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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현 Jul 03. 2022

바람 III

#이방인



바람 I, II를 읽고 오시면 더 재밌습니다 :)





비가 좀 잦아들 때쯤 냉큼 내려와 버스를 탔다. 내 여름에 닥친 30분짜리 모험을 천천히 복기하면서 숙소로 돌아왔다. 뜨거운 물에 30분보다 길게 샤워를 하고 나서 침대에 누웠다. 한 숨 자다가, 이대로 하루를 끝내기엔 너무 아쉽다는 생각에 벌떡 일어났다. 정신없는 하루를 보냈으니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이야기가 아니라면 그저 온기를 나누고 싶었다. 의외로운 날이었다. 나는 모르는 사람에게 벽이 높은 편이었다. 발랄하지만 낯을 많이 가리는 성격이라, 모르는 타인의 접근을 불편해했다. 혼자 여행을 가면 대부분 침대에 콕 박혀있는 편이었는데, 그날은 사람이랑 말을 하고 싶었다. 제주도라는 타지에서 나 또한 이방인이라는 감각, 그리고 따뜻한 숙소가 주는 편안함에 마음이 흐물흐물 녹았다.


거실로 나가 앉았다. 어떤 언니가 노트북으로 작업을 하고 있었고, 나는 대충 눈인사를 한 뒤 두세 자리 건너에 앉아 책을 몇 장 읽었다. 그리고 어쩌다 이야기를 시작하게 되었을까. 언니의 무거운 이야기를 들었다. 마음의 무게를 어찌 비교할까만은, 그분은 나보다 훨씬 고통스러운 마음을 짊어지고 오신 것 같았다. 몇 년 동안 어떤 시험을 준비했고, 이번엔 정말 끝이라고 생각하며 도전했고, 탈락했고, 그래서 지리산을 종주하셨다고 했다. 운동화 하나를 사들고 무작정 산에 올랐는데, 삼박 사일 동안 죽을 고비를 몇 번 넘기고 나니까 운동화 밑창이 다 닳아있었다고. 겨우 며칠 신은 신발을 버리면서 언니는 몇 년 동안 매달렸던 시험에 대한 미련도 버렸다고 했다. 그리고 도시로 돌아가기 전, 제주도에 들렀다고. 그러니까 언니는 뭔가를 포기하기 위해 제주도에 왔던 거다.


 언니의 마음에 충분히 공감한다고, 언니를 이해한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래서 두서없이 “저도 사실 마음을 비우려고 제주도에 왔어요.”라고 말문을 뗐던 것 같다. 너무 가고 싶었던 회사에 들어갔지만 꿔다 놓은 보릿자루마냥 자리에 앉아있기만 하다가 나왔다고, 내가 짐짝처럼 느껴지는 그 감각이 너무 끔찍했다고. 당연히 불합격일걸 알면서도 과제를 발표해야 했을 땐 정말 울고 싶었다고, 발표가 끝나고 며칠간 회사에 더 나가야 했는데 그게 더 끔찍했다고 이야기했다. 그리고 오늘 비바람을 좀 맞고 보니 그게 다 씻겨 내려갔다고, 이제 마음이 개운한 것 같다고도 말했다.


 나의 하찮고도 위험했던 30분간의 여정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그 언니가 막 웃었던 것 같다. 하긴, 몇 년을 인내하며 공부하다가 갑자기 목숨을 걸고 지리산을 종주한 사람 앞에서 잠시 비바람을 맞았다는 이야기를 하자니 나도 머쓱하고 쪽팔렸다. 그래도 이야기하고 싶었다. 여기는 뭔가를 포기하러 오는 사람이 많은가봐요. 저도 그랬어요. 언니도 그런가요. 언니는 정말 마음이 개운하신가요. 이제 돌아가면 마음 편하게 살아갈 수 있을까요. 이 패배감과 자기혐오를 잊고 다시 살아가게 될까요. 어떤 삶을 살아가게 되더라도 저를 응원하고 또 사랑할 수 있을까요, 그런 걸 물어보고 싶었다.


 언니는 나한테 핸드폰 번호를 줬다. 나이가 많은 사람이 불쑥 연락처를 물어보면 무서워할거라고 생각했는지, 자기 연락처만 남겨줬다.(아주 좋은 사람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나한테 집밥을 한 끼 해먹이고 싶다고 했다. 집밥이라니. 언니는 혼자 산다고 했는데, 한두 시간 같이 있었던 사람을 위해서 밥을 해주고 싶다는 마음은 무엇이었을까.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그분도 어렸던 것 같다. 도심의 원룸에서 홀로 자신을 잘 건사하려고 애쓰던 20대 후반, 30대 초반이었겠지. 자신도 뭔가를 내려놓아보려고 제주도까지 날아왔지만, 세상에 데여 어쩔 줄 모르는 어린애를 보고 따뜻한 밥 한 끼를 지어주고 싶다고 했던 사람. 그 마음이 아직까지도 따뜻하고 애틋하다.




 그분께는 연락하지 않았다. 제주도에서의 뭉클한 마음이 도시에 오니 잊혔던 것은 아니었고, 그저 좀 민망했다. 그분도 여행지에서 술 한 잔 하시고 들뜬 기분에 불쑥 연락처를 주고는 후회하실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들었다. 또 도시에서의 우리 모습은 제주도 바닷가 게스트하우스에서의 우리와 사뭇 다를텐데, 그 괴리감을 이겨내고 정답게 이야기할 수 있을지 걱정이 됐다. 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그던 성격이라, 나는 그 언니의 휴대폰 번호를 조용히 지웠다. 이름 석 자만 마음 한 켠에 담아뒀다.


 오늘처럼 거센 비가 바람에 날리면 그 사람이 생각난다. 그날 내가 연락했으면 우리는 아직도 가끔씩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가 됐을까. 어쩌다 당신과 내가 길을 가다 마주치면 우리는 서로를 알아볼 수 있을까. 진짜 백분의 일의 확률로 우리가 서로를 알아본다면, 이름을 부르고 술 한잔 할 수 있을까. 마스크 속에 감춰둔 얼굴을 못 알아봐서 지나칠 확률이 더 큰, 고작 몇 시간짜리 인연. 그 인연이 얼마나 내게 큰 힘을 주었는지, 그날의 따뜻함이 얼마나 오랫동안 나를 지탱해줬는지 모른다. 더 잘 살아가고 싶다고 얼마나 마음먹게 했는지 모른다.


언니, 잘 지내고 계신가요? 이 바쁜 도시에서 어떤 삶을 이어나가고 계신가요. 제주도에서 내려놓았던 것들을 이제는 가벼운 마음으로 돌이켜볼 수 있나요. 가끔 지리산을 생각하고, 또 가끔 제주도밤을 떠올리시나요. 가끔 언니를 생각해요. 그날 내가 그저 안쓰러웠던 게 아니라, 언니에게 조그마한 힘이라도 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이런 궂은날에는 가끔씩, 이젠 얼굴이 기억나지 않는 당신의 안녕을 바랍니다.







당신에도 언젠가 스쳐 지나갔지만 가끔 생각나는 사람이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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