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 더 신중해야 한다. 최소한 좋다는 게 어떤 마음인지는 알고 했어야 했다. 나쁘지 않으면 그냥 좋은 거라며 안일하고 습관적으로 좋거나 또는 싫은 것을 표현하며 살고 있는 건 아닐까?
차(茶) 공방을 떠나, S 선생님과 도착한 곳은 제주 곶자왈이었다. 숲 밖엔 다시 비가 쏟아지는 것 같았지만, 숲 속은 산책로를 사이에 두고 양쪽에 줄지어 선 나무들이 가지를 뻗었고, 서로를 부둥켜안고 얽히고설켜 덩굴을 이루고 있었다. 원시림을 닮은 숲길에서는 비를 맞지 않고도 걸을 수 있었다. 다만, '람사르 습지'를 품은 곶자왈이라 몹시 습한 탓에 흠뻑 젖은 채 5.1Km를 걸었다.
평소, 생각이 많고 머리가 복잡할 때마다 나는 가장 먼저 숲을 떠올렸고, 주저 없이 숲을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었다. 숲을 걸으며 맡는 진한 초록 향과 바람에 흔들린 나뭇잎이 서로 일제히 몸을 부딪히며 쏴-아- 바다 닮은 소리를 내거나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운 새소리에 위로받곤 했기 때문이다.
그날은 ‘모르면 풀'이고 '알면 약'이 되는 ’ 찻잎 체험‘을 한 때문인지, 숲을 좋아한다기엔 영 면목없는 방문자란 생각이 들어서 걷는 내내 반성하는 마음이었다.
나는 완벽한 '식물맹'과 '식물 문외한'으로 살며, 숲에 가득한 식물의 이름하나 제대로 아는 게 없었고, 바쁘다는 이유로 몇 달 혹은 일 년에 한두 번, 시간이 있을 때에야 겨우 숲을 찾았다. 사정이 이런데도 숲을 좋아한다고 말해도 괜찮을까?
좋아한다는 것은 아무리 바빠도 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할 수 있는 마음이다. 궁금하고, 알고 싶은 마음으로 자꾸 들여다보다 결국 내가 닮아가는 것 말이다.
일상에서도 우린 최대한 소중하고 좋아하는 존재를 내 주변에 둘 것이지만, 그 존재를 얼마나 찬찬히 들여다 보고 소중히 여기는지는 생각해 볼 문제였다. 가족도 친구도 반려동물들까지, 나는 좋아한다는 말에 걸맞게 좋아할 줄 아는 사람일까?
'이름 없는 풀'이란 말은 '식물 문외한'의 핑계일 뿐, 세상에 '이름 없는 풀'은 없었다. 다만 '이름 모를 풀'이 있을 뿐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앞으로도 숲을 좋아하고 싶다. 이제라도 찬찬히 자주 들여다 보고, 있는 그대로 바라본 뒤에 진심으로 숲을 좋아한다고 말해볼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