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도 더 된 일입니다.
똥이 온 사방에 흩뿌려져 있고, 그 악취 나는 풍경 한가운데에 친할머니가 있습니다. 20년 전쯤 작별할 땐 분명 좀 더 힘없고 거칠한 모습이었는데, 여전히 10살의 내게 abc초콜릿 몇 개를 쥐어주던 하얗고 고운 모습으로 가만히 서있어요. 하지만 오랜만에 만난 할머니를 마냥 반가워하기에는 똥이 너무 많습니다. 어딜 가나 똥밭에다 똥파리들은 또 얼마나 앵앵거리는지. 그런데 신기하게도 어떤 꿈은, 지금 내가 꿈속에 있다는 사실을 알아요. 그래서인지 역한 냄새에도 코를 막지 않고 그저 기다립니다. 이 꿈에서 깨길 바라면서요. 똥이 그렇게나 많은데도 이상하게 저는 너무나 깨끗하고, 할머니는 그림처럼 고요합니다. 우리는 한마디도 나누지 않았어요. 그리고 드디어 아침 해가 밝았습니다. 이 이상한 꿈을 얼른 남편에게 알려요.
“여보. 꿈에서 똥이 너무 많이.. 아 아직도 냄새나는 것 같아..”
“여보 똥꿈꿨어? 그걸 말하면 어떡해. 아직 아침인데! 내가 돈 보내줄게. 그 꿈 내가 산 거야!”
제 꿈은 아침 댓바람부터 아직 잠든 아이를 사이에 두고 직거래되었습니다. 단돈 천 원에 말이죠. 똥만 있던 게 아니라 기억도 가물한 친할머니까지 나왔으니 이건 확신의 당첨운이라고 해놓고, 고작 천 원이라니. 아무튼 나름 쿨거래였어요. 느긋한 주말 아침을 보내고, 아이를 유모차에 태워 산책에 나섰습니다. 그리고 편의점에 들러 로또 두 장을 샀어요. 물론 똥꿈의 현주인인 남편이요.
“여보는 꿈 잘 안 꾸는 사람이잖아. 그런데 똥꿈을 꿨다? 이건 무조건이야.”
“에이. 난 요행 같은 거 안 믿잖아. 이런 거 바라지 마.”
“아니야. 여보가 평소에 요행 안 바라는 사람이니까 더더욱이 이건 진짜 느낌이 와.”
과연 저의 똥꿈은 로또를 물어다 주었을까요? 당첨이 되긴 했습니다. 무려 두 장 모두 5등으로요!! 남편은 제가 아침에 꿈을 발설해서 그런 거라며 아쉬워했고, 저는 그런 남편이 귀엽기만 했습니다. ‘아직도 저런 미신을 믿는 34세라니. 우리 오빤 참 순수해’ 하면서요.
맞아요. 저는 요행을 믿지 않는 사람입니다. 정확히는 일생에 쓸 수 있는 행운의 양이 있다고 생각해요. 일정량의 행운이 있는 거죠. 한 로맨스 드라마에 ‘행운 총량의 법칙’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주인공은 그 법칙을 이렇게 말해요. ‘지금 닥친 불운만큼 앞으로는 행운이 찾아올 거라는 법칙. 나쁜 일이 생기면 좌절하지 말고 버티라는 고마운 법칙.’ 그런데 제가 말하는 ‘일정량의 행운’은 그것과는 결이 조금 다릅니다. ‘행운 총량의 법칙’이 곧 도래할 행운을 믿으며 지금의 불운을 버텨보자는 일종의 응원이라면, 제가 말하는 ‘일정량의 행운’은 말 그대로 한 사람의 인생에 주어지는 행운의 양입니다.
그러니 행운에도 절대량이 있다고 생각하는 제게 로또는 너무 극단적이에요. 일생의 행운을 한 번에 다 써버리는 것. 한 번에 왕창 얻은 수확물을 지게에 지고 벌거벗은 맨 몸으로 남은 구만리 길을 걸어가야 할 것만 같아서, 그런 류의 행운은 바라지 않아요.
영화 <어벤저스: 엔드게임> 속 아이언맨은 타노스로부터 극적으로 건틀렛을 되찾아 핑거 스냅을 합니다. 건틀렛에는 모든 인피니티 스톤이 박혀있어요. 핑거 스냅에 성공하자 타노스와 그가 불러온 거대한 재앙은 모두 소멸합니다. 하지만 사람의 몸으로는 스톤의 힘을 감당하기 어려웠고, 아이언맨은 결국 사망하게 되죠. 이런 결말은 아이언맨의 오랜 팬이었던 저에게 정말 가혹했어요. 적당히 가볍고 적당히 진중한 토니 스타크가 슈트를 입고 아이언맨이 되어 적당히 무서운 악당들과 싸워 이기는, 그래서 다시 토니 스타크로 돌아오는 적당히 유쾌한 영웅 이야기를 좋아했거든요. 그러니까, 건틀렛과 핑거 스냅은 로또인 거죠. 한 번에 모든 행운을 다 써버리는. 조금이라도 행운이 남았더라면 아이언맨이 살 수 있지 않았을까. 남은 행운을 다 소진했으니, 그것에 기대 그의 목숨을 빌 수 없는. 그 로또의 당첨금이 세계 평화가 아니었다면 이런 엔딩은 도무지 납득할 수 없다며 화를 냈을지도 몰라요.
늘 남편에게 말해요. 행운을 한 번에 다 쓰지 않고, 매일매일 적당히 조금씩 쓰고 싶다고. 이왕이면 잘게 쪼개진 작은 행운이 수시로 있는 하루를 보내고 싶다고요.
