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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풍금이 있던 자리 Oct 14. 2024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5

맹신과 키치의 유사함


영영 답을 알 수 없는 것에 대한 우리의 의문과 갈증, 고뇌. 나는 그것을 지혜의 여로라 말하려들며 퍽 긍정한다마는, 한편 이러한 고뇌가 필연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쿤데라가 영원회귀에 대해 그러했듯, 고뇌를 완전히 뒤집어서 생각해보자면 그것은 결코 필연적인 것이 아니게 된다. 완전히 뒤집어서 다음과 같이 말해보자. 고뇌란 인간 조건의 필수불가결한 것이어서, 고뇌하지 않는 것은 부정되어 마땅한 것인가? 그렇게 선언될 수는 없는 것이다. 무거움이 그러하였듯이, 오히려 모든 고뇌란 답을 알 수 없는 것에 대한 미련, 내지는 집착이 될 수도 있을 것이며 불필요한 정신적 방해 요소라고 일컬어질 수도 있을 것이다. 알 수 없는 것을 알고자 하는 것, 의문과 갈증, 그것이 필수불가결한 것이 아니라면 비로소 이렇게 이야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알 수 없기에, 모든 것은 믿음의 문제로 화한다. 올바름이 아니라 믿음의 문제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내 삶이 내 결정의 소산이며, 그 결정이 나의 귀책이라면, 그것을 오롯이 나의 의지대로 행하는 것이 문제는 아닐 것이다.’

- 전편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4’ 中



1) 불안과 믿음과 맹신


정답을 알 수 없는 것에 대한 우리의 고민. 무엇을 선택했어야 했나, 그리고 무엇을 선택해야 하나, 저기 알 수 없는 미래를 향해 시간과 존재는 앞으로만 나아가고 있다. 그러므로 결정해야 한다, 원하든 원치 않든, 좋건 싫건, 무엇인가를 결정하고 무엇인가를 행해야만 한다. 그러나 무엇을! 그리고 어떻게… 선택과 결정, 삶을 이루는 가장 기초적인 단위. 말하자면 진로에 관한, 말하자면 전공에 관한, 말하자면 직업에 관한, 결혼과 가정에 관한, 또는 자산에 관한, 투자에 관한, 부동산에 관한, 또는 인사고과에 관한, 그러므로 처세에 관한, 또는 창업에 관한, 심지어는 삶의 존속 여부에 관한 것, To be or not to be. 삶의 향방을 유의미하게 결정하는 이런 굵직한 단위로부터 아주 사소한 것, 말하자면 인간관계에 관한, 이성 친구와 고백에 관한, 또는 오늘 운동을 갈 것인가 말 것인가, 심지어는 점심 메뉴는 무엇이 좋을런가 같이 사소하고도 사소한 것에 이르기까지. 삶이 선택으로 가득 차 있으며, 선택은 고민을 수반한다는 것은 너무 당연해 너무 진부한 명제이다. 이렇게나 많고 동시에 이렇게나 보편적인 것인, 모든 사람의 것인 이 고민.


 우린 무엇을 선택해야 했나. 예컨대 최근 내 자산가격이 10% 떨어졌다. 간밤 미국 장이 좋지 않아 국내 증시에 여파가 몰려들어 온다. 언제나 그랬듯 역시나 알 수 없는 이유다, 대선 토론으로 인한 혼조세라나 뭐라나. 아침 9시, 개장 시간이면 치열하게 공방을 오가던 동시호가에 따라 그날의 새로운 시가가 결정되고, 주가 차트는 요동을 친다. 어제 종가와는 무관하게 높이 떠서 출발하기도, 낮게 깔아서 출발하기도 한다. 언제나 그랬듯 우리는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이 현상, 예컨대는 요동치는 차트의 제대로 된 이유를 알지 못한 채로, 그저 결정해야 한다. 오를 것이냐 떨어질 것이냐, 그것이 문제이다. 그러므로 결정해야 한다. To do or not to do. 사느냐 파느냐, 혹은 아무것도 하지 않느냐.


국내 증시의 일시적인 충격인가, 아니면 하락세의 시작인가. 기다리면 자산가치가 다시 회복할 것인가, 아니면 이제부터 계속해서 가치가 떨어질 것인가. 나는 기다릴 것인가, 아니면 눈물의 손절을 할 것인가. 무엇이 정답인지를 미리 알 수 있을까. 사느냐 파느냐, 혹은 아무것도 하지 않느냐.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건 적극적인 선택이라기보단 소극적인 것이었고, 그것까지도 선택임을 나는 알고 있다. 그리고 조금의 시간이 흐르면 세계는 어김없이 그 결과를 알려준다. 그건 마치 성적표 같다. 젠장 나이를 먹어도 영영 성적표에서 벗어날 수는 없는 것이로군. 내 투자 과목 월말 성적표엔 짙은 파란색이 떴다. 이제 그 성적표를 부모님께 가져다 드릴 일은 없지만, 어느덧 내가 스스로 그것을 판단할 나이가 됐다. 형편없군, C-, 도장 쾅.



잠깐 여담이지만 최근 내 글에 주식 이야기가 부쩍 늘었다. 알고 있다, 그건 내 요즘의 관심사가 이 주제에 몰입해 있는 까닭임을. 누구라도 투자 손실에 물려있는 사람이라면 그러할 것이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 투자는 선택이란 주제를 아주 효과적으로 나타낸다. 투자는 선택에 있어 사람의 흥미로운 이중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곤 하거든. 그건 선택과 그 불안 앞의 우리 인간 유약함을 가리킨다.


선택과 결과, 고민과 불안, 달콤한 환희와 씁쓸한 후회, 또는 지루한 기다림의 반복. 사람들은 무의식적으로 불안을 안고 살아간다. 바꾸어 말하면 살아감이란 선택이고 선택은 고민과 불안을 수반하기 때문에, 살아감이 불안으로부터 불가분하다는 사실은 자연하다.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사실 자체가 아니라, 그에 파생되는 인간 현상들이다. 선택과 결정이 삶에 끼칠 영향력이 클수록 그것이 수반하는 불안도 따라 커진다면, 사람은 무엇을 근거로 중차대한 결정을 내릴 수 있는가. 달리 말해, 어떻게 그 크나큰 불안을 다루고 극복하는가. 이는 전전 편에 다루었던 ‘믿음’으로 행해진다. 어떤 관점에서 선택이란, 불안과 믿음의 저울질이자 줄다리기인 것이다.


