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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uie Coree Jun 04. 2021

꿈을 닮아가는 것에 관하여

그리고 꿈에 관하여

  꿈은 크게 가지라고들 하는데, 크기라는 건 그걸 잴 만한 단위를 상정할 때에나 할 수 있는 생각이다. 게다가 그 크고 작음을 가린다는 게, 외부적 혹은 객관적 잣대와 비교 대상이 있어야만 알 수 있는 것 아닌가. 객관적인 꿈을 꾸다니, 그리고 꿈과 행복을 객관적으로 평하거나 비교하다니, 그것만큼 서로의 인생이 답답해지는 게 있나. 소박한 꿈이라든가 원대한 꿈이라든가, 나도 쓰는 말이기는 하지만, 그런 표현에 얽매일 필요는 없다. 천하의 스티브 잡스도 암으로 일찍 떠나 버렸고 평생 단란한 모습을 보여줄 것 같던 빌 게이츠도 이혼했는 걸(일론 머스크는 어쩌면 무병장수하다가 화성인과 열 번째 결혼식을 할지도). 그걸 다시 뒤집는 예도 있다. 어느 전도유망한 통계학 교수님은 수업 중에 "암 환자분들께는 정말 죄송한 말이지만, 저는 위암으로 죽고 싶어요(대장암이랬던가). 절대 교통사고 같은 걸로 급작스럽게는 말고요. 남은 생을 가늠하며 천천히 정리할 기회를 꼭 갖고 싶습니다."라며 덤덤한 어조로 학생들을 벙지게 만들었고, 젊은 날 많은 돈을 벌기도 했던 어느 중년은 재산을 다 날리고 빚더미를 혼자 껴안은 채 이혼한 후에 감개무량한 표정으로 말했다. "드디어 해냈어! 내 인생에서 가장 큰 성공이 이혼한 거야."


  내 꿈은 크지도 작지도 그 중간도 아니었다. 언제나 현재의 상황과 좀 더 멀거나 가깝거나였을 뿐. 하지만 가깝다고 자만할 수도, 너무 멀어 보인다고 무조건 포기할 수도 없다. 닿을 듯하면 멀어지기를 반복하는가 하면, 예상치 못한 순간에 시공간을 휘어 놓은 듯한 지름길(웜홀!)이 나타나기도 하니까. 그러나 그 꿈들에 크기를 어떻게 부여할 수 있는지, 혹은 그럴 필요가 있는지, 그건 잘 모르겠다.  



  몇 해 전. 우연한 계기로 이런저런 얘기를 할 기회가 있었던 어느 서른 즈음의 직장인 청년에게 "넌 꿈이 뭐야?"라고 질문했을 때 그가 답했다.

  "그냥 뭐... 돈 많이 벌어서 해외여행도 막 다니고- 골프도 치고- ...그런 거지." 턱. 순간 말문이 막혔다. 혹 신종 농담인가 싶어 반 템포 반응을 늦추며 씩 웃어만 보였다. 아, 필터링 없이 나온 진심인가. 

  좀 더 친했다면 '으이구- 계란 한 판 채운다는 녀석이... 야!' 하는 소리를 참지 못하고 핀잔을 줬을지도 모르겠지만, 애써 생각을 바꿨다. 그 꿈이 뭐 어때서. 그래서 말했다. "요즘은 비행기 표도 싸고 백팩커스 같은 데 이용하면 가까운 데는 해외여행도 돈 그렇게 많이 안 들어. 골프가 하고 싶으면 스크린 골프나 연습장도 있지. 지금도 할 수 있어. 정말로 하고 싶으면, 할 수 있는 것부터 하면 되잖아." 이번엔 그의 말문이 막혔다. 

  물론 그가 무슨 뜻으로 한 말인지는 안다. 골프에 특별히 관심이 있는 것 같지도 않았고, 가 보고 싶은 외국이 어디고 왜 가고 싶은지는 구체적으로 생각해 보지도 않은 것 같았으니까. 내가 무슨 뜻으로 답한 건진 모르겠다는 눈치였는데, 코로나 때문에 그것조차 어려워진 지금은 이해하려나. 아니, 내 말을 아예 까먹었을 가능성이 더 클지도. 

