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후의 방어선이 결국 무너지고 말았다. '교육'이라는 말로 포장됐던 둑이 터졌다. 한 젊은 초임 교사가 목숨을 걸고 신호탄을 터트렸고, 이제 좀 더 솔직해지라는 명징한 메시지가 전해졌다. 이일을 계기로 교사들은 서로를 지키기 위해 연대하고 있지만, 그것만으론 어림없다. 지혜로운 다수의 학부모가 함께 연대해 아이들을 지켜내는 일에 동참해야 한다.
사건이 알려지자 '교권'과 '아동권'을 시소 태우며 다시 여론 몰이가 시작됐다. 댓글에는 '말 안 듣는 아이들은 두들겨 패야 한다'는 극단적인 글이 도배됐다. 이런 식 발상은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아동권이든 교권이든 보호자의 권리 중 어느 것 하나, 더하고 덜한 것이 있을 수 없는 '사람의 권리' 문제기 때문이다.
'백년지대계'라 하여 백 년을 보고 세운 교육 계획이 앞으로의 백 년을 좌우한다 했지만, 우리의 교육 현장은 정치인들의 얕은수에 좌지우지되는 게 현실이었다. 결국, 초등학교부터 12년의 교육 과정은 출세와 취업을 위한 도구로 전락하였고, 초등학교 때부터 경쟁과 비교에 노출되면서 대부분의 비교우위가 '돈'으로 가름되는 세상이 됐다. 인명경시 풍조는 우리가 기사를 보고도 믿지 못할 사건을 통해 '괴물'을 목도하게 했지만 그마저도 더 이상 놀랍지 않은 일이 되고 있다.
은행이나 관공서에 전화를 하면 통화 연결 전에 안내 음성이 나온다. 폭언, 성희롱등을 하지 말아 달라 누군가의 소중한 가족임을 알아달라는 메시지가 이젠 익숙해졌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익명성 뒤에 숨어 갑질로 감정 노동자를 양산해 왔는지 짐작 가는 대목이다.
공공기관이면서 이런 안내 멘트가 없는 유일한 곳이 '학교'일 것이다. 이미 선을 넘은 학부모의 교권침해 관련 뉴스가 들려온 지 십여 년이 넘었다. 교사가 학부모 민원처리에 휘둘리고 있는 것이 공공연한 현실이었지만, 이런 식 안내 멘트를 할 수 없던 이유도 그곳이 학교라는 이름의 교육현장이기 때문일 것이다.
마지막까지 가장 안전해야 할 어린이의 교육 현장이며 신뢰로써 보호받아야 되는 곳 말이다. 교육 혜택을 많이 받지 못한 세대였던 과거 부모들은 내 자식을 가르치고 돌보는 이를 한없이 존중하므로 자식에 대한 깊은 사랑을 표현해 왔다.
이제 부모는 좀 더 지혜로워져야 한다. 학부모가 ‘민원인’이 되어 수시로 목소리를 높이는 상황에서 감정 노동자로 전락한 교사와 내 아이가 어떻게 즐겁게 학교 생활을 할 것인가! 수업 외에 과중한 업무 부담을 지우는 행정 역시 아이들이 받아야 할 교육의 질에 대한 고민을 하지 않는 처사인 것이다.
갈수록 충동조절에 어려움을 겪는 아동이 많아지는 게 현실이다. 학급마다 경중이 다를 뿐 비슷한 증상을 갖고 있는 아이들이 몇 명씩 있고 그로 인해 교사나 나머지 아동들에게 피해 아닌 피해를 입히게 되는 것도 사실이었다. 이 아이들은 단순 '문제아'가 아닌, 시기를 놓치지 않고 적절한 치료를 받고 보호받아야 할 또 다른 아동인 것이다. 하지만 아이의 병원치료 자체를 부정적으로 생각해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는 부모는 아직도 많고 엄밀히 따져 그거야 말로 '방치'에 해당하는 일이 아닐까?
내 아이의 문제를 충분히 인지하고 적절한 치료와 관계기관의 도움을 받는 일, 아이가 '학교'라는 공동체에 적응하도록 건강히 협조해야 함은 양육자의 당연한 의무가 돼야 한다. 피해가 발생했을 때 역시 양육자로서 적극적으로 대처할 수 있도록 매뉴얼 만드는 일이 이제라도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부모가 된 이상
포기할 수 없는 존재가 바로 '자식'일 것이다.
부모가 앞장서 돌보지 않고 외부의 탓으로 돌릴 수 없는 것도 자식일이다. 이러한 참담한 현실에도 아직 현명하게 자녀 교육을 시키려는 부모가 더 많다는 것도 알고 있다. 가르치는 이와 부모의 긍정적인 협조만이 아이를 바르게 키울 열쇠라는 믿음을 지키기 위해, 지금은 작지만 선한 연대의 큰 힘을 보여줄 때이다.
이미 무너진 둑을 무너지지 않았다고 더 이상 말 할 수 없다. 한 교사가 남긴 메시지와 폭행당한 교사 사건은 더 이상 개인의 문제로 끝낼 수 없다. 우린 이제라도 겸허하게 서로 무릎을 당겨 앉아 아이들의 미래에 대해 진심을 걸어야 할 것이다. 지금은 부모가 달라질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