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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를 싣고 온 발걸음

by Hable

‘그곳에는 보라색 석양이 내렸다.’

이 문장은 이르쿠츠크, 정확하게는 바이칼 호숫가의 작은 마을 리스트뱐카를 돌아다닌 감상을 적었던 글의 마지막 구절이다. 여행을 다녀 본 사람들은 알 것이다. 일정을 마무리하고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는 언제나 그곳만의 느낌을 담은 석양이 존재한다는 것을. 대도시를 비추는 석양은 왠지 따스하다. 빌딩 사이, 길거리를 가득 메운 자동차 사이를 비집고 들어온 햇빛은 마치 깃털 이불처럼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의 지친 어깨를 덮어 준다. 너른 벌판 한가운데서 보는 석양은 나무와 같다. 아무것도 없는 평원, 그 너머로 자신의 모습을 가려가는 태양 기둥 주위로 아른거리는 다채로운 빛 조각의 이파리 무리를 보고 있노라면, 마치 정오의 뙤약볓을 피하기 위해 그늘을 찾듯 발길이 끌린다. 둘 다 같은 햇빛임에도 불구하고.
방금 들었던 예시들은 석양에 대한 단순한 감상을 적은 것뿐이다. 여행자의 사설이 들어가게 되면 상황은 더욱 복잡해진다. 어떤 이는 수많은 인파 속에서 축제를 즐기다 단순한 눈 깜빡임 수준으로 햇빛을 감상하였을 수도 있고, 또는 끝없이 내리는 빗줄기에 단순히 어두워지는 구름을 보았을 수도 있다. 심지어는 같은 장소에서 같은 노을을 바라보는 두 사람의 머릿속에서도 다른 감상이 나올 수 있다. 같은 풍경을 보면서도 감상이 천차만별로 달라질 수 있는 것은, 여행이라는 것은 온전한 자신만의 시간이기 때문이다.
예시를 들어 보자. A는 지금 굉장히 만족스럽다. 자신이 있던 곳에서는 분명히 해가 한참 지고도 남았을 시간인데, 지금 이 곳에서는 석양이 지고 있다. 저녁 10시가 넘어서까지 지지 않는 태양을 보며 기름기 가득한 저녁을 먹은 A는, 이 도시에서만 파는 맥주를 사서 이 여유를 좀 더 즐기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맥주를 고르고 있자니, 카운터 앞에 그득그득 쌓아 놓은 헤이즐넛이 보인다. 왠지 안줏거리로 좋을 것 같다. 좋아, 한 봉지 같이 사서 숙소로 돌아간다. 숙소에 놓인 테이블에 앉아 캔을 따고 탄산이 빠지는 소리를 즐긴다. 왠지 모르게 다른 색을 띤 석양빛은 그의 방 안을 가득 채우고, 길게 늘어진 빛줄기는 그에게는 만족감에 넘친 눈꺼풀을 덮는 안대였다.
같은 도시에서 다른 숙소에 묵고 있는 B를 보자. 그는 지금 손가락 하나도 까딱하고 싶지 않다. 낮이 길다는 것을 우습게 보고 도착 다음 날 바로 해가 질 때까지 도시를 걸어서 돌아다니겠다고 자신에게 호언장담하고서는 아침 10시부터 걸어 다니기 시작한 지 어언 10시간째. 출발할 때 굳건히 대지를 딛고 서 있던 그의 두 다리는 더 이상 관절이라는 것이 남아나지 않은 듯이 팔랑거리고, 결의에 차 있던 눈빛은 둘 곳을 몰라 땅바닥에 처져 있다. 오늘 더 이상 보도블록을 밟으면 내가 사람이 아니라고 혀를 내두르며 간신히 숙소로 돌아와 침대에 몸을 던진다. 자연스럽게, B의 고개는 창문을 향해 있다. 내 비록 지친 육신일지라도 이 두 눈에 풍경을 하나라도 담겠다는 여행자스러운 의지는 전혀 담겨 있지 않다. 그냥 침대에 엎어지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이다. 당장이라도 눈을 감고 자고 싶은데, 야속한 태양은 아직도 질 줄을 모른다.

