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란도트 - 아레나 디 베로나 내한 공연 후기
투란도트 문화 초대가 왔다. 포스터에 적힌 몇 가지 홍보 문구만으로도 대단한 공연이겠구나, 옳거니 싶었다. 그즈음 같이 공연 같이 가보았으면- 하는 사람이 생겨서, 2매로 티켓을 신청했고 기쁘게도 선정되었다. 그로부터 시간은 1달쯤 지났나, 티켓 신청을 할 적에 내심 생각했던 그 사람과는 어딘가 멀어졌다. 일전의 사심과 무관하게 너무 좋은 기회라고 생각해 관람을 권했지만, 그 사람은 ‘공연’을 싫어한다고 답해주었다.
한편 티켓을 신청할 적에 옆에 찰싹 달라붙어 있던 나의 동생 놈은, 문화생활에 일절 관심이라고는 없는 진성 집순이었으나 그날 따라 유달리 군침을 흘리더랬다. 이놈도 돈 냄새를 맡은 까닭인지, 아니면 포스터 디자인이 멋들어지게 잘 뽑힌 까닭인지 자기를 데리고 가달라고 졸랐다. 희한하지, 평소에 대학로 연극엔 같이 가자 권해도 귓등으로 듣던 놈인데. 나는 꿈 깨쇼- 점찍어둔 사람이 있노라 말하였고 그로부터 1달쯤 지나 녀석에게 동행을 권했다. 뛸 듯이 기뻐하는 동시에, 녀석은 그 의미를 곧바로 이해하였다. 그렇게 사이좋은 오누이의 고급문화 탐방기는 시작한다.
티켓은 우편으로 도착했다. 비싼 공연이라 그런가, 봉투를 찢어 티켓의 반들반들한 감촉을 구경하고 싶어졌다. 아주 무난한 모습의 티켓에 그렇지 않은 글귀, S석이었다, 럭키비키. 공교롭게 좌석을 나타내는 글귀 밑에는 가격이 적혀 있었는데, 무려 30만 원이었다. 초대권이 이 정도 가격대면 특급 좌석은 얼마나 하는 것인지 궁금해졌다. 최고급 좌석은 무려 55만 원이었다.
최고급 좌석의 정보를 알아보기 위해 인터넷을 쏘다니다가, 우연하게 관련 리뷰를 몇 보았다. 부정적인 리뷰가 몇 개 눈에 들어왔다. 가격대에 대한 불만, 음향시설에 대한 불만, 그리고 시설 대관 관리에 대한 불만 정도가 대표적이었다. 이번 공연의 무대인 올림픽공원 KSPO 돔은 본디 체육시설인 까닭인지, 혹은 가창자들의 성량 밸런스 문제인지 음향에 빈 구석이 많았고, 더구나 공교롭게도 그로부터 불과 20미터 남짓 떨어져 있는 곳에서는 ‘SLOW LIFE SLOW LIVE’, 일명 ‘슬라슬라 페스티벌’이 한창이었다. 수요일을 끝으로 막을 내린 페스티벌의 음향이 투란도트의 그것과 겹치며 관람에 방해되는 이슈가 있었나 보다. (해당 페스티벌 관련 리뷰는 지금쯤 아트인사이트 메인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런저런 이슈를 염두에 두고 무대를 찾는다. 그리고 공연이 끝나고 돌아 나오는 길, 일전의 불만이 왜 일어났는지, 왜 그래야만 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물론 돌아 나오는 길의 내게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우리는 금요일자 티켓을 신청했다. 나도, 일전에 염두에 둔 그 사람도, 염두에 없던 내 동생도 생업에 종사하고 있기 때문에… 금요일엔 흠뻑 비가 왔다. 본격적인 가을로 접어들며 짧아진 해는 퇴근과 함께 자취를 감추었고, 가을비는 언제나 으스스한 추위를 몰고 온다. 찬 바람과 어둠이 내린, 19시경의 9호선 올림픽공원역은 본디 한산했을 테지만 주변은 인산인해였다. 저녁 정도 먹을까 생각했지만, 역전의 식당은 바깥까지 길게 줄이 늘어서 있었다.
