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베테랑 최대의 굴욕 사건
밤 늦게 도착한 이국적인 도시 이스탄불. 다음 날 아침 부푼 기대를 안고 본격적인 시내 탐사에 나섰다. 부두가 내려다보이는 언덕길을 오를 무렵, 순진하고 앳된 얼굴을 한 대학생 정도의 친구가 어디서 왔냐며 말을 걸어왔다. 한국에서 왔다고 대답은 했지만 반사적으로 뻔한 접근임을 감지하고 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몇 년은 알고지낸 친구마냥 반가운 표정과 함께 자기도 한국을 좋아한다며 계속 따라왔다. 조금은 난감했다. 나란히 걸으며 이것저것 물어오는 그, 그리고 그저 간략히 답하는 나. 언뜻 평온해 보이나 실은 엄청난 물밑 신경전이 벌어지는 상황이었다.
뜬금없이 한국의 대통령이 누구냐고 물어왔다. 갑자기 왠 남의 나라 대통령에 관심을? 아무튼 궁금하다니 말해줬다. 그랬더니 대통령의 얼굴이 궁금하다며 한국의 지폐에는 나오지 않느냐고 묻는 것이었다. 현직 대통령의 얼굴이 왜 지폐에 나오냐고 했더니 그럼 누가 있냐고 묻는다.
아, 정말 끈질겼다. 웬만하면 무시하고 가겠는데, 저 순진한 얼굴은 정말 순수한 마음에 이러는 것이라는 쪽에 확신을 주기에 충분했다. 평소의 나답지 않게 귀찮지만 친히 한국 지폐를 보여주기로 했다.
지갑을 꺼내어 몇 장 있는 지폐를 보여주려는 순간, "이게 한국돈이냐?" 며 지폐 몇 장을 쑥 꺼내든다. 화들짝 놀란 나는 이게 뭐하는 짓이냐며 돈을 잽싸게 낚아채어 지갑에 다시 넣었다. ‘아, 역시나…’ 그래도 다행이다 생각하며 뒤도 안돌아보고 가던 길을 재촉했다.
그렇게 반나절을 보내고 오후 늦게 숙소로 돌아온 나는 지갑을 꺼내 비용정산을 하다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약 20달러 정도의 행방이 묘연했던 것! 순간 떠오르는 아침의 그 '순진한 얼굴'. 그렇지만, 내가 빤히 보던 그 짧은 시간에 돈을 채갔을 수는 없었을텐데... 그리고 분명 내가 즉시 '수습'을 했는데 말이다.
생각할수록 아리송했다. 자타공인 여행 베테랑이 치욕스럽게도 '소매치기'를 당했단말인가. ‘아니야 그럴리가…’ 어딘가에 돈을 쓰고 기억을 못하는 것일 수도, 아님 처음부터 총액을 잘못 알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저렇게 스스로를 위로해 보았다.
그러나, 아... 왠지 그의 얼굴이 자꾸만 아른거린다.
이스탄불에서는 유난히 이런 식으로 접근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심지어 일반 승용차를 탄 사람이 경찰이라며 잠깐 서 보라는 수법까지 있었다. 물론 한 번 웃어 주면서 무시하고 걷는 것이 최고의 방법이다.
해외에서 친한 척하며 다가오는 사람들... 왠지 분위기를 민망하게 하는 것 같기도 하고 매정한 것 같아 뿌리치기 쉽지 않다. 특히, 해외 경험이 적은 여행자일수록 그런 경향이 있는데, 전혀 그렇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
반대로, 우리가 외국인들에게 과연 그런 행동을 할까 생각해보라. 그들의 수법이 얼마나 뻔한지를 깨달을 수 있다. 뭐든 상식선에서 생각하면 된다. 또 하나, 단호하지 않으면 오히려 우습게 보여 당한다는 사실!
* 여행 에피소드 시리즈는 여행매거진 '트래비'와 일본 소학관의 웹진 '@DIME'에서 연재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