그리고 믿음이란 언제나 합리적이고 냉철하며 객관적이라기보단 얼마든지 주관적일 수 있고 감정적일 수 있는, 믿고자 하기에 믿어질 수도 있는 것. 믿음이 바로 동일 주제에 관한 사람들의 선택이 각 다르게 분화하는 지점일 것이다. 흥미로운 이중성은 여기에서 출발한다. 1% 포인트의 주가 등락에 울고 웃는 사람이 하나 있다. 마치 삼성전자 주가에 마땅히 정해진 가격이라도 있다는 것처럼, 그는 파란색 부조리를 느끼며 흡연장에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회사에서는 신경질적으로 변한다. 아까 내게 요청한 자료를 검토하며, 트집 잡을 구석을 면밀히 살피는 때에 가파르게 굽어진 눈썹을 나는 바라본다. 그저께였다면 그가 다른 답변을 했으리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실제로 다음날, 삼성전자 주식에 빨간불이 켜지자 그는 “그렇지, 이제야 제대로 되어 가는군”하며 만면에 웃음꽃을 피운다. 그의 눈썹이 곧게 펴졌다.



그에게도 초심자의 행운이 깃들었더랬다. 젊지 않은 나이, 평생 첫 투자였는데 운이 좋게도 해당 테마주가 상승장이었을 때 진입한 덕에 자산가치가 10% 상승했다. 그는 점심시간마다 ‘자기가 투자에 촉이 있는 것 같다느니, 진작에 투자할 걸 그랬다느니, 이번이 처음이라 간만 봤는데 힘을 제대로 실어줘야겠다느니’ 득의양양하다. 그리고 테마주 랠리가 끝날쯤, 그는 대규모 투자를 강행한다. 해당 종목의 자산가치는 20% 하락했다. 또 친한 지인이 ‘국내 주식은 무조건 삼전’이라는 이야기를 하길래, 나름 분할 투자로 삼성전자에도 투자했다. 자산 가치는 10% 하락했다. 그는 곧잘 어떻게 해야 하냐는 듯 당황스러워한다. 매입 단가 기준 시가가 1% 오르내릴 때마다 환희와 비탄을 가볍게 넘나든다.


그는 예민해진다. 투자 관련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큰 관심을 보였고, 뉴스의 호재거리에 웃고 악재에 쉬이 흔들렸다. ‘지금이라도 손절매를 해야 하나, 아니면 추가로 대출을 끌어와야 하나’, 틈틈이 삼성전자 투자를 추천한 사람에 대한 원망과 한탄도 해본다. 하지만 선택과 결정의 책임은 오로지 본인의 몫. 적어도 원하든 그는 일희일비하는 사람이고 가벼운 사람이다. 하지만 그는 틀렸나? 말하자면, 그는 투자 선택에 있어 언제나 실패할 사람인가? 그렇지도 않다. 그러나 틀리지 않았다는 것이 곧 옳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내일, 다음 주, 다음 달 주가가 오를지 내릴지는 하느님 할아버지도 모르는 일이고 우리는 그저 오르느냐 내리느냐의 홀짝 게임을 하고 있을 따름이다.


한편, 여기 하루 만에 자산가치가 20% 하락한 사내가 있다. 그는 이 사태를 이해할 수 없다. 분명 어제까지 차트는 안정권이었고 이동평균선에도 특이사항이 없었다. 종목 차트는 튼튼한 지지를 보이며 우상향으로 가고 있었고, 저항선도 나름 시세에 가깝게 깔려 있었다. 틈틈이 유튜브에서 챙겨보는 전문가 의견과 애널리스트 보고서도 매수 추천으로 분명 낙관적이었다. “그래, 그렇지. 무조건 오르게 되어 있지.” 분명 어제까지는 주가 상승을 확신했더랬다. 새파랗게 질린 주가를 바라보던 그는 잠깐 혼란스러워하다간, 이내 더욱 자세히 차트를 분석한다. 차트 안에 투자 선택의 정답이 있다고 믿는다. 호가 차트를 주봉, 월봉으로 늘리고 줄이며 들여다보다간 전 저점 前 低點을 확인하곤 오늘 떨어진 주가가 3번째 바닥이며, W 모양의 쌍 바닥 형태를 이루는 것을 확인한다. ‘3번째 바닥이니까 다음엔 다시 오를 것이다.’ 그는 대출을 끌어와 추가 매수를 한다. 다행히 다음 날부터는 주가가 회복세를 보였다.


지수는 일시적으로 내렸을 뿐이고 금세 본래 수준을 회복했다. 뉴스에서는 사유에 대한 여러 가지 분석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엔 캐리 트레이드’ 청산 문제라든지, 경기 침체 우려 등 여러 가지 의견들이 들려온다. 그는 오히려 하락의 공포에 굴하지 않고 과감한 결단으로 저가 매수를 한 것에 안도감과 묘한 자신감을 느낀다. “그러면 그렇지. 그렇게 무너질 리가 없지. 절대 그럴 리가 없거든.” 허나 얼마 지나지 않아 지수는 다시 한 번 충격을 받고 주가는 내려앉는다. 자산 가치는 15% 하락했고, 저번과 달리 부채까지 보유하게 된 상황. 4번째 바닥이라고 생각하며 추가 매수를 희망하나, 유동성이 부족하다. 대신하여 저번과 같이 본래 수준을 금세 회복하리라고 믿으며 자신을 다독인다. 하지만 이튿날 엔비디아 실적 발표 이후 반도체 기대 심리가 크게 꺾였고, 관련주인 해당 종목은 추가로 하락한다. 쌍 바닥 형태이니 다시 치고 오를 줄로 믿고 있었는데, 바닥 밑의 지하실이 드러났다. 낙관론을 말하던 전문가들은 최신 영상에서 태도를 바꾼 채 비관을 말하고 있었다. 화가 나고 어이가 없으면서도 ‘왠지 어딘가 모르게 불안하더라니. 그래, 낌새가 안 좋았는데… 내가 분명 그걸 알고 있었는데…’ 하고 그는 생각한다.



