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공부'를 해본 적이 있는가

학습, 공부, 연구 — 우리가 뭉뚱그려 부르는 것들의 본래 의미

by 세이지SEIJI

수능이라는 단어를 낯설게 보기

대한민국에서 '수능'을 직간접적으로 겪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해마다 11월이면 온 나라가 들썩인다. 수험생을 위해 비행기가 멈추고, 주식시장이 늦게 열리고, 부모들은 절에 가서 빈다. 이 시험 하나가 인생을 가른다고들 믿는다.

그런데 우리는 그냥 '수능, 수능' 하고 부르는 이 시험의 정식 명칭을 진지하게 곱씹어본 적이 있는가?

대학수학능력시험(大學修學能力試驗)

한자를 풀어보면 뜻이 명확하다. 修學(수학)은 '학문을 닦는다'는 뜻이고, 能力(능력)은 그대로 '능력'이다. 즉, 대학에 가서 학문을 닦을 능력이 있는지를 시험한다는 말이다. 대학 수업을 따라올 수 있느냐 없느냐, 그것을 가리겠다는 취지다.

어린이가 '수학능력시험'이라는 말을 처음 들으면 '수학 문제를 푸는 시험'이겠거니 생각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실제 의미는 전혀 다르다. 수학(修學)과 수학(數學)이 아니니까.

그렇다면 질문을 던져보자. 지금의 수능은 정말 '대학에서 학문을 닦을 능력'을 측정하고 있는가?



총점으로 서열 매기기

철학과에 가고 싶은 학생이 있다고 하자. 이 학생에게 미적분 실력이 반드시 필요한가? 중학교 수준의 수학 지식만 있어도 철학 텍스트를 읽고 사유하는 데 큰 지장이 없을 것이다. 역사학, 문학, 사회학도 마찬가지다.

반대로 컴퓨터공학이나 물리학을 전공하려는 학생에게 수능 영어 지문 해석 능력이 얼마나 결정적인가? 영어 논문을 읽을 일이 있겠지만, 그건 대학에 가서 훈련해도 되는 일이다.

그런데 현실은 어떤가. 의대에 가려면 국어, 수학, 영어, 사회 및 과학탐구 전 과목에서 최상위권이어야 한다. 의학을 공부할 능력을 보는 게 아니라, 전 과목 총점으로 줄을 세운다. 문과든 이과든, 예체능이든, 결국 같은 잣대로 서열이 매겨진다.

'대학수학능력'이라는 본래 취지는 어디로 갔는가. 이 시험은 특정 전공을 수학할 능력을 측정하는 게 아니다. 그저 '누가 더 높은 점수를 받았는가'를 가리는 서열화 도구가 되어버렸다.

더 기묘한 일도 있다. 학과마다 커트라인이 다른 이유는 그 학문이 더 어려워서가 아니다. 단지 인기가 많아서 지원자가 몰리기 때문이다. 경쟁률이 높으니 점수가 높은 사람만 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 학문의 난이도와 수능 점수 사이에는 아무런 논리적 연관이 없다.

결국 대부분의 학생은 '내가 무엇을 공부하고 싶은가'가 아니라 '내 점수로 어디를 갈 수 있는가'를 먼저 묻게 된다. 순서가 완전히 뒤집혔다.



학습, 공부, 연구 — 세 단어의 결정적 차이

우리는 이 모든 것을 그냥 '공부'라고 부른다. 수능 공부, 취업 공부, 자격증 공부, 영어 공부. 하지만 이 단어들 안에는 본래 서로 다른 의미가 담겨 있다.

먼저 학습(學習)을 보자. 學(학)은 '배운다'는 뜻이고, 習(습)은 '익힌다', '반복한다'는 뜻이다. 새가 날갯짓을 반복해서 나는 법을 익히는 모양에서 왔다고 한다. 학습은 기존 지식을 받아들이고 반복해서 익히는 과정이다. 일종의 입력(input) 단계다.

다음으로 공부(工夫). 工(공)은 '장인의 일'을, 夫(부)는 '힘을 들인다'를 뜻한다. 합치면 '공력을 들인다', '애쓴다'는 의미가 된다. 그냥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힘을 쏟아 무언가를 이루려는 노력이 담겨 있다. 불교에서도 '공부'는 수행과 정진을 뜻했다. 단순한 지식 습득이 아니라, 받아들인 것을 씹고 소화하고(digest) 자기 것으로 만드는 과정이다.

