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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수 Aug 25. 2023

무등이왓에 부는 바람

껍데기는 날리고 알곡은 남기고!

어린이가 돌아왔다
김영화 작가 그림

재작년 여름 서귀포 동광리 '잃어버린 마을'의 밭에선 농사라곤 지어본 적 없는 글, 그림 작가가 모여, 때아닌 조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6월 29일 씨를 뿌렸고, 7월 24일에는 ‘영겟기’를 흔들어 그 땅으로 혼을 불러들이는 제를 지냈다. 함지박에 흰쌀밥을 담아 156개 숟가락을 꽂고 술잔을 올렸다. 어린 넋을 위한 동구리(눈깔사탕)도 잊지 않았다.

김영화 작가 <무등이왓에 부는 바람> 중에서

조를 수확하고 술을 빚어 12월 26일엔 마을 안 '학살터'와 '잠복 학살터'마다 한잔씩 올렸다. 마을 사람들이 숨어 지내던 큰 넓궤 (용암동굴)너럭바위에서 다시 한번 제를 올리고, 동굴 안에 술을 들여놓았다.

이 모든 과정을 함께 했던 김영화 작가는 펜그림으로 그 과정을 기록했고, '무등이왓에 부는 바람'이란 그림책이 완성됐다. 정성에 정성을 더한 4.3 추모의 새로운 방식이 마음을 흔들었다.


나는 서귀포 동광리 마을을 두 번 방문했었다. 처음은 김영화 작가의 북콘서트가 그곳 동광리에서 열렸을 때였다. 북토크 질문자로 무대에 올랐었는데, 미리 질문을 고르면서 그동안 내가 4.3에 대해 얼마나 관심이 있었는지, 4.3에 대한 이해 없이 제주도를 안다고 말할 수 있을지 반문 할 기회가 됐었다.


두 번째 방문은 지난 6월이었다. 그때도 S선생님과 함께였다. 차를 타고 큰 넓궤로 오르던 가파른 길엔 인적도 없이 양옆으로 잡초가 무성했다. 부슬부슬 비까지 내려 서늘한 한기 마저 느껴지던 날이었다.


우린 언덕 위에서 차를 내려 큰 넓궤 쪽으로 걸어 올라가야 했는데, 이정표마다 '학살터'혹은 '잠복 학살터'라고 적혀있었다. 새삼 ‘학살터'라는 단어는 아주 생경했고, 가벼이 입 밖으로 낼 수 없었다.


1차 학살을 하고 잠복한 뒤, 죽은 가족의 시신을 수습하러 나온 때를 노려 다시 학살 했다는 '잠복학살터'는 상상만으로도 치가 떨렸다. 우린 학살터였던 길 끝에서 4.3 당시 어린 학생이던 생존자를 만나 생생한 이야기를 전해 들을 수 있었다. 이미 아흔 살이 넘은 해설자 앞에 선 우리는 저절로 고개가 숙여지고, 두 손이 모아졌다.


며칠 전 제주 뉴스에는 동광리 '삼 밧 구석'에서 4.3 희생자로 보이는 어린이 유골 두 구가 발굴 됐단 보도가 있었다. 큰 넓궤로부터 멀지 않은 곳이었다.

7세-10세로 추정되는 두 구의 어린 유골 옆에서 숟가락 두 개가 나온 대목에서 나는 '동구리 사탕'이 떠올라 목이 매였다. 그 당시엔 토벌대를 피해 굴이나 곶자왈에 숨어 살았기 때문에 몸에 숟가락을 지니고 다녔다 했다.


누군가는 다른 역사적 사건에 비해 4.3 사건을 '급'이 낮은 사건이라 말했다. 이미 지난 일이라거나 정치적 발언으로 4.3 사건을 폄훼하기도 했다. 하지만 70년이 지나 이제야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유골은 어린이의 것이었고, 생존자가 여전히 살아 그날의 진실을 외치고 있었다. 그들은 정치적 이념 따위를 말하지 않았다. 그저 사람, 눈앞에서 무참히 스러진 피붙이를 놓치고 평생 가슴에 뭍은 그 일을 말하는 것이었다.

시간이 걸릴 뿐 진실은 반드시 밝혀질 거라며, 끝날때까지 끝난게 아니라고 말하고 있었다. 나는 70년 세월에 묻힌 그날의 어린이가

총이 아닌 숟가락을 쥐고
우리 앞에 돌아온 모습을 똑똑히 보았다.
김영화작가 그림(무등이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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