한편 미국 증시는 오늘도 역사적 신고가를 갱신하고 있다. 주변인 중에서도 “미장은 신이야”를 외치며 무지성 매수를 결정해 수익을 본 친구들이 쉽게 볼 수 있었다. 그는 동창회 자리에서 자신의 성공 신화를 뽐내고 있다. 들어보면 그리 대단한 철학이나 소신, 정교한 논리가 있는 것도 아니다. 그는 자신의 수익률을 자랑했다. 무려 60%라고 말하는 그의 얼굴에서 숨길 수 없는 자신감이 드러난다. 좌중은 놀라며 실제 수익액이 얼마인지를 물어본다. 투자액이 그리 크지 않아 조금 겸연쩍어하던 그는, 어쨌든 자기 자신이 옳았노라고 득의양양하여 말한다.


그 자신이 내린 선택의 올바름에 대한 그 사람의 믿음은, 나아가 그 자신의 올바름에 대한 믿음으로까지 번져나가 있음을 쉽게 알아볼 수 있다. 그런 기색은 자기 자신을 넘쳐 흘러버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투자 지식을 과감하게 뽐내고 있다. 누구나 뉴스에서 듣고 아는 것이긴 하지만 그런 건 중요치 않다. 뭐가 어찌 됐든 그는 결정했고, 세계가 그 결정의 손을 들어주었기에. 그 선택의 옳고 그름은 과정이 아니라, 최종적으로 결과가 드러내는 것이다. 물론 내가 과정과 의도를 소홀히 생각하거나 상대적으로 무가치하게 생각하는 건 추호 아니지만, 외려 나야말로 과정 예찬론자이나, 적어도 피상적 영역에서는 결과가 선택을 증명하는 것 또한 사실인 것이다.


외려 그는 그토록 단순하였기 때문에 과감했고, 그러므로 결정했고, 그 결과는 세상을 통해 드러났다. 하지만 그는 실제 자신의 조건에 비해 스스로를 과신한다. ‘국내 증시를 하는 건 멍청한 일이라느니, 왜 이 쉬운 걸 하지 않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느니. 내가 투자 조언을 좀 해줄 수 있노라’는 위험한 말들을 인식 없이 주워삼긴다. 좌중에는 조금 불쾌한 기색과 긴장감이 돌았으나, 이 또한 제지할 수 없는 자연스러운 일. 투자하지 않던 친구들은 동경을, 국내 증시에 투자한 친구는 약간의 질투와 패배감을, 미국 증시에 투자한 친구들은 동질감을 느끼고 있었다. 미장과 국장, 동창회에 자리한 이 선명한 대비는 꽤 해학적인 단상이다.



정말 그의 말대로 그가 옳았고 내가 틀렸을까. 그건 아직도 알 수 없는 일이다. 왜냐하면 아직, 아무것도 결정된 건 없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은 결과론적인 것, 뒤돌아보았을 때나 선명해지는 것이다. 그럼에도 다만 과거 선택의 순간에는 각자만의 이유, 그리고 믿음이 거기 늘 있었을 따름. 누군가는 ‘국장은 세력의 놀이터’라고 믿고, 또 누군가는 ‘미장은 거품’이라고 믿는다. 우리는 그 중 무엇이 정답인지 모른다. 어떤 선택의 정답은 이유와 근거의 합당함이라는 조건 하에 결정되는 것도, 그렇기에 미리 알아볼 수 있는 것도 아니라, 시간이 드러내는 것일 뿐이다. 물론 여전히, 아직 아무것도 정해지진 않았지만 말이다.


주식 투자뿐 아니라 부동산 투자 관련 일화까지 논하자면 할 말은 한도 끝도 없으니, 슬슬 줄이자. 청하지도 않은 부동산 투자 추천을 강짜로 받은 일도 있었는데 ‘이 정도면 재개발은 따놓은 당상’이라고 말하며 그는 확신했더랬다. 실제로 단 1주일 만에 시세가 1억 이상 뛰어버린다. 해당 부지의 모아 주택 사업 인가가 최종 확정된 까닭이다. 그러자 그 사람은 득의양양하며, ‘그러게 왜 내 말을 듣지 않았나. 주식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라 돈을 벌 수 없으며, 한국은 주식이 아니라 부동산 투자를 해야 성공할 수 있노라’고 말한다. 하지만 예상컨대 부동산 시장이 냉각되고 시세가 하락했을 때 그는 전혀 다른 것을 말하고 있을 것이다. ‘그건 내 탓이 아니라느니, 조정은 얼마든지 올 수 있는 것이며, 오히려 주식이야말로 수시로 세력과 큰 손에 의한 조정이 일어나는 것이고, 부동산 조정은 거시 경제를 정확히 반영하는 것, 그러므로 일시적이고도 충분히 수용 가능한 것’이라고 아마 그는 말할 것이다. 그래 그게 당신 탓은 아니지만, 당신이 뱉은 믿음의 이야기는 다른 사람들의 기억 속에 길이 남는다. 하지만 그대의 믿음이 사실과 다를지라도 그 믿음을 불식시킬 수는 없었으리다.


선택, 갈수록 내가 내릴 선택들이 점점 무거워져 감을 느낀다. 무엇이 정답일까, 사느냐 파느냐, 혹은 아무것도 하지 않느냐. 세상에는 성공한 사람의 서사가 너무 많다. 삶에는 공식이 있어 마치 이렇게 따라만 하면 다 될 것처럼 말하는, 그 이야기들에는 자신과 믿음이 가득 차 있고 그건 설득력이 있다. 왜냐하면 구태의연한 설명 없이도 그 삶의 빛나는 모습이 그 믿음을 뒷받침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그 빛남이 곧바로 증명이라고 생각지는 않는다.) 그러나 일찍이 톺아보았듯이, 삶에 있어 총체적으로 정답인 것은 없고 선택은 결국 각자의 몫과 책임. 아 참, 미장 예찬론자인 그 친구는 결국 수익률을 많이 잃어버렸다. 그가 매수한 종목도 ‘엔비디아’였거든.


