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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uie Coree Mar 12. 2023

연설 깡패

230823

  2년 전 여름, 옛 학교 선배가 "이거, 왠지 네가 재밌어할 것 같다. 실은 재밌어 보여서 샀는데, 읽다 보니 전에 이미 읽은 거더라고."라며 넘기셨던 책이 있다.


   「ヒトラー演説히틀러 연설 ~熱狂の真実열광의 진실~」


  띠지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25년간 150만 단어의 연설 데이터를 통해 선동 정치가의 실상에 다가간다. 무엇이 사람들을 열광시켰는가.'


  어떤 점을 두고 내가 이걸 재밌어할 것 같다고 하셨는지(심리학적으로 고찰할 게 많아서인가), 혹 본인 책만 주시기 쑥스러워 끼워 주신 건지, 아니면 내용 중 특정 부분을 전하고 싶으셨던 건지- 궁금하다. 상냥하며 겸손한 사람들은 종종 달을 보라고 손으로 가리키면서도 티 내지 않고 '이 손 좀 봐'라고 하니까. 

  재밌어 보여서 산 책이 어떻게 이미 재밌게 읽은 책일 수가 있냐며 핀잔을 드렸지만(다독의 부작용인가?), 그건 내가 책 선물을 부담스러워하지 않도록 배려로 하신 말이었나 싶기도 하다. 십수 년 만에 만났는데도 까마득한 후배들 이름을 어제 일처럼 기억하고 계셨으니. 나는 까먹고 있었던 내 동기 이름까지도.

  



  히틀러 연설의 특징 중 하나가 '만약 A라고 한다면' + 'B. 하지만 C' / '그것은 B가 아니라 C'와 같은 형태의 표현이 빈번히 사용되는 것이라고 한다. 즉 '자신의 주장에 유리한 독단적 가정(A)'(세뇌성 전제) + '부정을 사용한 대비(B but C / not B but C)(절묘한 궤변)'으로써 변술을 의도에 맞추고, 청중이 원하는 극적/추상적이되 간명한 슬로건이나 비유로 결론을 도출하여 단호하고 강렬하게 전하는 것이다. 집권 전 나치 운동기 후반에 특히 집중적으로 애용한 화법.

  연설 중에는 예언자적, 종교적 분위기까지 덮어씌운 흔적도 있다. (추가 정보에 의하면 히틀러 성경까지 만들었던 모양이고,) 스스로 메시아 같은 분위기를 풍기고자 용을 썼다고 하니, 그런 의미에서는 ㅁ 씨, ㅇ 씨x2, ㅈ 씨 등의 선배님 되시겠다. 그나저나 한국인 재림 예수가 뭐 이리 많나. 단위 인구당 메시아 수 통계를 내면 가관이겠네.

  

  광기인지 코미디인지 모를 카리스마 같은 건 아마 히틀러의 말투, 외모, 몸짓, 태도 등이 통합적으로 어우러진 결과였을 테고, 분리수거도 안 되는 히틀러 따위를 진지하게 흉내 낼 생각은 없지만, 일반 대중을 대상으로 한 '말의 힘'이라는 측면에서만 본다면 인상을 심는 데에는 효과적인 듯.



  그의 스킬을 응용한 글을 포함해서 초고를 썼다가 대부분 생략했다. 멋진 패러디를 하나 발견했기 때문인데, 이쪽을 소개하는 게 낫겠다. 


(원래는 여기서도 재생이 됐는데 언제부턴가 유튜브 페이지에서만 볼 수 있게 막아놨네요.)

https://www.youtube.com/watch?v=w8HdOHrc3OQ&t=243s


  찰리 채플린의 이 연설은 현대에도 여실히 통한다는 칭찬 일색. 동의한다. 히틀러가 아직 권력자로 살아 있을 때 이런 풍자를 할 수 있었던 용기에도 박수, 짝짝짝.

