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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시용 Feb 23. 2024

책이라는 상품의 본질

더퍼슨스 편집장의 회고찰 ep.2

책은 상품이다. 맞는 말이다. 다만 출판사와 서점, 작가에게 적합한 표현이다. 타인에게 지식과 지혜를 전달하기 위한 수단으로써 책이 탄생했으나 판매를 위한 '상품화'가 우선이 된 지 오래다. 상품화되어 아예 본질을 잃어버렸다는 표현이 아닌 '상품화'가 본질보다 우선이 되었다는 의미다. 요즘도 수세기가 지난 뒤의 후세대까지 고이 남겨 전달할만한 가치가 있는 책이 탄생하고 존재한다. 다만 동시대의 수많은 책 중에서 그 도서들이 차지하는 비율이 적을 뿐이다. 과거라고 통칭할 수 있는, 책 공급자가 지금보다 적었던 시절에서 나온 양질의 도서량과 하루에도 수백 권씩 쏟아져 나오는 요즘의 출판시장에서 나오는 값진 도서의 절대량이 엇비슷하다면 상대적으로 훌륭한 도서의 비중이 급격하게 차이 난다는 말이다.


이런 출판 시장에서 독자들에게 선택받기 위한 출판사들의 전략은 '디자인'이었다. 더 자세히는 '도서의 겉표지 디자인'. 앞선 문단에서 '상품', '시장'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는 사실에 시사점이 있다. 책은 판매를 위한 재화가 된 지 오래고, 생산자들은 소비자들이 자신이 만든 상품을 집어들 수 있도록 여러 판매 전략을 취하고 있다. 앞 문장에서 '책'이라는 단어를 여느 공산품의 품목으로 대체해도 어색하지 않다.


적어도 우리가 사는 사회가 자본주의를 기반으로 하기에 이와 같은 현상은 비난받을 성격의 것이 아니다. 이 글에서 책의 상품화를 비판하고자 하는 것도 아니다. 자본주의에서 생산자와 소비자 사이의 가치교환이 너무나 당연한 삶의 양식이고 이는 선악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책이 책의 본질을 잃을 때 독자은 더 이상 책을 찾지 않는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일반화할 수는 없어도 논의의 편의를 위해 독자를 두 부류로 나눠보자. 애초에 책에 관심이 없어서 구매를 하지 않거나 누군가의 추천 때문에 한 번 정도 사는 독차층. 책을 좋아해서 누가 시키지 않아도 스스로 좋은 책을 찾아 구매하는 독자층. 규모의 절대 크기는 전자의 경우가 월등히 높을 것이다. 적어도 단편적으로는. 경영학에 Life-Time Value(LTV; 고객 생애 가치)라는 개념이 있다. 단순히 말해 한 명의 고객이 평생 구매하게 될 모든 가치를 합한 양을 의미한다. 각 두 그룹의 LTV를 계산했을 때 어떤 그룹의 LTV가 더 높을까. 저자의 뉘앙스에 끼워 맞추기 위해 억지로 후자라고 주장할 생각은 없다. 독서율(2023년 대한민국 통계청 기준 48.5%)이 지속적으로 하락 추세를 보이고 있어 전자 그룹의 비중이 늘어나고 있기 때문이다(엄밀히 말하면 독서율과 독서 구매율은 다른 것이나 비슷한 추이를 보이는 것으로 가정). 그럼에도 책을 '판매하기 위한 재화'로 소구해야 하는 공급자들이 '판매'를 목표로 어느 그룹에 초점을 맞춰야 할지는 비교적 명확하다고 본다. 책을 구매할지 확신할 수 없는 흐릿한 다수(anonymous)를 상대로 많은 노력을 기울일 것인가, 가치 있는 좋은 책이 있다면 기꺼이 구매할 의사가 있는 이들에게 지속적이고 집중적으로 공을 들일 것인가.