앞서 든 예시는 총체적 정답이란 없고, 다만 각자의 선택과 결과와 책임만이 남는다는 취지의 논거이다. 선택을 무겁게 바라보는 사람은 차트를 들여다보는 사람의 비유. 그는 자신이 미래를 알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반면, 1%에 희비하는 사람과 미장 예찬론자의 비유는 선택을 가볍게 바라보는 사람을 가리킨다. 그는 쉬이 선택하고 쉬이 희비한다. 무거운 사람에게 있어 선택이란 ‘제주도행 비행기 표를 어느 시점에 구매해야 가장 싸게 구매하는 것인가’ 하는 아주 협소한 부분까지가 고민의 범주에 포함될 수 있고, 반대로 가벼운 사람에게는 ‘이제 진로를 결정해야만 한다’와 같은 제법 진중한 사안마저도 고민의 범주 밖을 서성일 수 있는 것. 그러므로 여기까지 예시를 늘어뜨린 다음 다시 주제를 상기한다. 가벼움과 무거움, 삶과 선택 앞에서 무엇이 내가 택할 태도인가.


가벼움 혹은 무거움, 그러나 선택에 대한 이 태도와는 또 무관하게 우리가 불안으로부터 진실로 자유로울 수는 없을 것이다. 눈 돌린 어디나 미지로 가득 찬 여기 세상을 살아가매, 우리가 이 불안과 고뇌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까. 인간은 어쩌면 너무 많은 것을 알아보고 또 생각할 수 있는 덕택에 외려, 한참 유약하게 태어난 존재이다. 차라리 보지 않고, 차라리 생각하지 않더라면 좋을 것들, 무엇이 의미이고 무엇이 정답인가! 마치 고향 집 마당에 정좌한 내 늙은 골든 리트리버처럼… 선택에 있어서 의미와 정답, 그것들이 가리키고 있는 더욱 높은 삶을 우리 갈급하지 않을 수 있더라면, 세계에 이렇게나 많은 고민과 서사, 술과 이야기들이 즐비하였을까. 어느 누구의 마음에나 존재하는, 그야말로 사람의 머릿수만큼이나 존재하는 이 인간 고뇌.


눈 뜬 사람, 그의 고뇌와 실상 그 고뇌를 불러일으키는 것인 불안. 눈 뜬 사람이란 지금 세계를 거닐고 있는 모든 인간, 말하자면 아침이면 졸린 눈을 켜 자기가 마땅히 있어야 할 곳으로 걸어가고 있는 모든 사람을 가리키기도, 또는 이성의 눈을 떠 아직도 그 불안 속을 헤매며 더욱 정교한 답을 구가하려는 사람만을 가리키기도 한다. 의도는 중의적이지만, 여기서는 후자에 조금 더 집중하고 싶다. 왜냐하면 바야흐로 ‘키치’의 파트이거든.





선택은 불안을 수반하고, 불안을 이기는 것은 믿음이다. 선택이란 불안과 믿음의 줄다리기. 허나 인간의 믿음은 약한 것으로 출발하여 강대해져 가는 것이로되 다시 한 번, 믿음의 강대함이란 반드시 지혜, 더욱 많은 것을 헤아리게 됨으로부터 일어나는 것이라기보단 필요에 의한 확신, 그러한 느낌의 증대에 불과할 수도 있었다는 것은 인간의 난해함이다. 필요에 의해 선별된 경험이, 그 믿음을 뒷받침하는 것을 바라보는 것은 오묘한 감상을 자아낸다. 애석하다기에는 인간적이고, 그렇다고 옳다기에는 편파적인 한편, 웬만큼 강대해져 버린 다음엔 타협의 여지가 없는 그것.


믿음은 그 어떤 결과도 정해주지 않는다, 다만 지금 이 순간의 불안을 이기기 위한 수단에 불과한 것. 다만 믿음의 실 의의와 그 요체는 서로 다른 곳을 바라본다. 믿음의 객관적 의의는 지금 이 순간만을 가리키고 있으나, 그 요체는 장차 일어날 것에 대한 확신을 통해 형성되기 때문이다. 본말전도의 아이러니. 믿음의 많고 적음이란, 그것이 일어나리라는 가정에 대한 확신 정도에 비례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불안이 커다란 사람에게 커다란 믿음이 필요하고, 그때 그 사람의 마음이 구하는 것은 더욱 철저한 확신이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확신이 클수록 그 실패가 주는 좌절감이 따라 커질 수밖에 없었다는 것은 사람의 오묘함일 것이다. 부디 오늘도 이 땅의 모든 확신이 그에 상응하는 것으로 되돌아가기를, 하여 평안하기를 바라지만 믿음과 소망은 아무것도 결정해주지 않는다.


선택의 순간, 오직 그 순간만을 두고 본다면 강대한 확신을 우려할 필요는 없을 것이나 그 선택의 결과, 그리고 그 앞의 우리 내면 변화까지를 고려해본다면 태도를 결정하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 된다. 쉽게 말해 ‘믿음과 확신’ 오직 그것이 중요하다라고 결론지어 말하기에는 여기 지독한 인간 딜레마가 존재하다는 것이다. 확신이 불안을 이겨 선택할 수 있게 하였으나, 다시 한번 확신이 그 선택의 실패를 견딜 수 없게 만든다는, 인간 딜레마.


