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 무언가에 취하지 않고는 살 수 없었던 것이다.
*진격거 4기 1쿨까지 봤다. 완결은 대강 몇 가지만 주워들었으며 그에 대해 잘 모르는 상태에서 작성했다.
*진격거를 안 본 사람을 배려하지 않았으며, 스포가 난무한다.
<진격의 거인>은 뛰어난 아이디어와 콘셉트, 흥미로운 초반 서사로 주목받았지만 의문을 자아내는 결말로 인해 많은 팬들을 실망시켰다. 또한 이야기 곳곳에 심어진 제국주의적 사고방식과 상징들은 애니메이션이 우익이라 불리는 데에 일조했다. 나는 이러한 반응들을 충분히 인지한 뒤 이 작품을 보기 시작했다.
글을 쓰는 이유는 <진격의 거인> 속 상징들에 대해 말해보고 싶어서다. 거인이라는 상징과 그 특징은 한두 개로 요약해 설명할 수 없는데, 작가가 아주 상세한 부분까지 설정을 해두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내가 주목한 부분을 몇 가지 나열해 보겠다. 한 달에 걸쳐 86화에 달하는 애니메이션을 보고 후기를 남긴다는 사실이 내가 이 작품에 갖고 있는 흥미를 보여주리라 믿는다.
거인은 소지자가 계승자에게 먹히는 방식으로 다른 사람에게 계승될 수 있다. (능동적 계승)
거인은 어떻게든 계승되며, 사라지지 않는다. (수동적 계승)
전자에 주목할 때는 거인의 대체 가능성을 말할 수 있겠고, 후자에 주목할 때는 거인의 본질을 고민할 수 있겠다.
전자는 인간이 자유롭지 못한 존재, 즉 대체 가능한 수단으로 사용될 때의 비극을 보여준다. 모두에게 답답함을 안겨준 주인공 에렌이 벌인 참상도 깊게 보면 그가 대체 가능한 인간 병기로 취급된다는 데서 시작한다. 에렌은 믿음을 잃고, 존재 의미를 잃고, 스스로를 무기 이상의 존재로 인식하지 못한다.
후자는 인간에게 부여된 원죄와 닮아 있다. 우리의 역사를 돌아보면, 분명히 악인은 죽고 어떤 시절은 지나감에도 비극은 반복돼왔다. 거인을 계승하지 않으면 새로 태어날 누군가에게 거인의 힘이 부여된다는 설정은 뿌리뽑을 수 없는 세상의 악하고 잔혹한 부분이 자연법칙처럼 존재함을 보여준다.
흥미로웠던 건 ‘기억’에 관한 부분인데, 기억은 전쟁과 역사를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키워드다. 전쟁은 지배기억에 쓰이는 주된 소재이자 지배기억을 만들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시초이자 결과라는 점에서 거인의 본질과도 궤를 같이한다. 작중 시조의 거인은 일족 전체의 기억을 지배할 수 있는데,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에서도 누군가에 의해 공통기억이 취사선택되고 재편되는 모습을 보면 만화적 허용이 하이퍼리얼리즘처럼 느껴진다. 특히나 이 작품은 일본 문학과 콘텐츠에 짙게 깔린 정신승리 정서를 그대로 이어나가고 있다.
작중에는 계승되는 아홉 거인의 힘을 가진 이들이 최고의 전력으로 전장에 나가 대형 무기와 싸우는 장면이 등장한다. 이 부분에서 거인은 말 그대로 巨(클 거)人(사람 인)을 의미한다. 인간의 거대한 노동과 자본이 집약된 세계대전의 무기와 거대한 인간의 싸움. 무기라는 익숙한 존재를 기괴한 거인의 모습으로 치환함으로써 세계의 부조리함이 드러나는데, 작가가 전달하려는 메세지는 이것이지 않았나 추측해 본다.
지크가 내세운 안락사 계획이란 매우 자기파멸적인 길이다. 기독교의 메시아라는 상징과 유사하다. 인류의 거대한 원죄를 메시아라는 존재로 응축해 없애버리는 것. 물론 죽은 지 사흘만에 부활한 예수와는 다른 방식이지만, 흔히 쓰이는 모티프임은 맞다. 실제로 작중에서 옐레나는 세계를 위해 거인의 후예를 모두 안락사하려는 지크의 계획을 전달하며 지크와 에렌 형제가 전례 없는 '신'이 될 것이라 말한다. 우리는 역사의 한 장면을 보고 있는 거라고 덧붙이는 건 덤이다. 작품은 '병사'와 '전사', '에르디아'와 '마레’가 외쳐대는 '대의'와 ‘개인의 서사’를 수없이 교차시킨다. 서사는 입체적일수록 명확히 판단하기 어렵다. 우리는 역사의 한 장면을 보고 있기도 하며, 역사는커녕 눈 앞에서 사랑하는 사람이 죽어가는 학살의 정중앙에 있기도 한다. 작품에서 반복해 말하는 역사라는 것도, 세계라는 것도 사실 단 하나의 현재로부터 유래하는 것임에도 누군가는 역사와 세계를 위해 현재를 죽여버린다. 대부분이 그렇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모두는 노예이며, 어떤 목표에 얽매이며, 자유를 갈망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이 작품은 세계의 잔혹함과 자유에 대한 갈망을 주제의식으로 삼는다. 이는 검색 몇 번으로도 알 수 있는 꽤나 공식적인 정보다. 그리고 모든 주제의식이 <진격의 거인>이라는 작품명에 함축되어 있다. 진격은 자유를 갈망하는 인류를, 거인은 세계의 잔혹함을 상징한다.
