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시, 당근이세요?
이 집으로 이사 올 때였다. 앞에 살던 사람이 책장 두 개를 쓰겠냐고 했다. 상태가 깨끗하기도 해서 받아뒀는데, 하나는 필요가 없게 되어 지역 당근 마켓에 무료 나눔으로 내놨다. 무료 나눔이기도 했지만, 책장 상태도 좋았던 터라 순식간에 여러 명이 줄을 섰다. 나는 바로 올 수 있는 분께 드리겠다 했고, 결국 한분이 오기로 됐다.
일반적으로 책장 크기의 가구를 가져가려면 2명의 인원이 용달 정도의 차를 가지고 오고, 나는 전해주기만 하면 된다고 알고 있었다. 나는 미리 문 앞까지 책장을 끌어다 놓고 내주기만 할 요량이었다.
잠시뒤, 초로의 신사분이 도착했지만 어르신은 혼자였고, 트럭이 아닌 소형 SUV를 타고 오셨다. 우리 집이 1층이긴 해도 대여섯 개 계단이 있는 구조라 어르신 혼자 책장을 옮기는 건 애초에 불가능했다. 고민할 것 없이 나는 어르신을 도와 책장을 끌어내기 시작했다.
책장은 생각보다 훨씬 무거웠다. 둘이 들어도 낑낑거리며 내려야 할 판이었는데, 어쩐 일인지 그분은 영 힘을 내지 못하실 뿐 아니라, 당초에 어딜 잡아야 할지도 모르는 것 같았다.
"어, 어, 어, 미안합니다"
연신 같은 말만 하는 모습이 궂은일이라곤 안 해보신 게 틀림없었다.
다음 문제는 소형 SUV 차량의 트렁크 문을 열고, 좌석을 모두 눕힌 다음 그 위에 책꽂이를 길게 밀어 넣어야 했는데, 손가락 한마디만큼 이 모자라 트렁크 문이 안 닫혔다. 몇 번을 해도 마찬가지였다. 그때도 그분은 미안합니다, 만할 뿐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하.. 어쩌다 이런 날벼락이...'
난 이미 주도적으로 책꽂이를 끌어내고 차에 넣으려다 팔이며 다리가 여기저기 긁히고 멍이 올라왔지만, 어르신을 도와 얼른 보내드릴 생각 밖에 없었다.
백방으로 트렁크 문 닫을 방법만 찾던 그때, 차 안에 커다란 타월이 하나 보였다. 내가 타월을 조수석 등받이에 깔고 책꽂이를 다시 한번 밀어 넣자 드디어 트렁크 문이 닫혔다. 어찌나 기쁜지 맥락 없이 환호성이 나올 뻔했고, 어르신과 하이파이브라도 할 판이었다. 팔이 후들후들 떨리고 옆구리며 온몸 여기저기가 쓰리고 아픈 게 느껴지자 그제야 사태 파악이 됐다.
'와, 이 어르신 뭐냐. 어쩌시려고 혼자 이 차로 책장 옮길 생각을 하고 오신 거지? 분명 책장 사이즈도 미리 다 공지했건만, 무료 나눔에 온다던 사람도 많았는데 하필.. 아이고 아파라.'
생각만 그럴 뿐, 나는 차마 냉큼 뒤돌아 들어오지 못했다.
'근데, 이 차를 운전은 하고 가실 수 있는 걸까?'
우린 서로 코가 땅에 닿도록 인사를 나눴고, 차가 조심히 움직이는 것을 본 뒤에야 집으로 들어왔다.
'나는 정말 일거리가 제 발로 걸어 들어오나 봐. 어쩜 좋은 마음으로 나눔을 하는데도 이렇게 힘겨울 일이냐고!‘
여기저기 쓸린 상처에 약을 바르며 이 같은 말을 구시렁거린 것 같다.
얼마 뒤, 다시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 나가 보니 그분이 서계셨다. ‘뭐지? 다시 트렁크가 열렸나?’ 가슴이 덜컹했다.
"너무 죄송해서, 드릴 건 없고 이거라도..."
나는 얼결에 건네 주신 책 한 권을 받아놓고 트렁크가 다시 열리지 않은 것에 안도하며 늦어진 청소를 했다. 청소를 마치고 보니, 그분은 당근마켓을 통해 메시지를 남겨 놓았다. ’ 진심으로 도와주시고 잘 가는지 끝까지 바라봐준 마음이 봄날처럼 따뜻했습니다.’
당근마켓 메시지로 받기엔 상당히 문학적인 메시지였다.
'이 어르신 메시지 보니, 험한 일 안 해보신 거 맞네!'
혼자 구시렁거린 게 미안할 정도로, 마음 담긴 메시지를 받고 보니 혼자 괜히 머쓱하기도 했다. 일을 다 마치고, 한참 뒤에야 주신 책을 별생각 없이 펼쳐 봤다.
'뭐라고? 이분이라고?'
책에 있는 저자 사진은 분명 아까 그분이 맞았다. 순간 너무 놀라 헛웃음이 먼저 나왔다. 그분은 하필 우리나라에서 손꼽히는 수필가였고, 해마다 신춘문예 심사위원으로 이름을 올리는 분이었다.
다른 유명인이었다면 이리 놀랄 일도 없었다. 아까 나 혼자 책장을 이리저리 들어 올리다 혹시 나도 모르게 속엣말을 뱉고 그런 건 아니지? 기억을 되짚어 보았다.
우연이나 인연도, 가끔은 악연마저도 언제 어디서든 찾아올 수 있었다. 잠시 인연이 스치는 중고마켓에서도 말이다. 어디에서 , 누가 누군지 알고 함부로 눈을 흘길 것이며, 귀하게 여기지 않을까 말이다. 속엣말조차 한결같을 일이었다. 일단은,
누구든 상냥하게 만나고
친절하게 헤어지기로 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