이것이 여행에 대한 기록을 적을 때 특히나 신경 쓰이는 부분이다. 기행문은 좀 위험한 글이다. 읽을 사람들이 잘못 판단할 확률을 걱정해야 한다는 점이 그렇다. ‘글’이라는 매체는 무척이나 개인적이기에, 문장으로 표현된 작가의 상상력은 독자 자신만의 경험으로 걸러진다. 독자들이 책을 읽으며 제각기 다른 감상이 나오는 것은, 그렇게 책 속의 자신만의 세계가 있기 때문이다. 어딘가를 표현하는 문장을, 감정적인 미사여구로만 표현하게 되면 모두 다른 곳을 생각할 것이다. 문학 작품이라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을 부분이다. 시나 소설에서는 느낌이나 장소에 대한 명확한 잣대 없이, 독자의 재량에 모든 것을 맡기니까. 하지만, 기행문은 다르다. 사람이 있는 곳이고, 사람이 다녀온 곳이다. 여행자 자신의 발걸음에 담긴 느낌을 적었기에 기행문이라 하는 것이다. 그곳이 어떤 느낌을 주었는지를 적어 두지 않은 글은, 그저 지리적인 정보를 적어둔 글일 뿐이다. 바로 여기서 문제가 생긴다. 사람은 자신이 원하는 것만을 본다고 하였다. 감정선이 담긴 문장 하나에, 독자에게 ‘이 곳은 이런 곳’이라는 선입관을 심어줄 수 있다. 특히나 기행문에서는 여행지가 어떤지를 독자에게 공고히 하기 위해 시각적인 매체를 동원하게 된다. 사진이나, 동영상과 같은. 이것이 독자의 편견을 더욱 견고히 하는 촉매가 된다.
그렇기에 여행에 대한 글을 쓸 때는 더욱 단어 하나, 문장에 찍는 마침표 하나에 더욱 신경이 쓰인다. 자신에게로 쏟아져 내리는 장대한 풍경이, 어떻게든 눈으로 받아내어 보려다 눈물로 넘쳐 나올 정도로 감동적이었기에, 그것을 최대한 끌어내고 싶은 것이 기행문을 쓰는 이들의 공통적인 목적일 것이다. 오해의 소지 없이, 최대한 날것 그대로 정제하여. 물론 글을 읽은 감상은 독자마다 모두 다른 것이 당연하다. 다만 그 감상의 줄기가 통제할 수 없을 만큼 퍼져 나가 여행지에 대한 그릇된 시각을 심어주지 못하도록 갈래를 가다듬어 주는 것 또한, 여행지를 소개하는 사람의 소임이다.

얼마 전, 남원에서 잘 쉬다 온 이야기를 적어 놓고 나니, 여행기를 연재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옛날에 적어 놓았던 것까지 모두 다 올리기 위해, 이전에 블로그에 휘갈겨 놓았던 여행기들을 다시 들여다보았다. 대부분의 글들이 비공개 처리되어 있었다. 심적으로 고개를 갸웃거리며 읽어 내리기를 불과 몇 문장, 왜 그랬는지 굉장히 재빠르게 깨달았다. 과거를 담아둔 우물에서 끌어올린 두레박 안에는 차마 눈 뜨고 보지 못할 것들로 가득했다. 끝내지 못했던 글들을 바라보며 한탄한 게으름 역시 한숨의 대상이었다. 이전에 썼던 문장이 너무나도 조야한 것을 보며 얼굴을 붉혔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넘어 가장 부끄러웠던 것은, 아무도 이해하지 못할 공감대 없는 구성이었다. 키보드를 두드리는 내내 마음속으로 눈물을 흘리며 문장을 고치고, 완결 내지 못한 부분을 채워 넣었다. 이해가 가지 않을 법한 부분을 아예 들어내고, 다른 단어를 때려 박았다. 그리고 글을 수정하는 나 스스로에게 주문했다. ‘젓지 말고, 흔들어서.’ 아무리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이 있더라도, 이 녀석들 역시 그때의 느낌 그대로를 갖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최대한 원형 그대로를 유지하려 노력해도, 너무나도 큰 수술에 새 글을 적는 듯한 느낌은 어쩔 수 없었다. 이게 집에만 처박혀 있는 못난 자식새끼 어르고 달래고 꾸며서 내보내는 심경인가 싶기도 했다.
그래도 즐거웠다. 고롭던 때도 모두 지나면 경험이라 하였다. 하물며 즐거웠던 여행을 돌이켜 보는 것은 추억을 캐내는 것이다. 경쾌한 손놀림으로 타자를 쳐 내려간다. 아마도 죽을 때까지 반복할 이 작업을 계속하기 위해서.

- Hab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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