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 특별 기획 단편>

산타는 내 아픈 기억을 훔쳐 (하)

by 윤설

몇 번을 다시 생각해도 내 친구라는 놈은 미쳤다. 여소 잡아준다면서 정작 당사자인 나와 여성 분에게는 서로의 번호조차 전달하지 않고 중간에서 자기 멋대로 날을 잡아버렸다. 그날이 내가 그녀의 사진을 처음 본 크리스마스 날로부터 이틀 뒤였다.


"시우 씨가 좀 짓궂긴 하죠?"


그녀도 나랑 생각이 크게 다르지 않은 모양이었다. 맑은 날씨의 토요일 오후, 나와 그녀는 적당한 규모의 카페 2층에 마주 앉아 첫 만남을 가지고 있었다. 나이프로 조각낸 빵보다 그놈을 더 많이 씹으면서 말이다.


"그러니까요."


그런데 이게 참 환장할 노릇이었다. 첫 만남에 당연히 따라올 서먹함을 커버하기 위해 적당한 길이로 알찬 말들이 나가줘야 하는데 그게 되지 않았다. 단답으로 겨우 몇 마디 꺼내서 상대의 말에 억지로 구색을 맞추는 것이 내가 하는 전부였다.


이 나이 먹도록 사회 경험이 없는 것도 아니고 연애를 안 해본 것도 아닌데 왜 이리 분위기를 맞추기가 힘든지 알 수 없었다. 분명 숨 쉬듯이 자연스럽게 할 수 있던 것들이었는데...


"파리에는 언제 다녀오셨어요?"


어떻게든 겨우 짜내서 그럴듯한 주제를 열었다. 이것도 그녀가 화장실 다녀온다고 잠시 자리를 비운 틈에 생각해 낸 멘트였다. 처음 친구 놈이 보내준 그녀의 사진을 다시 보면서 가까스로 짜냈다. 미칠 것 같았다. 마치 모래주머니를 차고 축구를 하는 기분이었다.


"프랑스로 간 건 반년쯤 전이에요. 나가서 조금 오래 있었어요. 가게를 하나 준비할 계획이어서 이것저것 배우러 갔었거든요. 한국 들어온 지 얼마 안 됐죠. 세준 씨는 해외에 한 번씩 나가시는 편인가요?"


그래, 이거다. 이런 입체적인 대화를 해야 할 거 아닌가.


"글쎄요. 출장으로 잠시 나간 게 그나마 최근이네요."


"멋지네요. 해외로 출장도 가시고. 어디 다녀오셨어요?"


"미국이요."


진짜 멍청하기 짝이 없다. 미국이 어디 제주도인가? 동부, 서부, 멕시코 국경 지대, 이름만 대도 누구나 알 만한 주들... 추가로 붙일 말이 얼마나 많은데 고작 '미국이요', 이 네 글자가 다라니.


"미국 출장이라. 듣기만 해도 까다로워 보이네요. 일이 힘들지는 않으셨어요?"


"그냥저냥 잘 넘기고 왔어요."


그녀와 내가 마주한 자리를 테니스 코트라고 해보자. 그녀가 점수를 내기 위해 각종 제구와 스매시를 아끼지 않는 선수였다면, 나는 그저 랠리를 이어가는 것에도 벅찬 초짜였다. 이런 부자연스러움이 뻔히 보이는데도 도무지 그 흠을 메꿀 수가 없었다. 그러면서도 긴장감이나 위축됨이라고는 느끼지 않고 무덤덤했던 내 심경은 공포 그 자체였다.


졸지에 사이코패스라도 된 것 같았다. 그나마 다행인 건 그렇듯 감정의 동요가 없었기 때문에 그녀가 하는 말에 매번 웃어 주는 최소한의 에티켓은 지켰다는 것이었다. 설렘 장애, 그 상태로 달콤한 주말이 스쳐갔다.


이상한 일은 평일에도 계속되었다. 크리스마스 다음날에 넣은 이력서를 보고 회사에서 연락이 왔다. 월요일 아침 이른 시간에 받은 연락이었다. 요지는 면접을 보러 오라는 것이었다. 면접 날짜는 12월 30일 화요일, 그러니까 하루 뒤였다.