우리는 급한 대로 자그마한 컨테이너로 된 핫도그 집에서 핫도그와 커피를 시켰다. 벤치에 앉아 먹으려고 보니 자리는 다 젖어 있었다. 선 채로 허접한 끼니를 때우며, 까짓 것 그런 사사로운 사실보다는 한창 기대에 들뜬 우리는 공연이 있을 돔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티켓 수령처의 천막 앞으로 십 수 개의 줄이 있었다. 티켓을 우편으로 수령해서 다행이란 생각을 했다. 그로부터 좌측 편 가장자리에 위치한 포토존 앞으로도 마찬가지 긴 줄이 늘어서 있었다. 나와 시니컬한 내 동생은 포토존 따위 신경 쓰지 않는다네, KSPO 돔으로 곧잘 들어섰다. 우리는 좀체 사진을 안 찍는다.
돔 안으로 들어서, 게이트를 찾아 홀에 입장했다. 전형적인 체육 경기장의 모습이었다. 그 왜, 접이식 플라스틱 의자가 반원형으로 가득 찬 광경. 허나 그보다도 이곳이 체육 경기장이라는 것을 상기시킨 것은 그 플라스틱 의자의 색깔이 적나라한 원색이었음이다, 개나리 빛의 노랑과 샛파랑, 반질거리는. 반원형의 비탈을 따라 놓인 객석은 무대에서 먼 순서로부터 D, C, B, A, S, R 석이었고 보아하니 저기 무대 앞의 평평한 공터에 놓인 의자들이 P석인 것처럼 보였다, 무대를 바로 정면 가까이서 바라볼 수 있는. 하지만 좀 섭섭했던 것은, 그것이 편의점 앞이나 해수욕장에 놓일 법한 회색 플라스틱 의자였다는 사실이다. 그래도 철제 의자 정도는 깔아주지, 내가 대신 섭하였다.
지휘자가 관현악단 앞에 자리하기 전, 그러니까 본격적으로 공연이 시작되기 전부터 스테이지 위에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어림 200명 가량의 사람들이 민초의 복장을 하곤 무대 위아래로 움직이고, 구석구석에서는 담소를 나누고, 경비병들은 그들에 채찍을 가하고, 누군가는 물 지게를 옮기고 있었다. 옛 저잣거리의 풍경, 놀란 것은 등장인물들이 생각보다 한참 많았다는 점이다. 저 사람들 하나하나의 출연 수당까지 다 챙겨주려면 이게 다 얼마야 하는, 낭만이라곤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생각이 드는 동시에 티켓 가격을 떠올렸다. 그래 다 이유가 있었던 거로군?
공연 시작 시간은 지났지만, 아직 객석으로는 지연 입장하는 사람들이 드문드문 들어서고 있었다. 무대 위에는 200여 명의 사람들이 소리 없이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지루해하지 말라는 일종의 배려겠구나, 생각하며 무대를 아주 차근차근히 뜯어보았다. 한눈에 들어오지 않는 저 사람들의 부분부분을 뜯어보며 동생 놈과 수군덕거리기도 했고, 무대에 비치된 소품 하나하나 주의 깊게 들여다보았다. 저잣거리를 구현해둔 무대 바닥과 군데군데 나무로 된 정자와 징 하나, 좌우편에는 아주 기다란 창을 세워두었고 그 뒤로는 붉은 조명을 비춘 높은 탑이 자리해 있었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의 뒤에 청동 벽을 상기시키는 거대한 병풍이 자리해 있었다. 십중팔구 2막에 이르러 저 병풍이 열릴 것이고 그 뒤에는 새로운 무대, 이보다도 많은 소품들이 있으렷다. 세심하고 아름답게 구성해둔 세트가 인상 깊다는 생각을 하며, 또 한 번 티켓 가격을 떠올렸다. 그래 다 이유가 있었던 거로군?
지휘자가 무대 아래쪽에 위치한 관현악단 앞에 자리하고, 관객을 향해 인사하고, 지휘봉을 들고, 관현악단에 간접 조명이 비친다. 어이구야 저기도 사람이 많았네. 무대에는 어림 3백 명의 사람들이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규모가 주는 감동이 있겠구나 하는 생각에 접어들 때 주인공이 막에 오른다.
