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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현 Aug 22. 2022

식물을 키운다는 책임감

미안해, 너라도 꼭 살려볼게


 바질이 죽었다. 집에 들어온 지 7일 만이다. 바로 옆에 놓아둔 로즈마리도 죽어가는 중이다. 인간사가 바빠서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집에 들이기를 선택한 식물이 아파하다 죽어가는 것을 발견하니 마음이 무겁다. 나는 잠시 힘들고 정신이 없었지만, 그동안 이 아이들은 생과 사를 달리했으니까. 한참 물을 안 주다가 생각나면 콱 부어버리고, 그렇게 겉은 마르고 뿌리는 썩도록 했다. 내가 뭐라고, 택배 상자에서 꺼낼 때만 해도 파릇파릇하게 살아있던 아기를 죽게 했을까.


두세 달 전에도 식물 하나가 죽었다. 아니, 내가 식물 하나를 죽였다. 행운과 금전운이 담겼다고 생일 선물로 받아다 2년을 함께 지낸 천냥금이었다. 회사 사무실에서도 2년을 잘 키웠고, 분갈이를 한 후에 화분 여기저기서 쏙쏙 새 잎을 내고 있었는데 집에 온 지 두어 달 만에 세상을 떠났다. 아, 이것도 잊으면 안 되지. 웬만하면 절대 죽지 않는 스투키도 작은 화분 속에서 하나씩 하나씩, 총 아홉 줄기가 순서대로 죽어가는 중이다. 과습 때문에.


몇 달간 식물이 네 가지나 죽었거나 혹은 죽어가는 중이라니. 끔찍한 일이다. 내가 이토록 책임감이 없는 인간이라 자괴감이 들었다. 나는 화분을 하나 고른 거지만 이 친구들은 강제로 여생을 보낼 곳을 할당받았을 텐데, 그 수동태의 무거움을 왜 제대로 짊어지지 않았을까.






얼마 전에 우연히 봤던 책이 생각났다. 서점에서 매대에 있는 책들을 열어보다가 만난 식물 에세이였다. 오래전이라 제목이나 내용은 기억이 안 나는데(찾아내면 꼭 제목을 기입하겠습니다. 혹시 이 책이다, 싶으신 책이 있으면 댓글로 알려주셔요!), “키우기 쉬운 식물”에 대한 언급이 있었다. 요즘 키우기 쉽다는 이름에 혹해서 별 준비 없이 식물을 들였다가 식물을 죽이는 경우가 많다는 이야기를 했던 것 같다. 최소한 물을 얼마큼 얼마나 자주 주어야 하는지, 햇볕에는 어떻게 두어야 하는지 등 기본적인 것은 알아야 한다고, 그게 책임감이라고. 생각해보면 그랬다. 나는 바질에게 어떻게 물을 줘야 하는지 아직도 모른다. 죽고 나서도 아무것도 모른다. 천냥금이 언제 꽃을 틔우고 열매를 맺는지도 몰랐고, 왜 작년에는 열매가 나지 않았는지도 몰랐고, 그 친구를 자주 들여다보면서 듬뿍 사랑해준 적도 별로 없었던 것 같다.


한창 도심 가구에 플랜테리어 열풍이 불었다. 여러가지 온라인 선물하기 페이지 등에서도 다육이가 판매 순위를 오래 지켰다. ‘잘 죽지 않는’, ‘키우기 쉬운’, ‘한 달에 물 한 번’ 등의 해시태그로도 유입이 꽤 많았다. 나도, 친구들도 서로에게 화분을 선물했다. 동시에 온라인에서, 그리고 주변 친구들에게서 “식물이 죽었다”는 이야기도 많이 보고 들었다. 일단 나부터도 몇 달 사이에 몇 개를 죽였는데. 식물 판매수가 높아지면서 동시에 식물의 ‘사망’ 수도 늘어난 것 같다.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나에게 그 화분들은 그냥 그 자리에 가만있는 액자, 장식물, 그런 정도였던 것 같다. 정말 미안해, 아가들아. 변명을 하자면 나도 힘들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생명을 소중하게 가꿔야 한다는 것에는 변함이 없는걸. 회사에서도, 집에 가져와서도 이 친구와 함께 살 수 있는 자격은 나한테 없는 게 맞다.






마음이 축 처진 채로 며칠을 보내고 나서 화분들을 정리하려 한다. 이렇게 내 손으로 직접 식물의 죽음을 정리해보면서 다시는 이런 순간을 맞지 않아야지, 하고 마음먹는 과정이다. 많은 부분이 상했지만 아직 살아나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는 로즈마리도 잘 돌봐보려 한다. 로즈마리는 물이 많이 필요한데 가끔 저면관수도 좋고, 무엇보다 환기가 중요하고, 햇볕까지 삼박자가 잘 맞아야 한단다. 포스트잇에 잔뜩 써서 화분 앞에 붙여두고, 틈날 때마다 들여다보고 있다. 사랑한다는 말도 빠지지 않고 해주고 있다. 사랑만큼 책임감을 가질게. 그냥 너를 이대로 잃어버리지 않을게. 내가 미안해. 나에게 한 번만 더 기회를 주렴.


바질을, 천냥금을 말려 죽이고 나서야 그 친구의 이름을 검색해봤다는 게 정말 부끄럽다. 단 일주일 만에 생사를 달리한 이유를 아직도 모른다는 게 너무 미안하다. 천냥금이 여름에는 흰 꽃을 피우고, 가을에는 빨간 열매를 맺는다는 사실을 이제야 알았다는 게 고통스럽다. 그 고통이 너의 고통만 했을까.


생명을 집에 들인다면 무한한 책임감이 있어야 한다. 그 사실을 다시 한번 마음에 꼭꼭 눌러 적는다. 적당히 물 주고 해 잘 드는 곳에 가져다 두면 알아서 피어나 내 집을 장식해줄 존재가 아닌걸. 나와 여기서 같이 사는 또 다른 생명으로 이 친구를 존중해야지. 바깥에서 자유롭게 자라날 자유를 잃어버리게 했으니 내가 이제부터라도 잘해볼게. 내 몸과 마음처럼 너를 보살필게. 그러니까 살아줄래.








글의 소재를 생각하고 나면 어떤 장르로 써볼지 고민해보곤 합니다. 내키는 대로 시를 쓸 때도 있고, 에세이를  때도 있지요. 그런데 쓰고 나면 '아, 이 시는 길게 풀어써야 더 와닿을 것 같아', 혹은 '이 이야기는 구구절절하지 않게 시로 쓸걸.' 하는 순간들이 있습니다. 제가 어떤 소재에 어떤 글을 더 즐겨 쓰는지, 또 독자 여러분들께서 어떤 글을 더 편하게 읽으시는지가 궁금하더라고요. 또 같은 소재로도 열몇 개의 감정을 느끼곤 하니, 그 각각의 이야기를 서로 다르게 풀어보면 어떨까 싶었습니다. 당분간 '글 하나  시 하나'에 같은 소재로 산문 하나, 시 하나를 올려보면 어떨까 합니다. 글의 제목 앞에 대괄호로 '[소재]' 이렇게 소재를 적어둘 테니, 한 쌍의 글을 가끔 읽어봐 주셔요. 감사합니다. 아이러브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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