마지막으로 연구(硏究). 硏(연)은 '갈다', '닦다'는 뜻이고, 究(구)는 '깊이 파고들다', '끝까지 탐구하다'는 뜻이다. 이미 알고 있는 것에 머무르지 않고, 아직 밝혀지지 않은 것을 향해 파고드는 일이다. 기존 학문에 새로운 무언가를 더하는 창조적 산출(creative output) 단계다.

정리하면 이렇다.

학습: 받아들이는 단계 (input)


공부: 소화하고 자기 것으로 만드는 단계 (digest)


연구: 새로운 것을 더하는 단계 (creative output)


그런데 현실에서는 이 모든 게 그냥 '공부'로 뭉뚱그려진다. 수능 문제집을 푸는 것도 공부, 대학원에서 논문을 쓰는 것도 공부, 유튜브로 주식 투자법을 배우는 것도 공부. 의미의 층위가 완전히 다른 활동들이 같은 단어 안에 섞여버렸다.

이 혼동이 왜 문제인가? 학습만 하고도 "나는 공부했다"라고 착각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기존 지식을 받아들이고 외우기만 했는데, 그것을 공부라고 부르는 순간 무언가를 이룬 것 같은 착시가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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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민이 없으면 공부가 아니다

내가 생각하는 공부에는 반드시 '고민'이 동행해야 한다.

앞 세대가 쌓아놓은 지식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달달 외우는 것, 그것은 학습이다. 물론 학습은 필요하다. 내가 아는 게 너무 얕으면 고민 자체가 어설퍼질 수 있으니까. 하지만 학습에서 멈추면 안 된다.

받아들인 지식을 가지고 "정말 그런가?", "왜 그런가?", "다르게 볼 수는 없는가?"라고 물어야 한다. 기존 지식에 자신의 의문과 시선을 더해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공부가 된다.

수능 만점을 받은 학생이 있다고 하자. 이 학생은 분명 뛰어난 학습자다. 주어진 범위 내에서 지식을 정확히 습득하고 문제 유형에 맞게 적용하는 능력이 탁월한 것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이 학생이 '공부를 잘한다'라고 말할 수 있을까?

대학에 가서 교수의 강의를 받아 적고, 시험 범위를 외우고, 학점을 잘 받는다. 이것도 학습이다. 졸업장을 받고, 취업에 성공한다. 그런데 4년 내내 단 한 번도 "이 이론이 정말 맞는가?", "다른 관점은 없는가?"라고 묻지 않았다면, 과연 그 사람은 '공부'를 한 것인가?

나는 그것을 공부라고 부르기 어렵다. 그건 정교한 학습이고, 성실한 지식 습득이며, 훌륭한 적응이다. 하지만 공부는 아니다.



대학은 어디로 갔는가

대학(大學)의 본래 의미는 무엇인가. 큰 배움의 장소, 높은 수준의 학문을 닦는 곳이다. 역사적으로 대학은 연구기관이었다. 아직 밝혀지지 않은 것을 탐구하고, 기존 학문에 새로운 것을 더하고, 지식의 지평을 넓히는 곳.

그런데 지금 한국의 대학은 무엇이 되었는가.

취업률로 학과를 평가하고, 취업이 잘 되는 학과는 정원을 늘리고, 취업이 안 되는 학과는 통폐합하거나 없앤다. 철학과, 역사학과, 문학과 같은 인문학 전공들이 전국에서 줄줄이 사라지고 있다.

대학이 연구기관이라면, 사실 모든 분야가 필요하다. 연구할 수 없는 분야가 어디 있는가? 철학도 연구해야 하고, 역사도 연구해야 하고, 문학도 연구해야 한다. 그런데 '졸업 후 취업이 되느냐'라는 잣대로 학문의 존폐를 결정한다. 대학이 연구기관이 아니라 취업학원이 되어버린 것이다.

물론 모든 사람이 연구자가 될 필요는 없다. 세상에는 배관공도 필요하고, 요리사도 필요하고, 마케터도 필요하다. 그리고 그런 직업을 위한 실용적 훈련 과정이 필요한 것도 사실이다.

