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 Jaded Palettes: 요즘의 추상

원문 저자: Martin Herbert

by 박세희

이 ‘new’ 추상표현주의 시대는 과잉 개인주의(hyper-individualism)와 AI가 생성한 보도자료가 넘쳐나는 지금의 시대에 완벽히 부합한다.


내가 열아홉 살에 미대에 들어갔을 무렵, 나는 추상표현주의자가 되고 싶었다. 문제는 여기가 1958년도 아니었고, 나도 아는 게 거의 없었다는 점이다. 게다가 내가 영향을 받은 인물도 신적인 존재처럼 취급되는 빌렘 드 쿠닝이 아니라, 1989년 옴니버스 영화 뉴욕 스토리즈의 마틴 스코세이지 파트에 등장하는 닉 놀티의 방탕하고 드 쿠닝을 닮은 화가 캐릭터였다. 닉 놀티가 연기한 라이오넬 도비는 대체로 거대한 창문이 있는 로프트 스튜디오에서 술을 마시고, 페인트를 마구 휘두르고, 밥 딜런 음악을 엄청 크게 틀어놓은 채, 여자 조수에 대한 존재론적 갈등을 품으며 꽤 즐겁게 시간을 보내는 것처럼 보였다. 그 영화에 따르면 추상표현주의(그리고 그에 뒤따르는 모든 마초적 행동들)는 여전히 유효한 듯 보였고, 그래서 나도 캔버스와 아크릴 물감, 붓, 맥주를 사 들고 다락방에서 혼돈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지가 수차례 “그놈의 밥 딜런 좀 끄라고”라고 외친 뒤에야, 나는 책도 좀 읽기 시작했고 조금은 나이도 들었다. 이제 나는 지적인 1960년대의 개념미술가가 되기로 한 것이다. 그리고 몇 년 뒤, 나는 훨씬 더 현실적이고 이성적인 21세기 미술 비평가로 방향을 틀었고, 당시 나는 1980년대 말 골드스미스 중심의 네오-컨셉추얼 시대를 경험한 꽤 유명한 영국 화가와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가 말하길, 그가 알던 화가들, 예를 들어 글렌 브라운 같은 이들도 모두 추상표현주의 화가들을 숭배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들은 과거를 그대로 반복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제스처의 요소를 가져오려면 형식적인 차원에서 새로운 방식으로 다뤄야 했고, 그것을 대중문화와 아이러니와 뒤섞어 전혀 다른 조형 방식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윈저앤뉴턴(영국의 선두적인 미술 용품 브랜드) 물감을 바르는 촉감은 여전히 즐길 수 있었지만, 그들은 단순한 추종자가 아니었다.

그로부터 수십 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새로운’ 혹은 ‘신-표현주의’라는 시대에 들어선 듯하다. 최근 몇 년간 갤러리들을 점점 채워온 neo-Ab-Ex(Neo-Abstract Expressionism) 흐름만 봐도 그렇다. (이 현상은 2016–17년 런던 왕립미술원과 구겐하임 빌바오에서 열린 50년 만의 추상표현주의 대규모 회고전의 긴 후광효과일 수도 있다.) 원래의 운동으로부터 약 70여 년이 지나, 지금 많은 젊은 화가들은 단지... 다시 그것을 하고 있다. 스타일적 측면에서 말하자면 말이다. 그리고 특히 백인/남성/이성애자가 아닐 경우, 이 회귀는 그럴듯하게 정당화되곤 한다. (예: Li Hei Di, Rachel Jones, Carmen Neely 등. 어느 정도는 반복적이라고 생각된다. 1990~2000년대의 Sue Williams, Cecily Brown가 했던 스타일들을 보아라. Oscar Murillo 같은 최근의 예시도 있다.) 그럼에도 이 형식은 여전히 놀라울 만큼 고루해 보인다. 하지만 이런 회귀는 우리가 ‘영원한 단기적 현재’ 안에서 ‘진보’를 바라보는 방식과 묘하게 맞아떨어진다. 10년 전 구상이 돌아왔고, 모두가 그다음에 뭐가 오는지 알고 있었다. (내 딸이 일곱 살쯤 되었을 때 학교에서 그린 그림을 들고 돌아와서는 “선생님이 다음 시간엔 추상을 배운대!”라고 신나게 말한 적도 있다.) 이 년 전 나는 ‘우리는 부활주의의 종착점에 도달했는가’라는 칼럼을 쓴 적이 있다. 결론은 이제 확실하다: 전혀 아니다.


