돼지꿈을 꾸었다.
미지에서 방황하고 노력한 지금에 감사하고, 지금을 애틋해 할 날이 올 거다. 강의실에서의 나도, 대학 교정에서의 나도. 잠깐이었지만 영어 학원에서의 나도, 그 모든 서성이던 발걸음이 짠해질 때가 있다. 그 걸음이 이어져 오늘에 이르고, 내일로 향할 테니 말이다. 심지어 병원에서의 발걸음도 언젠가 나의 보물이 될 것이다.
-2012년 2월 28일
2012년 2월 말의 나는 내가 미지에서 방황하고 노력하고 있다고 느낀 모양이다. 그럴 만도 하다. 지금은 번역이라는 한 우물을 판 지 어느덧 10년이 성큼 넘었지만 내게는 엄마에게 ‘3개월짜리’라고 불리던 시절이 있었다. 학원 강사도, 중국 어학연수도, 다른 이것저것도 3개월을 버티지 못했기 때문에 붙은 별명이었다.
2012년이라면 이미 번역에 발을 들여놓은 후였지만 계속 불안했던 것 같다. 기술번역 일만 했고 언제, 어느 만큼 일이 들어올지가 심하게 불투명했기 때문이다. 미지의 방황이라는 말도 괜히 나온 말만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미래를 향한 희망을 놓지 않았다. 지금에 감사하고, 서성이던 발걸음이 보물이 될 것이라고 믿었다니....... 모닝페이지를 다시 읽으면서 ‘아니, 내가 이런 생각을 했단 말이야? 제법 기특한걸?’이라고 느낄 때가 있는데 바로 이와 같은 구절을 만날 때다.
방황하던 발걸음과 그 발걸음을 애틋해하는 마음이 정말 꽃이라도 피웠는지 2012년 3월 3일 나는 돼지꿈을 꾸었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꾸어본 돼지꿈의 감흥에 젖어 얼마 후 모닝페이지에 이런 글을 적기도 했다.
돼지꿈이 좋은 징조였음 싶다. 안정되고 싶다는 생각. 그냥 안정이 아니라 실은 잘 되고 싶다는 생각. 잘 되어가는 과정 속에서도 그걸 지키는 게 쉽지 않다는 걸 이제는 알지만 그래도 할 수 있고, 하고 싶고, 하게 된다는 믿음.
-2012년 3월 11일
그리고 내게 잘 되어가는 징조가, 발전과 성장의 기회가 찾아왔다. 그것도 두 군데서나. 첫 번째는 2009년에 발을 들여놓았던 번역 아카데미의 후속 과정을 듣게 된 것이다. 이 아카데미는 워낙 합격하기 어려운 곳이고, 나도 처음 정규과정을 들은 이후 2년 연속 떨어졌다.
당시만 해도 한국문학을 영어로 옮기겠다는 나의 포부는 꽤 컸다. 다시 공부할 기회를 얻어 기쁘고 설레는 맘이었다. 물론 막상 들어가서 공부할 때는 고생을 했지만 ‘잘 되어가는 과정속에서도 그걸 지켜가는 게 쉽지 않다는 걸’ 모닝페이지 속의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두 번째는 출판번역 에이전시에 들어간 것이다. 이로써 나는 애매한 백수나 아르바이트생에서 정식 번역가의 길에 한 걸음 다가섰다. 두 가지 다 3월에 결과가 나왔다. 그로부터 3개월여가 지난 후, 나는 모닝페이지에 이렇게 쓴다.
작년의 목표였던 ‘가시적인 변화 혹은 성과’ 에 가까워지고 있다.
-2012년 6월 19일
왜 나는 작년(2011)의 목표에 가시적인, 즉 ‘눈으로 볼 수 있는’이라는 단어를 넣었을까? 발이 땅에 닿지 않는 듯이 불안하고 막막했기 때문일 것이다. 손으로 잡을 수 있을 것처럼 구체적이고 뚜렷한 변화를 원했던 것 같다.
출판번역을 시작하면서 나는 실제로 눈으로 보고 손으로 잡을 성과 혹은 결과물을 접하게 되었다. 일을 마치고 나면 매번 책이 나오기 때문이다. 그렇게 반백수에 번역 알바 같은 시기를 거쳐 (때로는 한구석일지라도) 대형 서점의 서가에 꽂히는 결과물을 꾸준히 내는 번역가가 되었다.
출판 번역가가 되었다고 만족스러운 생활을 하게 되었을까? 그렇지만은 않다. 어떤 일(책)이 언제 들어올지는 여전히 불투명하다. ‘일할 때는 몸이 축나고, 일이 없을 때는 마음이 힘들다’고 느끼기도 한다. 그럴 때는 처음의 마음을 되돌아보면 좋겠다. 미지의 방황 속에서 돼지꿈을 꾸고 책이 나오면 부랴부랴 서점으로 달려가던 시절을.
2012년의 글을 보며 한 가지 더 배운다. 요사이 번역가로서 쳇바퀴를 돌며 정체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며 불안해하곤 했다. 오늘의 방황과 노력을 다시 한번 믿어본다. 지금의 고민과 모색이 보물이 되어줄 것이라 기대도 해본다. 언젠가는 2023년의 ‘지금에 감사하고, 지금을 그리워할 날’이 오겠지.
가장 잔인한 달이라는 제목의, 가장 아름다운 표지. 세번째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