믿음이 결정하는 것은 그 순간, 행함, To do or not to do뿐이다. 행위 그 너머의 것, 즉 믿음의 결과는 세계가 결정하고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 그러므로 나는 믿음에 대한 맹렬함, 맹신을 지양하고, 그것은 내가 마음이 약한 인간인 까닭이요, 하여 실패를 마음껏 품기 어려웠던 까닭이다. 나는 어느 한 가지 믿음이 마음에 영그는 때, 그 믿음의 정반대 것들을 생각한다. 믿음과 믿음의 실패를 동시에 생각한다. 그런 나의 선택은 언제나 굼뜨고, 그러한 태도가 언제나 나를 올바른 선택으로 이끌지도 않지만, 충분히 염두에 둔 실패는 내 마음의 항상성을 크게 뒤틀지 않는다. 다만 이는 마땅함이거나 올바름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내가 결정한 태도일 뿐이다. 올바름이 아니라는 것, 그야말로 차갑고 딱딱하고 어쩌면 무가치한 것, 선택에 지나지 않는다.


믿음에 정반대의 것들, 심지어 그 믿음과 전혀 다른 것으로 드러나 버린 실상, 믿음에 정면으로 위배되고 부정하는 만약의 사실들을 나는 대비한다. 그런 신중함은 강렬한 믿음과 멀리서 마주 본다. 그러나 혹자는 믿음과 실패에 대해 전혀 다른 견해를 전개하기도 한다. 믿음 그것은 인과의 첫 번째 계단이요, 시작은 하나의 사건이 내포하게 될 일련의 프로세스 중 가장 엄중한 것이며, 시작이 있고서야 그 끝이 있음으로 그것이야말로 중요하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리고 어차피 아무것도 미리 알 수 없고, 행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으므로 우리가 행할 것은 그저 나아감, 그러므로 필요한 것은 일어날 것이라는 믿음과 확신, 좌절, 그 후 다시 일어나는 믿음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나는 그 말에 동의한다. 다만 자신이 결정하고 선택한 믿음과 확신이, 그 바깥의 것으로부터 자신의 두 눈을 가리기도 한다는 것을 말하고 싶을 따름이다.


예컨대 투자에 관한 저마다의 견해 속에서 각자 형성한 강대한 믿음을 엿보곤 한다. 투자는 커다란 불안을 내포하기 때문에, 웬만큼 그것을 겪어온 인생의 선배들은 저마다의 강대한 믿음을 형성하고 있다. 더 가진 만큼 생겨난 잃어버릴 불안, 삶의 현 위치로부터 그에게 암암리에 주어진 위상으로부터 태어나는 그 불안으로부터 태어나는 강대한 믿음. 자신의 나약함을 두려워하는 어른들의 사정은 더 굳지운 믿음을 낳게 마련이나 혹자는 스스로 그것을 신념 내지는 투자 철학이라고도 말한다. 거기에 후퇴나 타협의 여지는 없었다. 그 여지는 틈이고, 그 틈을 통해 자신의 실패가 드러나 버릴 수 있다는 두려움을 사람은 본능처럼 느껴버리기 때문이다.


‘미장은 신이고, 국장은 유사 파생상품’이라는 믿음, 그에 반해 ‘미장은 거품이고 국장은 날아오를 때를 기다리는 웅크린 잠룡’이라는 믿음. ‘주식은 개미를 수탈하는 기관과 외국인, 사모펀드 및 큰 손들의 사기판이고 부동산이야말로 합당한 투자처’라는 믿음, 그에 반해 ‘부동산은 거대 자본의 투기장이고 주식이야말로 서민들의 합당한 투자처’라는 믿음. ‘단타 매매는 투기이고 가치 투자야말로 진정한 투자’라는 믿음, 그에 반해 ‘장기 투자는 허울 좋은 공염불에 불과하고, 테마주 단타야말로 우리 같은 서민들이 돈을 벌 수 있는 유일한 기회’라는 믿음. ‘차트 분석은 호사가들의 우스꽝스러운 취미이고, 거시 경제 지표야말로 증시의 올바른 선행지표라는 믿음’, 그에 반해 ‘거시 경제 지표와 뉴스는 개미의 심리를 꾀어내기 위한 그럴듯한 명분에 불과하고 차트 분석이야말로 주가의 미래와 투자 심리를 알아볼 수 있는 가장 객관적인 지표’라는 믿음.


이처럼 수많은 믿음과 믿음, 서로 완벽하게 대치하는 딜레마. 어느 한 가지 믿음을 선택한 사람에게 그 반대편의 믿음은 허무맹랑하다. 우리는 서로 마주 보며, 타협이 불가한 지점을 확인한다. 두 사람의 대화는 결국 소강하지만, 서로를 향한 몰이해, 부조리한 감각은 오래 남는다. 자기 믿음에 정면으로 어긋나며, 서로의 존재가 서로의 믿음을 위협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조금 더 신중한 사람은 속으로만 생각하려 들 것이고, 경망스러운 사람은 굳이 입 밖으로 내뱉을 것이다. 나는 후자에 가까운 사람이다. 아예 글로 쓰고 있으니 말이다.



이렇듯 믿음에는 강렬한 힘이 내포되어 있다. 여전히 세계에는 믿음을 위협하는 수많은 반례들이 엄연히 존재하지만, 어떤 반례로도 쉬이 개인의 믿음을 쓰러트릴 수는 없었다. 그건 그가 수집한 경험 중에 스스로 택한 것들로 이루어져 있고, 동시에 그 확신으로 말미암아 건너온 삶의 기억들이 그 신념 위에 쌓여 있기 때문이다. 즉, 강대한 믿음으로 살아온 사람이 그것을 부정하는 것은, 자기 삶을 부정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터무니없는 것이다. 


그들은 그 믿음이라는 칼과 방패로 하여 삶의 엄중한 선택들을 헤쳐나왔고 그 과정에는 성공과 실패가 있었으며, 그 모든 것이 자기 삶을 이루는 것이요, 자신이 긍정하는 자기의 삶이다. 믿음은 선택을 만들고, 그 선택이 모여 삶을 이룬다. 자기 삶을 긍정하는 사람은 자기 믿음을 긍정하고, 또한 자기 믿음을 긍정하는 사람은 자기 삶을 긍정한다. 믿음과 삶에 대한 인식은 이렇듯 상보적이고 재귀되고 순환한다. 그러니까, 한 번 세워진 믿음을 폐하는 것은 터무니없는 일이라는 말이다. 하물며 스스로 폐하기를 원하여도 쉽지 않은 것을 다른 사람이 종용하는 것은 더욱 터무니없는 일이다.