  다만 We think too much, feel too little이란 표현은 살짝 오해의 소지가 있다. 채플린으로서는 사람들이 자기 잘 살 궁리만 하느라 타인의 아픔을 느끼지 못하고 더불어 사는 감각을 잃어가는 것이 안타까워서 던진 말이겠으나... 프로파간다적 여론이나 대세, 슬로건, 광고, 피싱 등에 대책 없이 휩쓸리거나 부화뇌동으로 열광하고 분노하는 감각을 순순히 자신의 것이라 여기는 건, 느낌이 주는 보상을 쫓아 생각하기 때문이다. 히틀러에게 물들어간 인비인들도 처음엔 그냥 왠지 삶이 좀 억울한 순진하고 생각 없는 국뽕들에 불과했을지 모른다. 쉽게 감화되고 무분별하게 동화되던 시절은 내게도 분명 있었다. 그들이 근본적으로 나보다 저능하거나 사악했어야 할 이유가 없으니, 나도 만약 같은 입장일 때 그랬을 수 있다고 생각해 보면 끔찍하다. 그중엔 누구 못잖게 선하고 유능해 보이는 이도 있었을 거라고 생각하면 개탄스럽다. 해나 아렌트가 말한 '악의 평범성'이 그런 뜻이겠으나, 정신적 리더들의 영향으로 형성되는 아비투스라든가 교육 부재, 편향적 교육과 같은 요소들에 따라서도 차이가 크지 않을까 싶다.

(p.227~228에 이 연설에 대해서도 언급이 있다.)



  참고로 포즈나 표정이 우스꽝스럽기는 히틀러가 더한 것 같다.

p.56. (우측 사진) 이런 엽서 세트를 팔았다니, 그냥 코미디언을 했다면 인류사에 여러 모로 도움 됐을 텐데.






  그런데

  당시 독일은 시대적 상황을 감안하더라도 선거가 너무 잦았던 것 아닌가 싶다. 1932년 한 해 동안만 해도 히틀러는 2월부터 11월까지 무려 다섯 번이나 선거전을 치렀다(p.96). 과반수 득표자가 없어서 무효되고 재선거를 한다든가, 재임 기간이 얼마 되지도 않은 수상을 대통령이 해임시켜서 재선거를 한다든가. 뭔 투표만 하다 볼 일 다 봤겠다.


  아무튼 타고난 '말발'로 일약 스타덤에 올라 승승장구해서 끝내 최정상 권력까지 장악한 히틀러. 핥아 놓은 개죽사발 같은 자기 머리털만큼이나 번지르르한 언변으로 칼자루를 쥐어 놓고도, 실질적으로 국민의 삶을 향상시키지는 못했다. 꿈은 이루기 전의 과정이 더 치열한 법이던가. 아돌프 히틀러가 사람들에게 가장 열렬한 반응을 얻었던 건 정작 총통이 된 후보다는 집권 전 나치 운동기 때였다. 적당히 일궈 놓고 박수 칠 때 떠나는 타이밍도 놓쳤다. '나는야 평화의 수호자, 독일을 위해 이 한 몸 바칠 준비가 되어 있는 나님을 믿어 주시오' 할 땐 언제고, 전쟁을 원치 않는 사람들까지 구슬리고 세뇌시켜 가며 정복과 확장을 꿈꾸는 야욕을 드러냈다. 유대인을 공공의 적으로 조작해서 집단 마녀사냥을 하고, 주변국을 요리조리 찔러 부지런히 전쟁 시비를 걸어대면서.


  고장난 향상심이 성층권을 찔렀던 본인 생각에는 아직 '정상頂上'이 아니었나 보다. 실상은 正常이 아니었던 것이고.


  선동에 취하지 않고 냉철히 직시하는 사람들은 점차 회의를 느꼈다. 생각 없이 휩쓸리던 사람들도 상황 개선 없이 생고생은 계속되고 독일군도 죽어 나가니 반신반의하기 시작했다. 잃어가는 민심을 대체 어쩌려던 것인지, 폭격 피해를 입은 곳에 총통의 방문은커녕 위로도 없었다. (홍수로 사람들 죽어나갔을 때 일언반구 없이 만개 웃음으로 장어랑 물장구나 치던 분이 떠오르는 건 나뿐인가...) 불거지는 불만에도 아랑곳없이 '머잖아 승리는 우리의 것'이라는 반복만 하는 레퍼토리에, 열렬 신봉자들 외에는 국민들도 대체로 지긋지긋해졌던 모양.

  하지만 초반의 승리와 외교적 으름장으로 주변국 거저먹기 등 한동안 뜻대로 됐던 탓인지, 막장으로 치달을수록 형세가 아무리 불리해져도 히틀러는 인정하려 하지 않았고, 가증스러운 작태는 외려 심화됐다. 그 와중에 총통 연설 참석/라디오 청취를 필수라고 하도 강요해서 마지못해 참석하여 박수도 안 쳐주고 연설은 듣는 둥 마는 둥 한 20만 청중을 '50만 청중이 열광했다'고 발표하는 식의 뻥튀기 선전, 자신과 독일은 절대적으로 선이며 그에 적대하거나 방해하는 이들은 무조건 악의 무리인 것 같은 유치 찬란한 파시즘으로 왜곡된 인식 퍼뜨리기, 어제는 등한시하던 곳을 오늘 연설에서는 중요시하는 식의 종잡을 수 없는 모순... 책장을 넘길수록 소설 <1984>의 모티프가 만연히 드러났다.