공연 투란도트에 대한 상식 수준의 사실 전달은 비단 내 글이 아니라 하더라도 인터넷에 많으니, 굳이 옮겨 적지는 않겠다. 줄거리는 아-주, 아주 아주 아주 단순하다. 청나라 공주 투란도트는 남자에 대한 앙심을 품고 있었고, 혼인을 대가로 수수께끼를 내걸어 사내들을 도전케 하였으며, 수수께끼를 틀린 놈은 참수형에 처했다는 것. 그리고 역시나, 우리의 주인공께서는 그 수수께끼를 풀고 투란도트의 마음의 응어리도 풀고, 행복하게 잘 살았더래요- 하는 단순한 줄거리이다.
허나 오페라나 뮤지컬과 같이, 음악과 무대 연출과 서사가 어우러진 종합 문화예술 콘텐츠에서는 서사의 지위가 타 장르에 비해 축소되는 듯하다. 느끼기에 오페라의 서사는 ‘음악’을 돋보이기 위한 것이지, 서사 그것을 위해 음악이 존재하는 것 같지는 않다는 말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굳이 전달력이 떨어지는 성악 발성으로 가창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게 나의 견해. 가사 이해는 언제나 그렇듯 프롬프트로 대체한다. 하하하 어차피 가사가 이태리어라네.
그리고 알 사람은 다 아시겠지만 이 작품은 그 유명한 넘버, ‘Nessun Dorma’를 향해 쉼 없이 달려간다. 공연의 클라이막스인 이 음악에 이르기 위해, 모든 서사는 차근차근 계단을 쌓아가는 것이다. 달콤한 사랑과 기다림의 애타는 마음을 노래하는 듯, 서서히 무르익힌 낭만적인 무드를 마지막의 ‘Vincero’, 승리에 대한 강렬한 확신으로 분출하며 청중을 압도해버리는 곡, ‘Nessun Dorma.’ 한국어로는 ‘공주는 잠 못 이루고’로 번역된 이 넘버의 본 의미는 ‘아무도 잠들지 말라’라는 뜻이다.
워낙에 유명한 곡이니 듣기야 참 많이 들었지만, 나는 궁금했다. 저 사내는 무엇에 대한 승리를 갈망하는 것인지. 파바로티 아저씨 스페셜을 검색하면 항상 맨 위에 뜨는 게 ‘네순 도르마’였으니 자주 접하였건데마는, 야-하 저 아저씨 참 노래 잘하는구나 하는, 짤막한 감상에 이태 그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아저씨는 얼굴이 터질 듯이 ‘빈-체로’, 그러니까 강렬하게 승리를 구가하고 있는데 그 승리가 무엇인지 알 수 없다는 것, 그러므로 공감하지 못하다는 것은 퍽 심심한 일이다. 이 가사의 전후 맥락을 모르는 한에서야 영영 반쪽짜리 향유. 그런 의미에서 내게 이번 공연은 왜 그가 잠들지 말라고 말했는지, 그가 무엇으로부터 승리하는 것인지를 알아내는 과정이었던 셈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Jj6cMa1Ezdk&t=320s
[북경 백성들의 함성]
Questa notte nessun dorma in Pekino!
Nessun dorma! Nessun dorma!
오늘 밤 북경의 백성들은 아무도 잠들지 말라!
아무도 잠들지 말라! 아무도 잠들지 말라
[칼라프]
Nessun dorma! Nessun dorma!
아무도 잠들지 말라! 아무도 잠들지 말라!
Tu pure, o Principessa, nella tua fredda stanza
그대도 말이오, 공주여, 그대의 추운 침방 안에서
guardi le stelle, che tremano d'amore, e di speranza!
별을 바라보시오, 사랑과 희망에 떨리는!
Ma il mio mistero è chiuso in me il nome mio nessun saprà!
하지만 내 비밀은 내 안에 갇혀져 있고 내 이름은 그 누구도 모르리다!
No, No! Sulla tua bocca lo dirò quando la luce splenderà!
아니, 아니! 그대 입 위에 내가 말해주리다 날이 밝으면!
Ed il mio bacio scioglierà il silenzio che ti fa mia!
그리고 침묵을 녹이는 내 입맞춤이 당신을 내 것으로 만들 것이오!
[투란도트의 하인들의 함성]
Il nome suo nessun saprà
E noi dovrem, ahimè, morir, morir
그의 이름 그 누구도 알지 못하리니
그리고 우리는, 아아, 죽는구나, 죽는구나
[칼라프]
Dilegua, o notte! Tramontate, stelle! Tramontate, stelle!
사라져라, 밤이여! 물러가라, 별들이여! 물러가라, 별들이여!
All'alba vincerò!