나는 예전부터 같은 생각을 갖고 있는데, 인간이 자유를 갈망하는 이유는 당연하게도 자유롭지 못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모든 존재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음을 배정받는다. 절대로 극복할 수 없는 100% 확률이 존재를 규정한다면, 그 존재는 살아생전 절대적 자유를 누릴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모두는 어떤 의미로는 노예인 것이다. '모두 무언가에 취하지 않고는 살 수 없었던 것'이라는 명대사는 작품 속과 같은 전시상황이 아닌 현재 우리의 일상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모두가 '욕망'이라는 이름의 무언가를 취하며 살아간다.
사람이 우수수 죽어나가는 콘텐츠를 볼 때면 이 사실을 잊지 않으려 노력한다. 나도 모르게 누군가의 죽음을 응원하게 되는 무의식적 과정은 종종 불쾌하다. 전시 상황에서 작전을 짤 때, 때로는 목숨보다 다른 가치가 우선시되기도 한다. 혹은 같은 목숨에도 다른 가치를 매기기도 한다. 존재에 따라 다른 목숨값은 만화보다 오히려 현실이 더 잔혹하다. 하지만 죽음의 가치는 동일하다. 남겨진 이에게 어떻게 회자가 될지는 모르겠다만, 인간은 어쨌든 죽는 존재니까.
작품을 통틀어 내가 가장 슬펐던 장면은 사샤 브라우스 에피소드이다. 에렌의 분노가 가비의 분노로 계승되는 과정을 보며 느꼈던 안타까움은, 사샤의 구원이 카야에서 가비로 계승되는 비슷한 구조에서 감동을 준다.
작중에는 등장하지도 않는 선조의 죄로 인해 에르디아인은 악마로 불리운다. 현세에 존재하는 에르디아인 중 누구도 그 죄를 짓지 않았음에도 말이다. 역사 속의 죄는 실체가 되어 증오를 만들어내고, 후세는 알 길 없는 이념 간의 싸움을 이어나간다. 그 과정에서 더 이상 누가 피해자이고 가해자인지는 불분명해지고, 증오와 죽음은 현실을 지배한다. 세계의 잔혹함은 인류가 시공간 속에 살기 때문에 일어난 비극이지 않을까?
제국주의적 시선을 옹호하는 작품을 나는 옹호할 수 없기에, 논란작과 흥행작이라는 낙인이 동시에 찍힌 <진격의 거인>을 볼 때 이 부분을 매우 중점적으로 보았다. 하지만 이 작품을 제국주의 옹호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게 나의 생각이다. 내가 재밌게 봤기 때문에 치는 쉴드는 아니다. 오히려 세계의 이념적, 정치적 대립을 보다 넓은 시선에서 비판적으로 보려 노력한 지점이 눈에 띈다.
현실의 제국주의 역사에는 명백하게 식민국과 식민지가 존재한다. 그러나 작중에서는 식민국과 식민지의 이분법이 등장하지 않는다. 피해국도 가해국도 온전하지 않았다. 각자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생겨나는 부조리만이 보여진다. 벽 안 인류의 적이었던 벽 밖의 거인이 사실은 같은 에르디아인이었으며, 에르디아인을 지배하는 마레는 에르디아로부터 학살당한 과거가 있다. 그곳이 어디든 벽 밖은 배척의 대상이며 중심점이 다양한 곳으로 이동할 뿐인 것이다.
물론 만화 속 얘기로 현실의 제국주의를 대변하기엔 무리가 있다. 내가 하고픈 말은, 이 작품의 소재는 제국주의일지언정, 주제도 그렇지는 않다는 것이다. 다만 몇몇 부분에서 불편한 장면이 존재함은 인정한다. 특히나 이런 소재를 다룰 때에는 신중을 기해야 한다. 제국주의는 피해자가 현존하는 역사이니까.
<진격의 거인>의 주제의식은 뻔하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그 뻔한 주제를 참신한 아이디어와 치밀한 설계로 전개해온 점이 대단하다. 4기 1쿨까지의 애니를 보고 난 지금, 인간이란 무엇인가 하는 물음에 어떤 답을 할 수 있을까?
역시 뻔하디 뻔한 답을 내놓을 수밖에 없겠다. 인간의 한계가 유한함에서 비롯된다면, 인간 존재의 의미 또한 유한함에 있지 않을까. 우리 모두는 동의 없이 세상에 던져진 존재다. 갈망하고, 좌절하고, 잔혹한 세계에 탄식하면서도 벽 밖의 자유를 꿈꾸고, 반짝이는 바다를 보고, 세계의 아름다움에 탄성을 내지른다. "세계는 잔혹하다. 그러나 아름답다." 이 두 문장의 순서가 영원히 전복되지 않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