  몇 번인가 함께 식사하며 얘기할 기회가 있었지만 그는 내가 옛날 해외에서 지냈던 걸 전혀 알지 못했다(지금은 방콕 은둔생활 무한렙업 중인 것도 모르겠지만). 일부러 숨긴 게 아니라, 딱히 그 얘기들을 꺼낼 필요가 없는 질문만 그가 던졌기 때문에 공연히 말하지 않은 것뿐이었다. 알 필요도 없을 것 같았고, 굳이 즐겁고 찌질하게 사서 개고생했던 과거 이야기를 자랑스레 할 필요 역시 못 느꼈던 까닭이기도 했다. 어떻게 얘기해도 결국엔 실제보다 미화되어 받아들여질 테고.


  그는 지금쯤 꿈에 더 가까워졌을까. 그거야말로 백일몽 아니었을까 싶지만, 이뤘다고 가정했을 때- 선망받지 않고도 과연 행복할까. 아마 필터링을 하지 않은 게 아니었을 것이다. '그냥...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관심/인정받는 거... 그런 거지.'라는 순수한 마음이었을지도 모르고, 동경의 대상이 되어 적당히 과시하고 우월감을 음미함으로써 열등감을 해소하거나 지나간 연인이나 자길 무시했을지도 모르는 친구에게 보란 듯이 호쾌하게 웃어주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 정도라면 이루어지는 것도 괜찮을 것이다.

  다만, 그런 종류의 꿈은 달성하는 순간 바이러스처럼 새로운 숙주를 찾아 끈질기게 퍼진다. 덕행을 칭송받는 걸 보고 선행이 확산되는 경우는 좋겠지만, 그럴 때조차 일어나는 악성 돌연변이는 정말로 골치 아프다. 놀부가 제비 다리 부러뜨린 것만 봐도 유서 깊지 않은가. 흥부가 SNS를 했다면 얼마나 많은 놀부가 탄생했을지, 소름 돋는다. 흥부들을 못 만난 제비가 고생하는 건 안타깝더라도 자연의 법칙이 될 뿐이지만, 놀부들의 경우는 범죄가 되기 때문이다. 놀부는 또 놀부대로 제 꾀에 당한 얘기를 그대로 하겠는가. '놀부, 박 타다가... 충격!' 같은 기사나 뜨겠지. 거기다 자본주의 사회와는 공생관계이기까지 한 그 바이러스 같은 꿈들은 각종 온오프라인 매체를 통해서 길이길이 살아남아 사람들을 끝없이 들볶지 않을까. 아마 코로나를 흑사병처럼 역사로만 배우는 시대가 올 때까지도.

  덤으로 그런 생각도 해 본다. 실은 그에게도 자신만의 꿈이 있었는데, 너무 소중해서 행여나 말하는 것만으로도 깨질까 봐, 또는 그냥 쑥스러워서 말하지 않았던 건지도 모른다고.



  어쨌든, 꿈이 이루어지는 포인트를 잘 잡아야 한다. 바라던 딱 그대로 뿅 하고 변하는 게 아니라, 닮아간다고 했다. 형태에 얽매이면 놓치기 쉽다. 바라는 것을 본질적으로는 이미 실현했거나 더 좋은 것을 얻고도 혹은 바로 옆에 두고도 형식에 얽매여 눈치채지 못하는 경우가 세상엔 얼마나 많은지. 나 역시 뒤늦게 깨닫고 탄성을 지른 적도 많다.

  특정한 형태와 형식의 껍데기를 꿈꾸는 경우라면 잘 모르겠다. 내 경우엔 딱 스케치했던 그대로 그려진 것들도 있기는 하지만, 허를 찌르며 웃기게 이뤄진 것들이 더 많으니까. 그래서 오히려 재밌었다. 우리의 머릿속보다 세상은 언제나 더 많은 가능성을 품고 있기에 삶이라는 캔버스는 더 흥미진진해지는 것이다. 캔버스의 진짜 크기조차 알 수 없다. 머릿속에 짜 놓은 틀과 스케치 그대로만 그려지기를 고집하는 꿈이라면, 음... 어쨌든 노력하면 가능성은 올라가지 않을까요, 운이 좋으면 별 노력 없이 지름길이 나타날지도 모르고요. 화이팅- 정도밖에는 할 말이 없고... 