필요로 인해 형성된 믿음과 그 강렬함의 인과. 나는 이것을 키치의 원리라고 이해한다. 이하 키치라고 불리는 것이 형성되는 과정은, 믿음 일반이 지나침이 되는 원리와 맥을 같이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키치가 곧 맹신과 동일한 것은 아니다. 적어도 작가의 의도는 그렇지 않았다. 나는 이것을 자주 헷갈리곤 한다.


키치와 맹신 모두, 그 반대편을 배제하여 고루 바라보지 못한다는 점에서 유사하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맹신은 불안을 위함이고 키치는 자신이 바라는 미학적 이상을 위한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맹신이 불안을 이겨내기 위해 세워진 힘, 불안으로부터 자라나는 그림자라면, 키치는 미학적 이상에 자신의 믿음을 끼워 맞추는 부자연스러운 행태이다. 글로 정리하며 톺아보고 있자니, 그 결과적 행태 또한 사뭇 다름을 이제야 알아볼 수 있겠다.


맹신이 그 믿음의 대척점을 인식하되 부조리하게 생각한다면, 키치는 그 믿음의 대척점을 인식 상 배제하여 아예 없는 것처럼 행동한다. 나는 이것을 자주 헷갈리곤 한다. 하지만 그 발단과 전개 양상이 어떻든 간에, 실재와 사실을 배제하는 일체의 믿음, 나는 바로 거기서 부조리를 느낀다. 그건 거짓을 넘어, 기만이 되어 세상으로 흘러넘치기 일쑤였던 까닭이다. 마치 ‘미장을 맹신하는 사람’의 믿음, 그의 눈과 입에 흐르던 것처럼 말이다. 국장 수호자, 실은 물린 개미인 나는 아무래도 그의 말에 좀 긁혔다.



2) 키치에 대한 개인적 이해


나는 어릴 적 귀스타브 도레의 판화가 삽화로 실린 어린이 구약성서를 읽으면서, 거기에서 구름을 타고 있는 선한 신을 보았다. 늙은 아저씨 모습에다가 눈과 코가 있었고 수염이 길었으며, 입도 있으니 나는 그가 먹기도 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는 이 생각에 곧 질겁을 했다. 나는 무신론자에 가까운 집안에서 자랐지만 신의 창자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 신성 모독이라고 느꼈기 때문이다. 

신학적 예비지식은 조금도 없었지만, 어린 나는 순간적으로 똥과 신은 양립할 수 없으며 또한 인간이 신의 모습을 본따 창조되었다는 기독교의 인류학적 근본 명제가 지닌 허약성을 일찌감치 깨달았던 것이다. 둘 중 하나다. 인간은 신의 모습에 따라 창조되었고 따라서 신도 창자를 지녔거나, 아니면 신은 창자를 지니지 않았고 인간도 신을 닮지 않았거나. 

고대 그노시스파 사람들도 다섯 살 적의 나처럼 이를 분명하게 느꼈다. 이 저주받은 문제를 단칼에 해결하기 위해 2세기 그노시스파의 대스승 발랑텡은 예수는 “먹고 마시지만 절대 똥은 싸지 않는다.”라고 단언했다는 것이다. 

똥은 악의 문제보다 더욱 골치 아픈 신학 문제다. 신은 인간에게 자유를 주었으며 따라서 인류 범죄에 대해 책임이 없다는 점은 수긍할 수 있다. 그러나 똥에 대한 책임은 전적으로 인간을 창조한 신, 오직 신에게만 돌아간다. 

-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민음사,  2015, 394~395p
그것이 종교적 믿음이건 정치적 믿음이건 간에 모든 유럽인들의 믿음 이면에는 창세기의 첫 번째 장이 존재하며, 이 세계는 마땅히 그래야만 한다는 모양으로 창조되었고, 존재는 선한 것이며 따라서 아이를 가지는 것이 좋은 것이라는 생각이 거기에서 유래했다. 이러한 근본적 믿음을 존재에 대한 확고부동한 동의라고 부르도록 하자. 

(중략) 똥이 비윤리적이라고 주장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똥과의 불화는 형이상학적인 것이다. 똥을 누는 행위는 창조의 받아들이기 어려운 성질을 일상적으로 증명하는 것이다. 둘 중 하나를 택해야만 한다. 똥은 수락할 만한 것이라거나 (그렇다면 화장실 문을 잠그고 들어앉지 말아야 한다!) 또는 우리가 창조된 방식은 받아들여질 수 없는 것이라는 것 중에서. 

그러므로 존재에 대한 확고부동한 동의가 미학적 이상으로 삼는 세계는, 똥이 부정되고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각자가 처신하는 세계라는 결론이 도출된다. 이러한 미학적 이상은 키치라고 불린다. 

이것은 감상적이었던 19세기 중엽에 생겨나 그 이후 다른 모든 언어에 퍼졌던 독일어 단어다. 그러나 그 단어를 자주 사용함에 따라 그것이 지닌 원래의 형이상학적 가치가 지워졌는데, 말하자면 키치란 본질적으로 똥에 대한 절대적 부정이다. 문자적 의미나 상징적 의미에서 그렇다. 키치는 자신의 시야에서 인간 존재가 지닌 것 중 본질적으로 수락할 수 없는 모든 것을 배제한다. 

 -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민음사,  2015, 398~399p



나는 염세적 인간이고 근본적인 부분으로부터 무거우며, 양비적이다. 그건 아주 단순한 이유이다. 내 안에는 ‘부조리한 자기확신’이라는 강렬한 믿음이 있었으며, 그것은 언제나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선택의 결과는 세계로부터 주어지는 것이고, 세계는 나의 확신에 찬 믿음을 거부하였다. 그것을 외면치 않고 기억하는 한, 내 존재의 서사는 자연스럽게 맹신과의 이별 서사가 된다. 지금 내 인식과 존재가 모두 내 의지와 결정의 결과는 아닌 것이다. 사실 누구라도 그럴 것이다. 


