知者接也 知者謨也 (지자접야 지자모야 : 안 다는 것은 부딪혀서(접해서, 만나서(미주 1)) 아는 것이고, 곰곰이 생각해서(미주 2) 아는 것이다)
知者之所不知 猶睨也 (지자지소부지 유예야 : 그래서, 안다는 자가 모르는 바는 곁눈질하는 것(정면으로 그것을 직시하지 않는 것)과 같다(때문이다))
動以不得已之謂德 (동이부득이지위덕 : 움직이되(감동하되) 부득이한 것으로만(최소한으로) 움직이는 것을 “덕”이라고 한다)
動無非我之謂治 (동무비아지위치 : 움직이되(감동하되) 내가 아닌 것이 없는 것(나다움을 잃지 않는 것)을 “치”(다스림, 다스려짐(=가지런함))라고 한다.)
다스림과 배움
여기서 “治”를 <다스림(=통치)>으로 해석할지 <다스려짐(=가지런히 정돈된 상태)>으로 볼 지, 또는 <배움(=제대로 아는 상태)>로 볼 지에 따라 해석이 달라질 것 같습니다. 사실 治에는 이 모든 뜻이 다 있고, 어느 쪽으로 해석해도 뜻이 통하는 것 같습니다.(미주 3)
어제 수업에서는 우선 통치로서 <다스림>보다는 <가지런히 정돈된 상태>라는 수동의 의미와 <배움>으로 해석하는 과정에서는, 특히 상대를 적극적으로 만나서(接) 아는 것(知)의 중요성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動을 알기 위해 상대를 만나는 것, 또는 만나서(알아서) 감정 또는 인식체계가 움직이는(변화하는) 것으로 해석하니 자연스럽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이 경우 德과 治는 알기 위해 상대를 만나는(대하는) 태도로 해석해주셨습니다. 상대를 만나 최소한으로만 나를 투사(강요)하는 것이 德이고, 새로운 것을 배우는 과정에서도 나다움을 잃지 않는 것이 잘 통제된(治) 배움의 상황이라는 것입니다. 둘 다 적절한 배움의 태도인 것 같습니다.
반면, 저는 도덕경에서 “덕”에 대한 구절을 떠올려서 이 부분을 통치의 태도로 해석해봤습니다. 도덕경에서 “上德無爲 而無以爲 下德爲之 而有以爲 (상덕무위 이무이위 하덕위지 이유이위 : 높은 덕은 굳이 행하지 않을 뿐 아니라 행함에 이유가 없고, 낮은 덕은 뭘 굳이 행하는데, 게다가 그 행함에 이유(=자신의 마음)가 있다)”이라고 이야기 했습니다. 곧, 덕은 아무것도 행하지 않거나, 행하더라도 부득이하게 상대(백성)가 원하는 최소한의 범위에서 아무 이유 없이(=나 없이) 맞춰 주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통치자가 자기의 기준(=나 다움 = 성인의 도덕기준(?))을 잃지 않을 정도로 백성을 대하는 것이 적절한 “다스림의 행위”이다는 뜻으로 해석해봤습니다.
앎과 배움
백성을 <다스리는 것 = 治>을 백성과의 <관계를 가지런히(적절히) 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통치의 대상, 즉 백성으로서 사람이 아니더라도 천지 만물을 만나서 <새로운 존재를 받아들여서 흔들리는 것(動)>과 <그 새로운 존재와 나의 관계를 새로 적절하게 설정하는 것(治)>이 모두 “앎(知)”의 핵심요소입니다. “알다”의 어원을 따져보면 “<얼>이 사물과 상호작용하여(앓다) 얻어지는 것(미주 4)”이랍니다.