제국이 종말기에 접어들면, 문화적 산물은 대개 향수 어린 스타일의 재부활과 이미 지친 감각을 겨냥한 새로움으로 채워지기 마련이다. ('지겨운 팔레트들’이라는 전시 제목을 제안해 본다.)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현상도 어느 정도 그런 이야기다. 추상표현주의는 과잉 개인주의(hyper-individualism)의 시대와도 놀라울 만큼 잘 맞는다. 요즘 쏟아지는 AI 기반 보도자료를 보면, 예술가가 용감하게 자신의 내면과 감정을 탐구한다는 식의 문장이 끝없이 반복된다. 덧붙이자면, 시각적 문해력이 낮은 컬렉터에게는 예쁜 색감, 단순한 서사, 그리고 “틀리게 해석할 위험이 전혀 없는” 그림이 매력적일 것이다. 흐릿함과 덩어리 속에서 자신이 보는 것이 전부이기 때문이다.

‘혁신’이란, 그것은 작품을 누가 만들었는가라는 문제를 넘어, 몸짓적 회화(gesturality)에 로코코적 요소를 섞는 정도에서 나타난다. 플로라 유크노비치(Flora Yukhnovich)나 미카엘라 이어우드-단(Michaela Yearwood-Dan)이 탐구하는 방식처럼 말이다. (물론 케이티 모란(Katy Moran)은 이런 접근을 훨씬 오래전에 이미 해냈다.)

여기에는 또 하나의 시간적 논리가 적용된다. 원래의 추상표현주의는 생물형태적 초현실주의(Surrealism)에서 출발했는데, 우리는 방금 또 초현실주의의 재부흥을 겪었다. 그렇다면 다음 순서가 이것이어야 한다는 식의 생각이 든다. 물론 그렇다고 초현실주의가 사라진 것도 아니고, 지속되는 구상 회화가 사라진 것도 아니다. 하지만 1990~2000년대 런던 미술계를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당시 웨스트엔드의 ‘덜 쿨한’ 갤러리들을 가득 채우던 그림과 거의 똑같이 생긴 작업들이 지금은 ‘전위(avant-garde)’로 제시되고 있다는 사실이 꽤 이상하게 느껴질 것이다. 그것도 당시 가장 '쿨했던' 갤러리들이 지금 그렇게 말하고 있다. 생명의 순환 같은 일이다. 더 이상한 점은, 회화의 형식적 발전에 대한 이러한 낮은 기대치가 거의 10년 가까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점이다.


이런 접근은 앞으로도 지속될까? 미술사에는 여전히 약탈하거나 재구성할 수 있는 수많은 양식들이 남아 있다. 만약 이런 흐름이 계속된다면, 앞으로 나타날 것은 ‘운동의 교체’라기보다, 정말로 시각적으로 말 그대로 새로운 무언가를 피하기 위해 과거 양식들을 층층이 쌓아 올리는 방식일지도 모른다. 결국 핵전쟁만 나지 않는다면, 네오-추상표현주의가 지나간 후에는 네오-네오-(그리고 네오 지오도 잊지 말자) 하드-에지 회화가 오고, 다시 네오-네오-(네오?) 개념주의가 오고, 그렇게 전체적인 순환이 또다시 반복될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 우리는 일종의 ‘양자 미술사(quantum art history)’, 즉 과거의 모든 순간이 현재 시제로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일부는 변화된 가치관을 반영하겠으나, 대부분은 결국 아류 헛소리처럼 보일 것이다. 하지만 뭐, 이것도 결국 우리의 아류 수준의 헛소리일 뿐이다.