여명이 밝아오면 승리하리라!
Vincerò! Vincerò!
승리하리라! 승리하리라!
남 주인공 칼라프가 자기 목숨을 걸고 세 개의 수수께끼를 다 풀었지만, 투란도트는 약속을 이행하지 않으려 한다. 이에 칼라프는 거꾸로 자신이 하나의 수수께끼를 걸겠으며, 이를 맞출 시 자신의 목을 내놓겠다고 말한다. 그가 내건 수수께끼는 동이 틀 때까지 자신의 이름을 맞추는 것. 아무도 잠들지 말라는 것, 별이 물러가고 여명이 다가오기를 기다리는 것과 이내 승리하리라는 가사는 이런 맥락을 담고 있던 것이다.
백성들은 칼라프의 이름을 알아내지 못하면 투란도트의 광기에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날 것을 두려워하며, 칼라프를 얼러도 보고 협박키도 한다. 그의 아버지를 찾아내 광장으로 끌어내어, 이름을 말하라고 다그친다. 결국 그의 아버지를 대신하여 여종이 희생되고, 여종으로 하여금 기꺼이 목숨을 내놓게 한 것, 사랑에 대해 투란도트는 다시금 생각하며 점차 마음의 문을 연다. 앞서 오페라의 서사에 대한 보론을 미리 덧대었지. 이런 이유인 것이다, 오페라의 서사를 마치 소설의 그것을 들여다보듯이 해부하고 비평하자면, 지나치게 냉담해질 수밖에 없었기 때문.
투란도트의 광기 어린 공포 정치도, 청혼을 대가로 구혼자들에게 참수형을 가하는 것도, 광기 어린 군중들도 그렇고, 비록 수수께끼를 풀긴 했지만 투란도트를 마치 소유의 대상인 듯이 말하는 칼라프도, 이렇게 풀어서 이야기하자면 턱-하고 받치는 요철들로 가득하다. 현시대의 입장에서는 아무 문제 없이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들. 하지만 나를 위시한 관객들이 그렇게 냉담하였는가 하면 결코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곡이 끝난 직후 KSPO 돔을 가득 채운 사람들로부터 막을 수 없는 환호와 갈채가 쏟아졌고, 지휘자는 혹 망설이는 관객들을 독려하고자 지휘봉으로 박수를 유도한다. 5분간 박수가 쏟아졌고, 충분하다고 생각될 즈음 지휘봉이 수평으로 딱 그어진다. 그리곤 곧바로 앙코르.
서사류 분석과 비평에 엄격한 기준을 지닌 까닭에 연극이나 소설의 후기는 박한 편이지만, 투란도트에 후한 평가를 하는 나를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투란도트의 공연이 끝나고, 돌아오는 길에 나는 그리 무겁지 않은 생각에 깊이 빠졌다. 하지만 여기 어떤 설명을 더 추가하든 간에, 까닭이 아주 단순하리라는 것을 나는 이해하고 있었다. 음악이 너무 아름다웠기 때문이라는 것을. 비록 ‘Vincero’, 저 비범하게 울려 퍼지는 승리의 맥락이 내가 상상하던 것과는 완전히 딴판이었지만, 겨우 남녀 간의 내기에 대한 승리, 따져보자면 단순한 것이었으니, 그럼에도 음악이 멋대로 끌어올린 가슴의 고양감마저 식어버리는 것은 아니었다. 수없이 많이 들었던 노래, 시작을 알리는 반주가 울려 퍼지자마자 가슴이 뛰었다.
공연이 끝나고 지하철역으로 돌아 나오는 길, 동생 놈이랑 신이 나서 떠들어댔다. 유튜브로 엄청 많이 들었는데, 실제로 들으니 다르긴 다르다, 직관의 힘이란 대단한 것이구나, 이런 이야기를 흥에 겨워 나누었다. 막 방금 떠나온 무대를 우리는 함께 되짚어보았다. 300 여 명의 사람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던 모습과 합창, 커다란 무대와 군데군데 자리한 소품들, 투란도트의 소프라노 음색과 네순도르마. 꽤나 거창한 경험이었구나 생각했다. 22시 경, 밤이 더 깊었고 바람은 조금 더 차가워져 있었다. 멋도 모르고 들떠 있는 동생 놈을 바라보며, 데려오길 참 잘했구나 하는 생각을 몰래 하였다. 오늘의 공연일기,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