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이 사라지고 있다. 한 번에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아주 조용히, 우리가 눈치채지 못하는 속도로.
예전에는 대학을 졸업하면 회사에 취업했다. 그 취업이라는 단어 안에는 안정이 들어 있었다. 월급이 들어오고, 4대 보험이 적용되고, 명함 한 장이 그 사람의 사회적 위치를 말해줬다.
지금은 다르다. 서비스직, 플랫폼 노동, 시간제 근무. 숫자상 일자리는 줄지 않았다. 하지만 그 일자리들의 성격이 바뀌었다. 배달 기사는 스스로 단가를 협상하지 않는다. 플랫폼이 결정하면 따를 뿐이다. 최저임금 근처에서 맴도는 소득. 언제 끊길지 모르는 계약. 이것이 지금 노동이 사라지는 방식이다.
어머니의 첫 투자
나의 어머니는 90이 가깝다. 평생을 투자라는 것을 모르고 사신 분이다. 주변에서 누가 어떻게 돈을 벌었다는 이야기는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으셨지만, 직접 실행하지는 않으셨다. 내가 투자를 시작할 때도 어머니는 만류하는 쪽이셨다.
시간이 지났다. 내가 수익을 내고, 책을 쓰고, 신문에 글을 실었다. 어느 날 어머니가 말씀하셨다. '나도 한번 해보고 싶다.'
나는 처음에 거절했다. 장기투자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니까. 하지만 생각이 바뀌었다. 어머니에게 투자의 즐거움을 알려드리고 싶었다. 어머니의 자본을 내 계좌에서 운용하는 방식으로 대리 투자를 시작했다. 이틀 뒤, 10%의 수익이 났다. 전화를 드렸더니 너무 좋아하셨다.
그 순간이 언제인가.
통장에 수익이 찍히는 순간이 아니다. 어머니가 '해보고 싶다'라고 말하는 순간이다. 그 결심의 순간, 시간이 자산으로 전환되기 시작한다. 탐욕이든, 확신이든, 호기심이든 — 계기는 달라도 출발점은 같다. 결심하는 그 순간이다.
아들이 보는 아버지
나의 아들은 내가 글을 쓰고 연구를 해도 그저 평범한 동네 아저씨로 본다. 오히려 길 건너 양복을 빳빳하게 차려입은 직장인이 더 멋져 보일 수 있다. 아들과 이야기하다 보면 마음의 여유가 없다는 것이 느껴진다. 오늘 당장 처리해야 할 일, 해소되지 않은 걱정들. 거기에 더해 투자 이야기까지 들으면 버겁다.
'이것만 해결하고…'라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그 이것은 절대로 끝나지 않는다.
나는 30대 초반, IMF 이후 실직했다. 하루를 벌어 이삼일을 먹었다. 비관도 하고 좌절도 했다. 하지만 어떻게 이 상황을 벗어날 수 있을까, 막연하게나마 생각을 멈추지 않았다. 그때 나는 주변에서 가장 가난한 사람이었다. 친구들보다도, 이웃보다도.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 자산의 상승 속도만큼은 그들을 앞질렀다.
부작용도 있었다. 지인들이 하나둘 떠나갔다. 나중에 깨달았다. 그들에게 나는 자신의 위치를 확인하는 기준점이었다. 내가 그 기준 아래에 있을 때는 함께였지만, 위로 올라가자 나는 불편한 사람이 된 것이다.
씨앗이 없는 사람은 어디서 시작하는가
시드타임이 자본을 심는 것이라면, 자본이 없는 사람은 시작조차 할 수 없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씨앗은 돈이 아니다. 시간과 방향이 씨앗이다.
지금 내가 하는 일을 보라. 책을 쓰고, 신문에 기고하고, 브런치에 글을 올리고, 강연을 준비한다. 모두 무료다. 책도 내 돈으로 사서 지인들에게 선물한다. 당장의 수익은 없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시드타임이다. 나의 시간으로 씨앗을 심는 것이다.
무명의 재야 경제 연구자가 언젠가 사람들이 찾는 사람이 되기 위해, 지금 이 자리에서 할 수 있는 것을 하나씩 심고 있다. 이것이 시드타임이다.
시드타임은 투자 방법이 아니다. 삶의 방식이다.
그래서 당신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하루 5분이라도 좋다. 지금 나의 상황을 어떻게 바꿀 수 있을지 생각하라. 거창한 투자 계획이 아니어도 된다. 책 한 페이지, 유튜브 영상 하나, 누군가와 나누는 짧은 대화. 그것이 씨앗이다.
결심하는 순간 이미 시드타임은 시작된다. 통장 잔고가 바뀌기 전에, 삶의 구조가 먼저 바뀐다.
노동이 사라지는 시대에, 살아남는 방식은 더 열심히 일하는 것이 아니다. 지금의 시간을 어디에 심을 것인지 선택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