‘생애의 대부분은 내 믿음과 의지를 올곧이 따르는 것이라기보다는 그와 무관하게 이미 존재 외적으로 결정된 채 주어지는 것이었고, 그렇게 결정된 것들이 시간의 흐름을 따라 우리의 생에 내리꽂히듯 현현하는 것이었으며, 그런 우리의 삶이란 일찍이 우리가 보고 자란 뭇 인간들의 삶의 행태를 많은 부분 답습할 것이다. 별것 아닌 기쁨과 마찬가지 별것 아닌 슬픔. 이 앞에 놓인 우리의 의지는 무엇인가, 세계라는 현상의 저울 앞에 놓인 좌측, 혹은 우측에의 선택과 그 선택에 대한 믿음. 그러나 이러한 세계, 모든 것이 결정된 채 주어지는 것으로서의 세계 앞에서 선택과 믿음, 무엇이 옳은지, 무엇이 정답인지가 애초에 중요한 것이었을까.’


‘선택. 얼마든지 뒤바뀔 수 있으며 그리되어 왔고, 하여 어제에 그랬던 것이 내일에 정반대의 것이 되어버리기 일쑤인. 그러므로 얼마든지 기억은 조작되고 말은 왜곡되어버리기를 수없이 반복했으며, 그러므로 그 모든 선택의 순간을 잊어버리지 않고서는 도저히 견딜 수 없는 것인. 오늘도 도처에 무수하게 일어나고 있는 이 인간 현상. 실은 애초 사실이 아닌 믿음에 불과한 것인? 안타깝게도 어느 순간부터 내 안에서는 그러한 종류의 믿음이 기능하지 않는다. 또한 안타깝게도 이건 내 선택이 아니라, 내 인식의 근원이 띠고 있는 음울한 속성에 가깝다. 나의 세계로서는 우연히, 마치 다른 모든 비극들이 그러하듯이 우연히, 그러한 종류의 믿음, 즉 낙관을 상실하게 된 것이다.’ 


이 또한 믿음이다, 어쩜 그대에겐 말장난 같겠지만. 낙관에 대한 불신, 염세적 세계관이라는 나의 믿음. 믿음은 어떤 가정과 결과에 스스로 동의하는 것이지, 반드시 긍정하는 형태로 일어나지만은 않는 것이다. 믿음이란 이미 일어난 것으로부터 아직 일어나지 않은 것으로 이행된 태도를 통해 드러나며, 그것은 스스로의 깊은 동의를 수반하는 정신 활동이다. 그러므로 어떤 종류건 사유가 존재하는 한 믿음이 전혀 존재하지 않을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가 과거와 미래를 생각하는 한에서는 말이다. 나아가 모든 것을 부정하고 불신하는 표독한 자의 마음에는 또한, 오히려 더욱 강대한, 믿음이 존재하는 셈이다. 즉, 불신 또한 믿음이고, 여기서 발생하게 될 오해는 차라리 언어의 모호함과 추상 명사가 지니고 있는 개별성의 한계 때문일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믿음이 강한 인간이다, 비록 염세적이라지만 말이다. 여담이지만 이 부분에 이르러 난관에 봉착하였고 그 때문에 기고에 많은 시간이 소비되었다. 왜냐하면 곧 있을 ‘키치’를 맹신과 낙관이라는 관점에서 비판하려 했으나, 비판자인 나 또한 믿음이 강한 사람이었음이 글을 통해 드러나 버렸기 때문이다. 키치는 ‘존재에 대한 확고부동한 동의’로부터 출발하는 미학적 인간 이해이다. 그 확고부동한 동의를 나의 식대로 표현한다면 ‘낙관적 맹신’이라 바꾸어 말하겠다. 


키치의 낙관성을 비판하면, 그 비판자인 나의 염세 또한 똑같이 비판되고, 정합성과 설득력을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낙관과 비관, 그 중 무엇이 옳은지를 논하는 것은 어쩜 유치하고 무의미한 것인 까닭이다. 그것은 그저 개인의 믿음이자 각자 정한 삶과 미래에 대한 태도일 뿐이고, 각각 명암을 지니고 있음을 이해하고 있는 한에는 어느 한 사람의 입장으로 그 반대편의 입장을 객관적으로 비판할 수는 없을 것이고 오히려 자기 자신의 입장, 내 것으로 말하자면 염세적 믿음을 옹호하기 위해 낙관적 믿음을 비판하는 형국은 오히려 앞서 길게 열거한 ‘맹신의 오류’를 범하게 되는 셈이다. 텍스트를 다시 읽고, 원고를 갈아엎는다. 그러면서 나의 ‘키치’에 대한 주관적 이해는 아주 조금만 더 예리해진다. 내가 ‘키치’에서 느낀 반감과 부조리는 그것이 ‘낙관’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철저한 배제’를 수반하기 때문이었다. 나는 이것을 헷갈렸다. 



‘존재에 대한 확고부동한 동의’, 내게 일찍이부터 부재했던 것은 그 동의이다. ‘마땅히 그래야 하는 형태를 따르는 선한 것으로서의 존재’라는 인식인즉, 인간 존재에 대한 조건 없는 긍정. 나아가 하나의 존재를 막론한 모든 것, 이를테면 한 인간의 미래라든지 희망이라든지 존재에 관해 떠올릴 수 있는 모든 것에 대한 긍정, 인식의 바탕과 저변에 자리해 있는 이 근본적 낙관과 그에 대한 확고한 동의, 그 철저함에 말미암은 기타 비관과 부정에 대한 철저한 배제. 나는 지금에 이르러 믿음이 강한 사람이지만, 여전히 그건 낙관 위에 지어지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건 세상이 거두어 가주었기 때문에. 간절한 기도는 실현된 적이 있었나 그대야? 


