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춤
길어진 삶에 먹고 살 최소한의 일자리를 걱정하고, 아이들 웃음소리 듣기 어렵다는 미래를 염려하던 일은 이제 평화롭던 먼 과거 일이 된 것 같다. 우리 상상력은 형편없이 빈약했다. 100세를 살 일에 등 뒤까지 살펴야 될 줄 짐작이나 했을까?
'마지막 보루'라고 믿던 공교육 현장의 민낯도 여실히 드러났다. 교사가 교실에서 목숨을 끊고, 학부모는 아이를 볼모 삼은 악성 민원인으로 전락했다. 악성 민원의 사례는 끝없이 쏟아져 나왔다.
지난 토요일 성인 수업 시간이었다. 요즘 벌어지는 일련의 사건에 대한 다른 생각을 들어 보고 싶었다. 30대 후반인 그녀가 전한 '학교'에 대한 평가는 무척 단호했다.
"음.. 저희 때도 체벌이 있었죠. 경쟁해야 했고, 성적으로 모든 게 평가 됐던 것 같아요. 문제 하나 틀리고 맞는 게 너희 인생을 바꿀 수 있다는 식의 감정을 통재당한 기억 밖에 없어요.“
무조건 위로만 올라가야 한다는 강박과 온갖 스펙을 쌓기 위해 고군분투한 시간이지만, 감정을 배제당한 교습법을 경험한 탓에 학교나 선생님에 대한 그리움이나 추억이 남기 어렵다고 선을 그었다. 이제 그들이 학부모가 됐다.
추락한 교권을 회복해야 한다는 자성의 목소리가 높아지는 가운데, 폭염의 열기만큼 뜨거운 '혐오를 위한 혐오'가 본질을 흐리는 나날이다. 결국 시스템의 부재에서 생긴 문제임에도 대안도 없는 공격으로 서로 상처만 내고 있는 것이다.
어른들의 이런 외침 속엔 가장 중요시 여겨져야 할 어린이나 장애아에 대한 대책은 보이지 않았다. '인재'를 자원으로 여긴 사회 구조에서 '유능하지 못한 존재'에 대한 배려나 양보를 찾아보기 어렵다. 곪을 데로 곪은 문제들이 터지기 시작했다.
20대 청년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거리에서 칼춤을 추게 된 일을 정말 개인의 일탈로만 봐도 될까? 그들이 '사이코패스' 진단을 받았으니 다시 맘 놓고 거리를 활보할 수 있는 걸까? 우리는 지금, 늦은 귀가를 나무라는 엄마를 아들이 살해하고, 제자가 10년 전 은사를 찾아가 학교에서 칼을 휘두르는 지경에 당도했다. 그것도 모자라 전국의 주요 장소에서 칼춤을 예고한 경고장이 날아들며, 온 국민을 불안에 빠트리고 있다. 이미 언제 어디서 날아들지 모를 칼을 피하기 위해 배낭형식의 가방을 메라는 웃지 못할 매뉴얼 마저 나왔다.
과거 학교폭력이 사회문제로 대두될 즈음, 외국처럼 학교에 경찰이 상주해야 한다는 기사를 처음 접했을 때 느낀 거부감을 잊을 수 없다. 하지만 이제 우리도 어쩔 수 없게 됐다. '배우고 가르치는 이들'의 안전을 어떻게든 지켜낼 수밖에 없다. 학부모를 포함한 외부인이 사전 예약 없이 학교로 출입할 수 없도록 더욱 견고한 보안을 갖춰야 할 때가 됐다.
현재 학교의 일반인 진입장벽은 전무한 수준이다. 행정실 민원서류 발급을 이유로도 얼마든지 일반인이 교내로 진입할 수 있고, 지나가다 갑자기 화장실이 급하다며 학교로 들어오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알면 깜짝 놀랄 것이다.
앞으로도 세상은 우리의 상상력을 앞서 갈 것이다. 그렇다고 삶의 일상을 '운'에 맡기고 살 수는 없지 않은가? 사나운 세상에서 아이들은 또 어떻게 키워야 할까! 피해자가 되지 않는 것은 물론 타인에게 해를 끼치지 않도록 키우는 일이 부모와 이 사회에 던져진 숙제가 됐다.
어쩌면 우리는 다시 아날로그 시대로 조금씩 돌아가야 될지 모른다. 타인과의 비교와 경쟁에 부치는 삶으로부터 스스로 멀어지려는 노력이 필요한 때이다.
세상이 요동치는 것에 영향받지 않을 내공을 키우는 것이 나를 지키는 가장 큰 무기가 될 수 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좇는 삶이 아닌,
가장 작고 여린 것으로
시선을 돌릴 때에야
회복할 미래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