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방진 놈

by scua

얼마 전 KBS 2TV <대국민 토크쇼 안녕하세요>가 화제였다. 축구에 푹 빠진 초등학생 딸에 관한 사연이었는데 이 어린 팬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나 역시도 너무나 행복해졌다. FC서울 데얀을 좋아한다는 이 팬은 스튜디오에 나와 용감하게 FC서울 응원가를 부르며 행복해했다. 한편으로는 ‘이게 뭐가 문제지? 뭐가 고민이지?’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이렇게 축구를 사랑하는 어린 팬들이 더 많아졌으면 한다. “2주에 한 번씩만 축구장에 갈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는 이 어린 팬의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열정 있는 이들이 축구장에 오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게 슬프기도 했다.


다행히 이 팬은 FC서울의 초청을 받아 데얀과 만나고 시축도 했다. 데얀이 사인이 담긴 유니폼까지 선물 받았으니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일 것이다. 행복해하는 어린 팬을 보며 덩달아 지켜보는 이들도 행복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아마도 이 어린 팬은 앞으로도 데얀은 물론 FC서울의 열정적인 팬으로 커나갈 것이다. 한 명의 어린 팬이 성장하면서도 계속 한 팀을 응원한다는 건 아름다운 일이다. 김은하 수양이 성인이 되고 시집을 가고 아이를 낳아도 이렇게 FC서울의 멋진 팬으로 계속 남아줬으면 좋겠다. 어린 팬 한 명이 텔레비전에 나와 보여준 용기에 우리는 모두들 행복해졌다.

그런데 이 모습을 보니 문득 2009년 일이 떠오른다. 당시 대구에 속했던 나는 5라운드 제주 유나이티드와의 경기에 출장했고 그 경기에서 2-1로 기분 좋은 승리를 거뒀다. 시즌 초반 성적이 좋지 않았는데 그래도 첫 승을 거두게 돼 의미가 남달랐다. 하지만 신인인 나는 경기가 끝난 뒤에도 눈치만 봤다. 경기는 이겼지만 5경기 만에 거둔 첫 승이었고 갈 길이 멀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날 경기가 끝난 뒤 나는 당황스러운 경험을 했다. “이슬기 선수, 수훈선수 인터뷰 부탁드립니다.” 경기 종료 후 그날 가장 좋은 활약을 펼친 선수를 인터뷰하는 것이었는데 내가 선정된 것이었다. 데뷔 시즌에 수훈선수 인터뷰까지 하는데 뭐가 그렇게 당황스러웠느냐고. 나는 눈칫밥 먹는 신인이었기 때문이다.

경기가 끝나면 어슬렁대지 말고 빨리빨리 선수단 버스에 타는 게 구단의 규율 아닌 규율이었다. 그리고 당시 대구는 장비를 챙기는 직원이 따로 있지도 않아 신인선수나 어린선수들은 공과 아이스박스 등의 장비를 버스로 옮겨야 했다. 신인선수가 인터뷰 때문에 늦게 라커로 돌아온다는 건 상당히 건방져 보이기에 충분했다. 인터뷰를 시작할 때부터 나는 그냥 이 인터뷰가 빨리 끝나기만을 바랐다. 나도 이렇게 승리한 경기에서 여유 있게 웃으며 멋지게 말하고 싶었지만 머릿속에는 온통 ‘빨리 라커로 돌아가 아이스박스를 들고 버스에 타야 한다’는 것뿐이었다. 그래도 선배들에게 건방져 보이는 것보다야 인터뷰 못하는 선수로 남는 편이 나았다고 생각한 것이다. 질문에 맞지 않은 형식적인 대답만 했고 인터뷰는 그렇게 끝이 났다.


인터뷰가 끝나자마자 라커 쪽으로 달려갔다. 그런데 그때 한 아이가 관중석에서 축구공을 하나 들고 나에게 소리쳤다. “이슬기 선수! 사인해 주세요!” 부모님 사이에 선 이 아이는 내가 인터뷰를 마칠 때까지 기다린 것 같았다. 그런데 내 머리에는 ‘빨리 라커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어설픈 미소와 함께 손을 흔들어주면서 미안하다는 동작을 하고 빠르게 라커로 돌아갔다. 그런데 그 어린 팬이 더 크게 소리친 것이다. “이슬기 선수!!! 사인!!!” 돌아가 사인을 해줄까라며 잠시 머뭇했지만 나를 기다리고 있는 다른 선수들에게 더 미안한 마음이 들어 그냥 이를 모른 척하고 더 빨리 라커로 뛰어 들어왔다. 그리고는 건방져 보이지 않게 아이스박스를 들고 재빨리 선수단 버스에 올랐다. 그리고는 한숨을 내쉬며 생각했다. ‘다행이다. 건방져 보이지 않아서.’


그런데 며칠 뒤 깜짝 놀랄 일이 생겼다. 꿈에 그 아이가 나온 것이다. 도깨비 같은 얼굴을 한 이 아이는 밤새 나를 괴롭혔다. “사인해 달라고 했잖아”라며 나를 계속 쫓아오던 그 아이는 “사인이 그렇게 어려워? 내가 얼마나 기다렸는데”라며 나에게 소리를 쳤다. 얼굴까지도 또렷하게 기억이 난다. 정말 무서운 꿈이었다. 사인을 외면한 당시에는 그저 잠깐 미안하고 말았는데 이렇게 꿈에서 이 아이를 또 만나니 내가 얼마나 못된 행동을 했는지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도 이 아이는 가끔 꿈에 나와 나에게 “그깟 사인이 그렇게 어려워?”라며 괴롭힌다. 경기장에 설 때마다 이 아이가 서 있던 곳을 두리번거리며 찾아보기도 했지만 내 행동에 실망했는지 다시는 이 어린 팬을 보지는 못했다.


8년이나 지난 일이지만 이 자리를 통해 진심으로 미안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지금쯤 아마 중, 고등학생쯤 됐을 그 팬에게 어떤 식으로 건 꼭 보답을 하고 싶다. 데얀과 한 꼬마 팬의 사연을 보니 내가 했던 행동이 누군가에게 얼마나 큰 상처가 됐을지 더 깊이 반성하게 됐다. 사인 한 장 하는데 걸리는 시간은 10초 남짓인데 내가 누군가에게 이 10초를 선물해 평생의 추억을 안길 수 있다는 생각을 왜 그때는 하지 못했을까. 정말 건방진 건 아이스박스를 들지 않고 선수단 버스에 늦게 타는 게 아니라 이런 팬의 작은 요구도 무시하는 일이라는 걸 왜 그때는 미처 알지 못했을까. 인터뷰를 대충하고 팬들의 외침을 무시하는 게 정말 건방진 것이었다. 지금 프로에서 뛰는 많은 선수들도 꼭 이런 생각을 한 번쯤은 해봤으면 한다. 내가 아무렇지 않게 했던 행동이 누군가에게는 평생의 나쁜 기억으로 남을 수 있다는 걸 기억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