‘세상이 네가 간절히 원하는 바로 그것, 단 한 가지를 주리라.’ 사람들은 세상이 초콜릿 박스라고들 말하지만, 그 박스 안에서 건질 수 있는 건 언제나 진득한 흔적만을 남긴 빈 종이 껍질뿐이었다. 그리 대단한 걸 바란 적도 없는 것 같은데 말이다. 그러나 인간이 다른 인간을 필요로 하는 한 이러한 존재 긍정의 인식은 필수불가결한 일이라는 사실을, 세계는 내게 알려주었다. 그러한 인식에 기반해 타자의 존재 의의 및 관념의 행보에 동의하고, 그렇게 그 자신의 것 또한 동의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세계는 내게 철저한 고독이라는 방식으로, 택한 적은 없으나 정반대 편에 속한 대가로써 그것을 알려주었다. 허나 이 모든 것을 얼추 이해할 수 있게 되었음에도, 안타까울 정도로 여전히 그것은 내 기억과 이해의 본질 속으로 편입될 수 없는 명제이다. 


사람의 내면에 인식 체계라는 커다란 망태기가 있다면, 인식의 원형은 이 망태기 안에 켜켜이 쌓이는 경험에 있고 그러므로 가장 일찍이 그리고 가장 강렬히 온 것이 맨 밑에 쌓여있을 것이다. 이것을 통째로 드러내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내 안 깊숙이 간직된 인간의 근원적 행태는 보편적으로 추하거나 어리석고 그럼에도 이따금씩만 빛나는 존재의 상 狀이며, 어느 부분 부분, 뜨문뜨문씩만 사랑스럽다. 추하고 어리석으며 이따금 사랑스러운, 완벽하기에는 한없이 모자라고 그리하여 애틋한 인간들의 세계. 허나 사람들은 나의 인간 이해를 불길하게 생각하는 듯하다. 


그러므로 내 오랜 방황의 원천이자, 질문은 내 정반대 편에 놓인 키치 바로 저것이다. ‘존재에 대한 확고부동한 동의’,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 것이며, 나아가 그것이 없는 사람은 어떻게 세계에 속하고 더불어 살아갈 수 있는가에 대함. 낙관을 몸으로 또 즉물적으로 이해치 못하는 나로서 ‘키치’는 넌센스와 같다. 그러나 또 한편 다른 존재를 필요로 하면서, 그 존재에 대해 동의하지 못하는 것은 더욱 지독한 넌센스라는 것을 우리는 이해하고 있다. 허나 내 몸이 진정으로 궁금한 것은 어떻게 그것이 가능하냐 하는, 아주 단순한 것이다. 어떻게 자신을 그렇게 긍정하고, 자기 존재를 무조건적으로 동의할 수 있는지. 


지금 거기 동의하고 있는 사람의 마음에 스위치랄 게 있어, 그 마음을 그만두려면 곧잘 그만둘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처럼 그 반대 또한 마찬가지인 까닭이다. 일찍이 가벼움과 무거움은 천성과 같이 일견 자연선택적이나 얼마든지 뒤바뀔 수 있는 것인바, 선택이라고 말하였지. 존재에 대한 가장 근원적인 동의 또는 반대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그게 스위치를 켜고 끄는 것처럼 손쉬운 일은 아닌 것이다. 지금 이 글을 이루고 있는 편집증은 그 두 가지 사이의 아득함에 기인한다. 



우리가 바라보고 있는 세계는 인식하고 해석된 것인 상으로서의 세계, 누구에게나 세계란 물 자체가 아닌 상으로서의 세계일 터, 그러므로 세계는 인식과 해석을 이루는 개개인의 고유한 근원으로부터 전혀 다르게 분화될 수 있음을, 우리는 살아가는 동안 무수히 경험한다. 동일한 세계를 전혀 다르게 바라보는 두 사람의 상반된 믿음, 사람 사이의 그 아득한 몰이해를 우리는 살아가매 충분히 어쩜 지나칠 정도로 경험한다. 그리고 키치, ‘존재 긍정과 동의’라는 주제에 국한하여 그대와 나 사이의 아득함이 있으리라는 것을 생각한다. 인간을 긍정하고 인간의 의지를, 미래에의 낙관과 희망을 긍정하며 모든 선함과 올바름을 찬미하고 또 동의하는 일련의 사람들과 나 사이의 아득함. 뒤에 가서 전부 다 갈아엎겠지만, 일단 편의상 이를 키치의 문제였노라고 단락해두자. 


‘키치’가 말하는 인간 존재에 대한 확고부동한 동의란, 인간 존재가 신을 본따 만들어진 미학적 존재, 내적으로는 선하고 외적으로는 아름다운 존재라는 전제로서의 믿음이다. 즉 신의 위상을 빌어 인간 존재를 긍정하려는 근원적 믿음의 시도인 것이다. 이웃을 사랑하고, 모든 이에게 친절하고, 그들의 존재를 긍정하고, 그들의 낙관적 믿음을 북돋아 주려는 것, 이러한 일체 상냥함에의 긍정과 동의를 넘어 그러한 형질로서만이 인간 존재를 규정하려는 시도. 그러한 긍정 요소만을 ‘인간적’인 것이며 받아들일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며, 암암리에 선을 그어버리는 태도. 


그 이면에 엄연히 존재하는 일체의 부정, 예컨대 실패와 오류와 민낯과 한계를 외면하려는 것을 넘어, 아예 배제해버리려는 시도이다. ‘인식하지 못하는 것은 없는 것과 마찬가지인가.’ 그러하다. 그러나 애석한 지점은 ‘인식 불가함’과 ‘인식하지 아니하려 함’을 스스로 명확히 구분하기 어려움에 있다. 인식하지 않으려 하기에 인식되지 않고, 인식되지 않기에 없는 것이 되어버리는 것, 이 ‘배제’는 내게 반감을 돋우지만 또한 어찌할 수 없이 자연한 인간 한계일 것이다. 그래, 이 또한 어찌할 수 없는 것이라는 걸 아는데… 너무 잘 아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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