  그런데 나는 기분 탓인진 몰라도 성취한 것, 특히 성취되기 직전의 것에 대해 이야기하고 나서 망했던(?) 경우가 있는 편이라, 괜한 얘길 하기가 조심스럽기도 하다. 이미 종지부를 찍은 일은 부질없는 것이며 아직 얻지 못한 것은 아무리 가까이 있어도 내 것이 아닐진대, 괜한 입을 놀려서 앞으로 얻을 것이나 겨우 얻은 것을 잃는다면 얼마나 허무하겠는가. ...공든 탑도 무너질 수 있음을 이제는 잘 알고 있으니.(게다가 나는 '기대'라는 것이 무거워 갑갑해지면 숨통을 트기 위해 다름 아닌 내 손으로 허무는 본능마저 있는 것 같다. 그 기대가 자신의 것일 때조차.)

  어찌 보면 삶의 길에서 내려놓은 꿈이 더 많을지도 모른다. 대부분 억지로 포기하기보다는 자연히 더 이상 바라지 않게 되거나 기꺼이 내려놓고 싶어지는 상황이 될 때까지 품고 있었을 뿐이지만 말이다. 오롯이 내가 택한 결과로서가 아니라 다른 이의 작용으로 말미암아 내려놓기로 한 것들은 표면상 스스로 내려놓으면서도, 솔직히 원망이 될 때도 있었다. 그런가 하면, 바란 대로 됐지만 '내가 왜 이걸 원했을까' 하고 지난 어리석음을 탓한 일들도 있다. (류시화 시인이 엮은 시집 중에 툭하면 떠오르는 게 있다.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하지만 돌고 돌아 그 지난 꿈들이 삭아든 잔해는 분명 또 다른 소망들에 양분이 되어 줬음을 깨닫곤 한다. 단 하나의 절대적인 바람 같은 건 그다지 가져 본 적이 없기 때문인지도 모르나(변함없이 바라는 건 그저 나와 내 소중한 이들의 심신이 충분히 건강하길 기도하는 종류겠다. 그조차 현실은 종합병원이지만, 악화되지 않은 것만으로도, 낭떠러지에서 마지막 한 발이 미끄러지지 않은 것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한 일도 있는 것이다), 끝없이 꿈꾸는 한은 그것이 가능하다. 살아 있는 동안은. 꿈은 살아 있는 자만이 꿀 수 있으며, 살아 있는 자는 누구나 꿀 수 있다. 

  다만, 그전에 하나만 스스로에게 물어보자. 나는 살아 있는가?

 




https://www.youtube.com/watch?v=6Ejga4kJUts

1993년 영국 워링턴에서 발생한 폭격 후, 저항 정신으로 1994년 발표된 곡.

When the violence causes silence 

We must be mistaken


What's in your head-



  생각해 보면, 좀비 같은 꿈을 꾸게 되는 사람들이 고질적으로 안게 되는 문제 중 하나는 이거였다. 폭력이 뭔지 (가해자는) 모르기도 한다는 것( 심지어 때로는 피해자조차도). 폭력의 종류가 진화하기도 하고 말이다. 그래서 누군가 깨닫기 전에는 침묵하고 있다는 자각조차 없는 mistake도 있을 것 같다. 반면, 원래는 아무렇지 않을 수 있는 일이라도 과민해진 사람들에겐 스치기만 해도 상처나 자극이 되는 경우 또한 있을 수 있겠지. ...쉬운 게 없다.


표지:미드 <The Good Wife>의 한 장면 (초고를 쓴 지 좀 오래돼서 그런가, 사진 링크를 클릭하니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은 페이지로 뜬다. 검색하면 여전히 썸네일은 보이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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