이를테면, 아침 러닝을 하려고 나왔는데 엘리베이터가 마침 우리 층에 있어요. 기다리지 않고 탈 수 있겠죠. 이제 막 달리려는데 어젯밤에 핸드폰 충전을 깜빡한 거예요. 그런데 딱 한 시간 정도의 배터리는 남아있어 좋아하는 노래를 들으며 기분 좋게 러닝을 합니다. 집에 와서 아침을 먹는 중에 아이의 유치원 알림톡이 울립니다. 우천으로 취소되었던 삼겹살 파티가 다행히 예보가 바뀌어 예정대로 진행한다는 연락이에요. 파티를 기대하던 아이에게 이 기쁜 소식을 얼른 전합니다. 남편은 출근하고 아이는 유치원에 가고 저는 장을 보러 가요. 유난히 오늘따라 신호운이 좋아 단 한 번의 빨간불 없이 드라이브하듯 마트에 도착해요. 장을 보는데 아이가 좋아하는 소고기는 오늘까지 세일에, 마침 똑 떨어진 남편의 캡슐커피는 2+1 행사를 합니다. 땡잡았다며 기분 좋게 장보기를 마무리하고 집에 돌아왔더니, 입구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주차자리가 남아있습니다. 평소에는 대기 힘든 명당자리거든요. 유치원에 아이를 데리러 갔더니 아이가 아래턱을 부여잡으며 나와요. 곧바로 선생님이 따라 나와 모서리에 부딪혀 살짝 긁혔다고 상황 설명을 해줍니다. 다시 보니 정말 아주 살짝 긁혀 있어요. 모서리에 눈이나 입을 부딪히지 않고, 단단한 턱을 부딪혀 얼마나 다행이냐며 놀란 마음을 쓸어내려요. 저녁으로 오전에 산 소고기를 구워주었고 아이는 리필요청까지 하며 맛있게 먹어요. 퇴근한 남편의 표정이 유난히 밝아요. 기분 좋은 일 있냐며 물어보니, 계단을 다 내려갔을 때 마치 지하철이 도착해 기다리지 않고 탔다고 해요. 집까지 걸어오는 바닷길이 오늘따라 관광객이 적어 한산해 산책하듯 걸어왔다고도 합니다. 그렇게 우리 가족은 행운이 가득했던 하루를 마무리하며 기분 좋게 잠자리에 듭니다.
쓰고 보니 이런 하루가 로또 당첨보다 더 어려울 것 같기도 해요. 매 순간에 행운이 깃드는 하루는 생각보다 쉽지 않지요. 어느 한순간에만 있어도 괜찮아요. 아주 약간의 행운도 좋아요. 어쨌든 오늘분의 행운이 길을 잃지 않고 무사히 나에게 왔다고, 행운 잔고가 충분히 남아있어서 내일도 안심할 수 있다고. 그렇게 생각하면 한결 마음이 놓입니다. 애쓰지 않아도 올 테니, 나는 그저 내 몫으로 온 행운을 발견만 하면 되니까요. 발견하지 못하면 또 뭐 어때요. 눈치채지 못했지만 운 좋게도 무탈한 하루를 보냈고, 오늘 운이 나빴다면 내일은 행운이 곱절로 오겠죠. 나에게는 일정량의 행운이 있으니까. 어쩌다 오지 않는 날은 있어도, 내가 소화해야 할 몫의 행운은 미룰 수 없으니까요.
그래서 내게 주어진 행운은 아끼지 않고 낭비하지도 않고, 딱 적당히 쓰면서 살고 싶어요. 가끔 남편과 로또 1등을 하면 무엇을 할지 이야기할 때가 있어요. 일단 대출금부터 갚고, 더 좋아 보이는 아파트 한 채를 사고, 여행을 매달 가고.. 우리의 대화는 길게 가지 못하고 항상 이 정도에서 흐지부지되어요. 아이언맨처럼 거대한 운을 한 번에 써서 차라리 세계 평화라도 얻을 수 있다면 모를까. 고작 대출금과 아파트와 여행 정도가 대가라면, 사양할래요. 매달 대출이자는 나가지만 조금만 아끼면 부족하지 않고, 남편과 아이가 매일 무사히 돌아오는 아늑한 집이 있고, 어쩌다 한 번씩 여행도 가는걸요.
그러고 보면 엄청난 양의 행운을 한 번에 쓴 적이 있긴 해요. 그럴만한 가치가 분명 있는 일이었어요. 바로 아들이요. 저 예쁜 아이가 내게 오려고 그동안 살아온 시간에 가끔씩 행운이 비는 날이 있었구나 싶어요. 차곡차곡 모아두었다 너에게 썼구나. 정말이지 제대로 썼구나 싶어 뿌듯합니다. 아이언맨이 핑거 스냅으로 세계를 구했다면, 저는 행운 적금으로 또 다른 세계를 만난 셈이네요.
만약 또 똥꿈을 꾼다면, 저는 또 눈 뜨자마자 발설해 버리겠지요. 미신을 믿진 않지만, 이왕이면 더 세세하게 말해버려야겠어요. 똥꿈이 멋대로 가져다 줄 감당 못할 행운이 한 톨도 남지 않게요. 그리고 바랄 거예요. 아이의 서툴고 무자비한 가위질에도 손가락이 다치지 않길. 작년에도 재작년에도 피하지 못한 수족구가 올해는 제발 피해 가길. 남편의 출퇴근 지하철에 빈자리가 꼭 남아있길. 6월에 있을 캠핑동안 내내 맑은 날이길.
그리고 부디 모두의 매일이 적당한 행운으로 물들 수 있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