문제는 그것을 왜 '대학'이라고 부르며 같은 틀에 욱여넣느냐는 것이다.

연구를 하고 싶은 사람과 취업 기술을 익히고 싶은 사람은 목적이 다르다. 그런데 둘 다 '대학생'이 되어 같은 학위를 받고, 같은 시스템 안에서 경쟁한다. 그 결과, 연구를 하고 싶은 사람은 취업 스펙을 쌓느라 연구할 시간이 없고, 취업이 목적인 사람은 굳이 필요 없는 학술적 수업을 들으며 4년을 허비한다.

양쪽 모두에게 손해다.



입구는 넓게, 출구는 까다롭게

프랑스의 대학 시스템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는가?

물론 프랑스 교육이 만병통치약이라는 말은 아니니 오해말기를. 프랑스 교육시스템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나름의 문제가 있을 것이다. 엘리트 양성 기관인 그랑제콜(Grandes Écoles)과 일반 대학 사이의 격차 문제, 높은 중도 포기율 같은 비판도 있다.

하지만 적어도 한 가지, 그들의 시스템에서 일리 있어 보이는 부분이 있다. 바칼로레아(대학입학자격시험)만 통과하면 누구나 원하는 대학과 학과에 입학할 수 있다는 점이다. 입구는 비교적 열려 있다. 대신 졸업은 쉽지 않다. 제대로 공부하지 않으면 유급당하고, 결국 졸업하지 못한다.

입구에서 줄 세우는 게 아니라, 출구에서 증명하라는 것이다.


이 방식이 더 이치에 맞지 않은가?

적어도 '공부하고 싶은 분야에 공부를 시도해 볼 기회'는 모두에게 열려 있어야 한다. 해보고 적성에 맞지 않으면 전공을 바꾸면 된다. 실제로 수학능력이 안 되면 유급하거나 중도 포기하면 된다. 스스로 경험하고 판단할 기회를 주는 것이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18세에 치른 시험 점수로 그 기회 자체가 차단된다. 겨우 고등학교를 졸업한 나이에 자기가 어떤 분야를 잘 해낼 수 있을지 어떻게 알겠는가. 각 분야의 실제 모습이 어떤지도 모르면서, 점수에 맞춰 과를 선택한다. 비싼 등록금 내고 4년을 보내야 하는 일인데 말이다.

입구에서 걸러내는 시스템은 효율적으로 보일 수 있다. 하지만 그 효율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대학 행정의 편의를 위한 것이지, 학생의 성장을 위한 것은 아니다.



그래서, 공부란 무엇인가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자. 공부란 무엇인가.

나는 이렇게 정의하고 싶다.

공부란 기존 지식을 받아들인 후, 그것을 자기 안에서 씹고 뜯고 맛보며, "정말 그런가?"라고 묻는 과정이다. 고민 없이 수용만 하면 학습이다. 고민을 통해 자기 시선을 더할 때 비로소 공부가 된다.

그리고 그 공부가 깊어져서 기존에 없던 새로운 무언가를 세상에 내놓을 때, 그것이 연구가 된다.

세 단계는 이어져 있지만, 같은 것이 아니다.

문제는 우리 사회가 이 구분을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학습을 공부라 부르고, 공부를 스펙 쌓기와 혼동하고, 연구는 '취업 안 되는 일'로 치부한다. 대학은 취업학원이 되었고, 수능은 서열화 도구가 되었으며, '공부 잘한다'는 말은 '시험 점수가 높다'는 뜻이 되어버렸다.


나는 묻고 싶다.

당신은 '학습'을 해왔는가, '공부'를 해왔는가?

받아들이기만 했는가, 고민해 본 적이 있는가?

누군가가 정리해 놓은 지식을 외우는 것과, 그 지식에 "왜?"라고 묻는 것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강이 있다. 그 강을 건너본 사람만이 공부가 무엇인지 안다.

수능 점수가 높은 사람이 공부를 잘하는 게 아니다. 유명 대학을 나온 사람이 공부를 한 게 아니다. 자격증을 많이 딴 사람이 공부를 많이 한 게 아니다.

고민해 본 사람, 질문해 본 사람, 기존의 것에 자기 생각을 더해본 사람.

그 사람이 공부를 한 사람이다.


당신은 공부를 해본 적이 있는가?

이 질문 앞에서 당신은 무엇이라 답하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