  아니 대체, 대중을 얼마나 단순무식하게 봤기에?라고 생각할 수도 있으나, 히틀러가 '연설자'로서 취한 양날검 중 하나가 바로 '청중에서 가장 머리가 나쁜 사람 또는 어린 아이도 이해할 수 있게 말하기'였다. 처음엔 그래도 연설문을 교묘히 구성하는 편이었지만 청중을 잃어갈수록 상황에 안 맞는 세뇌성 궤변으로 최면 걸듯 우기는 게 겨우였고, 10살 아이가 연설의 오류를 일기장에 쓸 정도로 내용이 허술해져 갔으며, 슬로건도 바닥나고 있었다. 종횡무진하던 시절의 버릇만 남아서 뻔뻔한 욕망과 망상으로 예언이랍시고 무리한 호언장담을 밀고 나가다가 결국 자업자득 막다른 길로 들어 자멸했다. 직진밖에 할 줄 모르는 멧돼지처럼. 그 끈질긴 목숨 하나 때문에 전 세계가 죽도록 앓았는데, (어릴 때 물에 빠져 죽을 뻔한 걸 어느 신부님이 건져 놓은 것도 모자라) 반대 세력이 암살을 계획할 때마다 신기할 만큼 운 좋게 쏙쏙 잘만 피해가더니, 실컷 저질러 놓기만 하고 수습은 감당이 안 되니까 나 몰라라 비겁하게 자살로 끝.


  빅 브라더는 이데올로기의 인격화라 실체가 아예 없지만, 히틀러는 오염된 인격으로 자기 실체의 한계를 인정하지 못했던 탓일까. 그것도 뜬구름 위에 그린 캐릭터를 메소드 연기하면 뇌피셜 시나리오대로 세상이 흘러가 줄 거라는 막연한 확신에 차서. 오랫동안 꿈만 꾸다가 그림자를 닮아간 사람이 여기 있었군.



 *원수(元帥)였던 에리히 폰 만슈타인Erich von Manstein과 관해 p.252에 나온 비화가 웃프다. 히틀러가 전쟁의 계속된 열세로 신경이 쇠약해져 슬슬 수명이 다 되어갈 즈음, 1944년 1월 27일. 사령부에서 최고지휘관들을 목전에 두고 히틀러가 영웅적 충성심에 대해 연설할 때였다. "내게 만일 최후의 순간이 찾아왔을 때, 최고지도자인 내게서 사람들이 떠나가는 일이 일어나도 틀림없이 그대들만은 모두 검을 빼들고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내 곁에 남아 있어 줄 것이오." 라고 말하자,

  그렇잖아도 스탈린그라드에서의 전투 작전에 히틀러가 자꾸 딴지를 걸며 간섭해서 심기가 불편했던 만슈타인이 말을 자르며 대꾸했다고 한다. "각하, 실제로 최후가 오겠지 말입니다."







*이 책은 당시의 사회적 배경이나 국제 정황에 대해서도 다분히 언급되지만, 나치 운동기 전/후반, 집권기 전/후반으로 시기를 나누어 히틀러 연설에서 특별히 자주 언급되는 단어들을 분석하고 언설을 톺아보는 게 주요 골자다.

e.g.) '평화Frieden'를 특별히 많이 언급하는 것은 집권기 전반 1935-36년으로, 이후 줄었다가 후반기 1939.9~12월, 폴란드를 침공한 시기에 부쩍 다시 '평화'를 들먹인다. 평화를 위한 전쟁이라는 프로파간다가 필요해서다(p.190).




  에필로그에서 인상적인 말들.

- 라디오를 열심히 보급해서 총통의 연설을 청취하도록 강제 의무화했다가 반감만 사고, 국민들은 오히려 라디오로 외국 방송을 몰래 수신하면서 나치의 거짓 정보와 국제 정세를 파악했다는 점에서, 라디오 매체가 '트로이 목마'가 됐다는 저자의 비유가 절묘하다.

- 사람들에게 '빵'을 주는 것이 아니라 부풀린 '빵의 꿈(=뻥)'으로 현혹하는 정치가들에게 속지 않도록 깨어 있어야 한다는 말에도 동의한다.




 



참고. 재밌는 영상 자료.


https://www.youtube.com/watch?v=mUFuHflt19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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