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잠이 덜 깬 채 식탁에 앉은 막내가 멍하니 턱을 괴고 있었다.
'밥상에서 턱 괴는 거 아니야!'
하마터면 이 말을 할 뻔했다. 그 말이 실제로 튀어나오지 않아 정말 다행이었다. 그나저나 식탁에서 턱을 괴면 왜 안된다고 했더라?
"엄마 빨리 죽으라고 고사 지내니?"
턱을 괴는 것은 좋은 자세라 할 수 없으니 그랬겠지만, 엄마의 매운 표현 덕분에 나는 턱을 괴고 싶을 때마다 그 말을 떠올릴 수 있었다. 그 외에도 식사 중에 왜 말을 하면 안 되는지 베개는 왜 세로로 세우면 안 되고 문지방을 밟으면 왜 복이 달아나는 건지 이유도 알 수 없이 금기된 것이 많기도 했었다.
가끔 나는 밤에 휘파람을 불면 나온다는 뱀의 생김새를 상상하곤 했었다. 큰 뱀일까? 작은 뱀일까? 문지방을 밟으면 달아난다는 '복'이란 것이 어떻게 생겼는지 보고 싶어서 떨리는 마음으로 문지방 위에 올라서기도 했었다. 그것들은 모두 형태도 없이 나를 두렵게 하는 수많은 허들이었다. 나는 그것을 찾아내 직접 확인해 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었는데, 나도 모르게 막내에게 그 말을 할 뻔한 거였다.
언제부턴가 어떤 모임에 가거나 새로운 관계를 맺게 됐을 때 통과의례처럼 '나이'를 묻는 순간 그 관계에 흥미를 잃는다는 것을 알게 됐다. 다시 말해 나는 서로의 정확한 나이를 교환하기 전까지의 관계가 좋았다. 현재 서로에게 느껴지는 에너지를 있는 그대로 느낄 때가 가장 즐거웠다.
상대가 설명한 정보에는 상상할 여지가 없어 생동감보단 편견이 생겼고, 무엇보다 나이 따위 상관없이 대화가 통할 관계가 그리웠다. '처음 뵙겠습니다!' 하는 순간부터 ‘현재'로 시작되어 ' 미래'를 보여주는 관계 말이다.
이런 면에서 어린이들과 만나는 일은 즐겁다.
선생님은 꿈이 뭐예요?
나중에 커서 어떤 사람이 되고 싶어요?
희원이가 나에게 이런 질문을 해줬을 때, 나는 조금 더 훌륭하게 자라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편견 없는 어린이의 질문을 받고 조용히 내 꿈을 되짚어 보게 됐던 것이다.
"음... 나는 그냥... 사람!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라고 말했더니,
"에이 선생님, 장난하지 말고요. 사람은 벌써 됐잖아요! 하하하하하"
내 말이 장난이라고 생각한 희원이와 한참 같이 웃었지만 사실이었다. 나는 정말 '사람'이 되고 싶었다. 나이와 상관없이 친구가 될 어린이를 닮고 싶었다. ‘여자 다움'이나 '엄마 다움'처럼 사회적, 관습적 강요에서 배제된 한 '존재'로서의 사람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어떤 허들에도 가로막히지 않은 따뜻한 피가 도는 그냥 '사람' 말이다.
여전히 식탁에서 턱을 괸 채 잠을 쫓는 막내의 맞은편 자리에 턱에 꽃받침을 하고 마주 앉았다. 우린 말없이 서로 마주 보다 깔깔대고 웃었다. 내 아이가 ‘나 다움’ 외에 다른 어떤 '다움'도 강요받지 않는 세상에 살 길 바랐다.
우린 손을 잡고
앞에 놓인 '허들' 하나를 가볍게 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