사람, 사물, 학문을 만나서 그것이 나에게로 들어오는 것은, 옷감에 색깔이 배어드는 것과 같습니다. 배우는 자가 너무 완고하고 딱딱하면 새로운 것이 배어들어올 수가 없습니다. 저는 걸레나 매직블럭의 작동원리도 이렇게 설명하기도 합니다. 다공질의 부드러운 것과 딱딱한 것이 서로 만나서 여러 번 부딪치면 결국 부드럽고 다공질 쪽으로 (그것이 때이든 뭐든) 뭔가가 다 옮겨간다는 것입니다. 또한 배우되 그것에 너무 흔들려서 배우는 자가 자기를 잃어버리고 가르치는 자만 남으면 배움이 성장이 못됩니다. 그래서 제가 회사에서 예술교육 업무를 담당했을 때, 가르치는 자에서 배우는 자로, 한쪽으로만 흐르지 않는, “서로 배움”을 진정한 교육의 모습으로 설정하기도 했었습니다. 통치자와 백성의 관계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어느 한쪽만 있으면 불행한 상황입니다. 아는 것과 다스리는 것(=관계를 설정하는 것) 이렇게 서로 통하기 때문에, 도덕경과 장자의 글들이 통치론이면서 동시에 우주만물에 대한 존재론과 인식론, 그리고 개인의 수신의 철학으로 두루두루 해석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無非我, 자신 있음
오늘 아침에 아내가 갑자기 “자신 있게~(안다, 말한다...)”라는 말의 위험성을 화두로 던졌습니다. 출근길에서 부터 어제 공부 대목을 고민하고 있었던 저는, 이 말을 듣고는(카톡을 보고는) 머리를 탁 쳤습니다. 배움과 앎이 적절한지 여부는 결국 새로 만나는 상대와의 관계에서 “자신(=나다움) 있음”의 정도가 핵심이었던 것입니다. 분명 “너무” “자신 있는” 것도 문제이고, “자신 없는” 것도 위험한 것입니다. 너무 “자신 있게” 안다고 말하는 것은 결국 눈앞에 있는 상대를 모르는 것입니다. 돌이켜보니 제가 너무 “자신 있게” 상대를 만나서, 즉, 상대와의 관계에서 전혀 변화를 보여주지 않아서, 상대와의 관계가 파국을 맞은 경우가 있었습니다. 저는 너무 견고하게 “자신이 있으니” 그의 새로운 존재가 배어 들어올 틈을 주지 않았던 것입니다. “너무” 動無非我였다고나 할까요.
관계로 맺어진 존재의 보람을 있게 하는, 德...
너무 “자신 있는” 저의 존재 앞에서, 본인이 관계를 맺겠다고 마음을 낸 보람, 즉 본인의 존재의 보람을 못 느끼니, 저를 파괴하고 싶은 마음을 품을 수도 있었을 것 같습니다. 결국 저로서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방식으로, 관계는 파국으로 끝났습니다. 당시는 정말 어이가 없고 화가 났었는데, 이제 와서 보니 제 잘못이 컸다는 것을 깨우칩니다. 장자 공부를 미리 했었으면 관계의 파국을 막을 수 있었을까요?
당시에 저는 그 사람의 역할을 존중하면서 적절한 수준의 관계를 유지하려는, 治에만 노력했지, 德을 내지 않았던 것입니다. 사람이 서로 만나면서도 서로 배워서 영향을 주고받지 못한다면 서로 관계되는 보람을 못 느끼는 것입니다. 내 존재의 보람 없음 만큼 화나는 일은 없을 것 같습니다. 서로 배우는 태도로 관계를 맺어야 관계에서 德이 쌓일 것 같습니다.
사람하고도 관계를 잘 맺지 못하면서, 우주와 관계 맺은 보람을 기대하는 것은 어불성설이겠지요? 우리는 이 세상에 태어나서 우주와 관계를 맺는다고 생각됩니다. 아니, 서로 관계가 있어서 태어났을 수도 있구요. 우주가 나와의 관계에서 자기 존재의 보람을 기대할 리는 만무하지만, 저는 우주와 관계 맺은 저의 존재의 보람이 있기를 기대합니다. 덧없고 허무맹랑할 지라도요. 우주는 아주 티끌 같지만 나의 존재로 인해 아주 조금 움직이고 변화할 겁니다. 저도 우주 세상만사 만물을 만나면 흔들리고, 변화하고, 알아가고, 그래서 또 다른 나로 성장할 것입니다. 저는 德과 治의 중간에서 적절히 “자신 있는” 앎(知)을 지향하려고 합니다. 庚桑楚에서 배운 것처럼 그 관계의 뿌리(本 = 道)를 알면 그것이 가능해질까요? 큰 공부가 필요하겠네요~~. 우주를 생각하기 전에 우선 사회생활을 해야 하니 공부보다는 德!! ^^;
미주 1) 接을 “접해서 안다”로 해석할 수도 있고 “아는 것은 접하는(연결된) 것이다”로 해석해도 “앎”의 본질에 다 부합하는 것 같습니다.
미주 2) 謨의 뜻에는 “꾀다, 계획하다”는 부정적인 뜻 밖에 없는데, 앎과 연결시키기가 참 난감하여 “곰곰이 생각한다”로 해석해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