 수 있듯이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을 가리지 않도록 했다는 점이다. 인간은 사회화되면서 선한 목적을 위해서일지라도 수단이 항상 정당화될 수는 없다는 사실을 학습한다. 인공지능이 진정 인간을 닮았다면 입력된 목적이 무엇이든 수단을 가리지 않을 수는 없다. 가이는 몰로토프걸에 대한 짝사랑을 목적으로 탄생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작정 폭력을 휘둘러 가며 몰로토프걸을 돕지는 않는다. 가이는 마치 불가능해 보이는, 수단을 가리지 않아서라도 숨겨진 빌드까지 가는 미션을 자기 자신의 성정을 해치지 않으며 성공해낸다. 이는 다수의 행복을 위해서라면 소수를 희생시킬 수 있다는 공리주의적 행동을 일삼는 인간에 대한 경고적인 은유처럼 보이기도 한다. 결국 인공지능은 개발자의 의도를 담게 되어 있으며, 인공지능으로 인한 미래가 디스토피아라면 개발자가 의도한 혹은 암시한 미래가 디스토피아일지도 모른다.


알파고가 이세돌을 4:1로 승리한 후 많은 이들이 인공지능에 대한 의심을 품었다. 하지만 인공지능은 인간에 의해 탄생한 것이고, 인간이 어떤 의도를 가지고 개발하여 사용하는가에 따라 충분히 달라진다. 마지막까지도 자신의 한계로 인해 몰로토프걸과 함께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도 몰로토프걸에 대한 예의를 잃지 않는다. 이는 자신의 짝사랑이 이루어지지 않더라도 밀리를 여전히 같은 동료로 대하며 예의를 지키는 키스를 닮았다. <프리 가이>는 인공지능에 대한 경고가 아니라 개발자에 대한 경고일지도 모른다.



*이미지 출처는 모두 네이버영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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