자, 책을 진심으로 좋아하는 이들이 공급자들의 관여 대상이라는 생각에 다다랗다면 그런 독자들의 특성이 무엇인지 살펴보자. 책의 카테고리마다 다르겠으나 읽는 책을 통해 지식, 지혜, 감동, 영감을 얻기 위함이지 않을까. 명품 브랜드나 유명한 예술가가 디자인한 한정판 책이 아니고서야 책의 디자인'만' 고려하는 책쟁이는 없다. 이러한 책들도 일상에서 읽는 책이 아니라 예술 작품으로 분류해야 한다. 우리가 초점을 맞춘 대상이 책을 좋아해서 오랜 기간 다량의 책을 읽어온 사람이라는 점을 다시 상기해 보자. 결국 그들에게는 책의 내용이 중요하다. 단연 겉표지에 시선이 가고, 그로 인해 집어 들고, 심지어 구매까지 할 수 있다. 하지만 사용자 경험(User Experience)은 내용에 만족하며 책을 덮은 경우와 확연하게 다르다. 책표지가 마음에 들어 책을 구매했다가 내용의 허술함에 실망한 경우 그 독자의 감정은 '기대'에서 '실망'으로 흐른다. 반면 내용의 기획과 구성이 마음에 들어 실제로 만족하며 책을 읽은 독자의 감정은 '기대'에서 '만족'으로 승화한다. 너무나 명확하지 않은가.


물론 표지도 훌륭하고 내용 역시 알찬 경우라면 더할 나위 없다. 다만 접근 방향을 따져보고 싶은 것이다. 독자가 읽게 될 내용의 기획과 편집에 끝까지 공을 들이는 마음가짐과 소위 시장에서 '먹힐' 감각적으로 예쁜 디자인을 앞세워 빠르게 판매량만 높이려는 사고방식.


혹여나 이 글을 읽게 될 출판업계 관계자 또는 심지어 독자들도 불만을 제기할 수 있다. 결국 현실에서는 디자인이 예뻐야 한 명이라도 더 많은 구매자가 집어 들게 된다고. 업계를 몰라서 하는 고루한 소리라고.


https://youtu.be/j2S0DpE25nU?si=optX1crwdi3PRVjP


그렇게 디자인의 중요성이 강조된 나머지 베스트셀러가 된 도시들의 표지 디자인 콘셉트를 그대로 베끼는 형태가 만연해졌다. 판매량이라는 데이터로 검증된 디자인인 만큼 독자들은 한두 번씩 책을 집어 들고 구매하기 시작한다. 책을 읽어가다가 문득 깨닫는다. 이런 디자인을 가진 책은 겉만 번지르르해서 다음부터는 피해야겠다고. 그럼 출판사들을 새롭게 등장한 다른 베스트셀러의 디자인을 찾는다. 그 디자인 콘셉트를 차용해 다음 책을 출간한다.


이 순환 과정이 계속되어왔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독자들이 바보가 아니라는 점이다. 어떤 출판사가 콘텐츠에 진심으로 힘을 쏟고 정성을 다하는지 걸러낼 능력을 가졌다. 개개인뿐 아니라 집단지성 역시. '내용'이라는 책의 본질을 잃어버린 채 독자들의 눈만 호강시키려 했던 공급자는 결국 독자를 잃게 된다. 마약 같은 '디자인 어그로'를 창의적인 방법으로 해결해 볼 생각을 하지 못한 게으름 때문에 이 지경까지 이르렀다.


자살률, 출산율과 더불어 우리나라가 보유한 세계에서 악명 높은 3대 통계치가 앞서 언급한 독서율이다. 1년에 책을 한 권이라도 읽는 독자가 인구의 절반도 채 안 되는 48.5%다. 그렇다면 나머지 51.5%는 어디에 시선을 두고 있을까(48.5%의 인구도 다른 콘텐츠를 동시에 즐기고 있다는 것을 전제). 유튜브, 틱톡, 넷플릭스, 디즈니, 쿠팡플레이, 애플 TV, 왓챠 등 OTT 뿐 아니라 게임, 운동, 전시회 등 즐길거리야 차고 넘친다. OTT에 있는 많은 수의 영화와 드라마를 보는 것만 해도 벅차다. 책을 만드는 출판사가 굳이 그들과 같은 전장(戰場)에서 그들과 같은 무기로 싸워야 할까. 질 수밖에 없는 게임에 스스로 뛰어든 꼴이다. 저들이 줄 수 없는 것을 주어야 한다. 책에서만 얻을 수 있는 무언가. 굳이 따지자면 그것은 분명 '내용'에 있지 '겉표지 디자인'에 있지 않다.


사건이 수면 위로 드러나고 많은 독자가 이 사태를 알게 된 시점에서 책을 만드는 이들이 숨을 크게 한번 고르고 책의 본질에 대해 재고할 시점이 되었다.



https://thepersons.co.kr/pers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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