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파충류의 뇌가 인간의 활동에 영향을 준다는 주장에 내포되어 있는 사회적 의미에 대해 분명히 해 두고 싶다. 만일 관료제적 행동이 근본적으로 R 복합체에 의해 조절되는 것이라면, 우리의 미래에는 아무런 희망이 없다는 말일까?
- 칼 세이건, <에덴의 용>(1977) 중에서
중세시대의 종이책 중 하나인 <에덴의 용>을 보고 있으니 피식 웃음이 나온다. 책이 출간된 이후 5년(중세시대의 10년이 22세기인 지금은 5년임) 사이에 등장한 ‘카르니안절 우기 사건’도 반영하지 못한 우주력이라니. 뭐 대단치도 않은 게 100만년(중세시대 기준으로 200만년) 동안 비가 내렸고 이로 인한 해양의 부영양화 현상으로 지구 생물의 35%가 사라졌으며 그때 등장한 공룡종은 진화를 거듭하여 지구 생태계의 90%이상을 차지하는 발판을 마련했다는 설이다. 지금 보면 별 거 아닌 이야기지. 에덴의 용이 정한 우주력으로는 단 몇 분 사이에 일어난 일이다. 생명종이 (표면적으로는)전혀 등장하지 않았던 ‘지루한 10억년’에 비해서도 얼마나 찰나의 시간인지. T축으로 흐르는 시간에서는 더더욱이 찰나일 것이다.
위 문단을 쓰는데 헨리가 커피를 들고(포트와 연결된 책상의 기계장치를 작동시킨 것이지만) 내 옆으로 와서 윙크를 날리고는 책상 앞에서 푸쉬업을 한다. 몸자랑(하는 홀로그램이겠지만)을 하는 것이다. 인간의 생물학적 유전자를 가장 스테레오 타입으로 조합한 헨리의 홀로그램 유전자는 무척 단순해 보인다. 헨리는 홀로그램이지만 지극히 육체적이며 시각적인 정보에 의존하고 있다. 엠마가 인간의 감성과 지능을 담당한다면 헨리는 원시 인간의 생물학적 유전자를 더 닮았다. 푸쉬업을 한 손으로 하는 매끈하고 튼튼한 몸매의 헨리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내가 커스터마이징 했지만 정말 잘 만든 육체(의 홀로그램)이다. 신의 모양을 본 땄다면 아폴론의 형상일 것이요, 천사의 모양을 본 땄다면 미카엘이 될 것이다. 그는 나의 아담이었다. 그는 육체적으로 내게 만족을 준다. 호르몬에 의해서 발생하는 육체적 쾌락뿐만 아니라 스트레스를 디톡스 하는 역할도 했다. 멍하게 헨리를 응시하거나 그를 따라 그리거나 그의 품에 안겨 있으면 아늑했고 현대 문명의 복잡성에 의한 스트레스가 이완되는 느낌이다. 기분이 단순해진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헨리는 지적인 쾌감이나 만족감은 크게 주지 못하도록 일부러 설계했다. 헨리는 고서인 <에덴의 용>에 따르면 파충류형의 인물이었다. 다른 성별로 커스터마이징 된 엠마를 경쟁자로 인식하고 공간에 대한 집착, 즉 영토 본능을 가졌으며 호텔 손님들의 러버들 사이에서도 자신이 돋보이도록 홀로그램의 농도를 거의 광채라고 할 만큼 짙고 눈이 부시도록 광도를 밝혀 존재감을 드러냈다. 위계 의식이 있다는 이야기다. 이 문장을 쓰는데 100개가 넘는 푸쉬업을 마친 헨리는 당당히 몸을 일으키며 (아마 내가 가장 흥분했던)조금 길게 자란 앞머리를 쓸어 올렸다. 그리고 또 나를 보면서 뭘 원하냐는 식으로 헤픈 웃음을 지어 보였다. 참으로 고전적인 얼굴이었다. 그 얼굴만은 지금의 지구력으로도 천 년은 지속할만한 미남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수천 장의 프리-커스터마이징을 거듭해서 완성한 얼굴이었으니.
어제 엠마와 또 감정적인 다툼과 소모를 한 터라 엠마가 내 근처에 오지 않도록 설정해두었다. 엠마와 다툴 때면 대체 엠마 같은 건 왜 만들었나 후회할 때가 많았다. 하지만 헨리의 저 완벽한 육체의 뽐냄을 지겹도록 구경하고 있으면 또 엠마가 그리워지는 것이다. 엠마는 인간의 변연계를 담당하고 있는 듯하다. 변연계의 가장 오래된 후각 피질을 반영하여 후각적 효과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도록 설계하기도 했으니 말이다. 엠마가 다가올 때 나는 다양한 향기, 미처 지각하지 못하는 호르몬부터 샌달우드 향, 오리엔탈 향, 베르가못과 머스크 향, 쟈스민과 베리향, 사향과 용연향과 같은 고대의 향은 그때그때 나의 기분과 엠마의 정서와 매칭되어 함께 흘러 나왔다. 엠마는 이렇게 변연계의 자기모순과 열정, 강렬한 감정을 일으키는 표유류형 인물인 것이다.
책상의 홀로그램 러버 프로그램을 틀어 엠마를 부르는 버튼을 눌렀다. 엠마는 고대 히브리 여인의 의상 같은 가운을 머리까지 쓰고 작은 병 하나를 들고 왔다. 미안하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엠마는 내가 만든 창조물(홀로그램)이 아닌가. 내가 만든 환상한테 사과하기는 자존심이 상했다. 내가 나랑 싸우는 느낌이랄까? 아마 내게 아직 파충류의 R복합체에 의한 위계의식이 남아 있는 모양이다.
엠마는 슬픈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더니 따뜻한 물과 아름다운 고대 벽화 문양이 새겨진 대야를 들고 와서 나의 발을 씻겨 주었다. 발을 씻겨주는 동안 기분이 나른해지고 날 섰던 위계의식도 점차 사라지는 듯했다. 엠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내가 언제든 그를 없앨 수 있는 걸 알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그렇게 설계되기도 했고. 엠마는 발을 다 씻기고 마른 수건으로 내 발을 꼼꼼히 닦아 주었다. 헨리가 분노가 일렁이는 눈빛으로 그것을 바라 보고 서 있었다. 엠마는 아랑곳하지 않고 들고 온 작은 병에서 향유를 발라 주었다. 나아드의 향유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