NOTE

결국 이 칼럼이 말하는 지점들이 지금의 한국 추상회화 유행과 겹쳐 보이는 부분도 있지만, 정확히 일치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나는 ‘부활(revival)’이라는 현상 자체보다, 왜 특정 형식이 지금 한국에서 이토록 반복되는가, 그리고 그 반복을 가능하게 만드는 제도적·시각적·시장적 구조가 무엇인가에 대해 더 관심이 있다.


글 후반부의 “새로운 것은 더 이상 등장하지 않는다”거나 “과거 양식들이 층층이 쌓일 뿐”이라는 비관엔 솔직히 크게 동의하진 않는다. 한국 미술에서는 ‘새로움의 부재’ 자체가 그렇게 중요한 질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특히 한국은 애초에 전위적 운동을 생산해 온 중심지라기보다, 세계 미술의 흐름을 일정한 시간차 안에서 받아들이고 변형해 온 구조이다. 그래서 문제의 핵심은 “새로운 운동이 나오지 않는다”가 아니라, “어떤 흐름이 한국에 들어올 때 충분히 변형되지 못한 채, 약간의 간극만 두고 거의 유사하게 반복된다”는 것에 더 가깝다.


이 글의 또 다른 논지 중 하나인, 형식적 진보보다 “잘 섞은 스타일”이 혁신처럼 소비되는 상황에는 공감한다. 한국에서도 추상회화는 밝고 예쁜 색감과 무난한 구성이 인테리어적 호환성 때문에 빠르게 반복되고, 그 반복이 하나의 관습처럼 굳어져 있다. 새로움이라기보다, 팔리기 좋은 미감이 재생산되는 쪽에 가깝다. 나는 이것 자체를 마냥 비난하고 싶진 않다. 다만 분명 다양한 형태의 장(field)이 있음에도, 작가로서 어떤 조형적 고민이나 변형의 여지가 충분히 발현되지 못한다는 것은 확실히 아쉬운 점이다.


작가의 제스처나 회화 안에서의 진정성보다, 시대가 어떤 방식으로 추상회화를 '다시 소비하게' 만드는가가 더 중요해 보인다. 여기서 말하는 “과잉 개인주의”와 “AI의 자기 서사 강조 보도자료”라는 표현은 요즘 한국 미술에서도 쉽게 목격되는 장면이다. 대부분의 작가 소개문은 어떤 식으로든 ‘내면 탐구’, ‘감정의 층위’, ‘자아와 자의식’과 같은 테마를 반복하고, 추상회화는 그 서사들을 시각적으로 부풀리기에 가장 적합한 형식으로 작동한다. 그리고 이는 결국 시장과도 너무 잘 맞아떨어지는 구조인 것이다.


비단 시장만의 문제가 아니다. 전시장, 기관, 사기업체 등 다양한 제도적 조건이 ‘리스크 없는 이미지’를 선호하게 만들었고, 추상은 그 조건을 무난히 통과하는 장르가 되었다. 충돌하지 않으면서도 서사를 실을 여지가 많다는 점에서, 이런 구조는 결국 특정 형식이 반복될 수밖에 없는 조건을 강화해 왔다. 나는 이 상황 자체를 단순히 흥미롭다고 말할 수도 없고, 완전히 비관할 수도 없다. 다만 이 반복이 어디까지 갈 것인지, 그럼에도 그 틈 사이에서 어떠한 새로운 재미나 전환의 가능성이 있을지를 꾸준히 지켜보고 싶다.



저자: Martin Herbert

출처: ArtReview

원문 링크: https://artreview.com/jaded-palettes-abstract-expressionism-opinion-martin-herbert/

본 번역은 비영리적 목적으로 작성된 비공식 번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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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과정에서 원문의 의미가 자연스럽게 전달되도록 일부 의역·직역을 병행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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