드디어 인생이 풀리는가 싶을 정도로 내 원하는 바가 착착 이루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세탁 맡긴 정장을 찾아 입고 구두를 새로 샀다. 나름 면접 준비랍시고 집에 돌아와 회사의 아이템, 실적, 전망 등을 스캔하듯이 보는데, 이미 내 직장이라도 된 것마냥 자신감이 끓어 넘쳤다. 그도 그럴 것이 내가 전에 다니던 곳과 큼직한 사업 방향이 비슷했으므로, 몇몇의 일들은 손에 잡힐 듯이 훤히 보였다.


"뭐든 물어봐라. 그리고 말해라. '신정 다음날부터 출근하세요'라고."


아니나 다를까, 면접은 성공적으로 끝났다. 다만, 나의 예상과 다소 차이가 발생한 부분이 있었다.


"오신 김에 계약서 쓰시고 사무실이랑 회사 여기저기도 좀 둘러보시다 가세요. 그러고 내일부터 나오셔서 업무 세팅하시면 딱 좋을 거 같은데..."


사람이 급한 회사라더니 참 일찍부터 부려먹으려고 한다. 뭐, 예상 밖이지만 못할 것도 아니다 싶어 수락하고 나왔다. 사실 요사이 알게 모르게 나를 침식하는 무기력감을 새로운 환경에서 빨리 털어버리고 싶은 마음이 컸다. 이상한 일은 회사를 둘러보던 때부터 일어났다.


왠지 모르게 답답했다. 회사 돌아가는 꼴을 말하는 게 아니다. 나 자신에 대한 문제였다. 사무실 공기, 분주한 회사 분위기, 바삐 서류를 챙겨 들고뛰는 직원, 표정을 구기며 젊은 사원의 보고를 듣는 상사, 전화기 소리, 복사기 소리, 잦은 웅성거림들...


이런 자잘한 모든 것들이 내 심경을 건드렸다. 압박감이 느껴졌다. 오래 듣고 있자니 머리가 절로 아파 왔다.


그랬다. 그때의 내 상태는 사회 초년생으로 회사에 막 입사한 신입과 다르지 않았다. 오히려 그보다 더 심했을지도 모른다. 생판 신입은 긴장감이라도 있어서 무조건 빠릿빠릿하게 움직이며 이런 압박감들을 견뎌 내지만, 제법 경험이 쌓인 나는 그런 것도 없었다.


'말도 안 돼. 이제 와서 왜?'


멍한 정신으로 사무실을 나서는데 등 뒤에서 호통 소리가 들렸다.


"그걸 이제 보고하면 어떡해! 당장 전화 다 돌리고 오후에 판교 쪽부터 순서대로 미팅 잡아!"


아무래도 썩은 표정으로 보고를 받던 상사가 드디어 터진 모양이었다. 하지만, 나는 저 상사가 왜 저렇게 급발진할 수밖에 없는지 대략 짐작이 갔다. 나도 예전 회사에서 나오기 전까지는 팀장 일 하면서 밑에 사람들 적지 않게 잡아 봤다. 물론 그보다 더 많이 상사들로부터 쪼여도 봤다.


그러나 이해를 하는 것과 달리 몸은 따로 놀았다. 가슴이 텁텁해지고 손이 떨렸다. 내일부터 출근해도 되는 건가 하는 의문까지 들었다. 그렇게 하루가 갔다.


12월 31일, 오늘. 나의 우려는 현실이 되었다. 어제 잠깐 느낀 사무실 분위기에도 적응하기 힘들었던 나는 오늘, 그보다 더 긴 시간을 회사에 머무르며 끝없는 고통에 시달렸다. 끊었던 담배를 사 들고 옥상에 올라가 내리 줄담배를 태웠다. 점심을 같이 먹자는 직원들도 있었으나 거절했다. 속이 더부룩한가 싶어 화장실에 가면 변기에 앉기도 전에 구역질부터 났다.


이건 분명 정상이 아니었다. 내 안에 쌓아둔 경험들을 반추하여 지금 이 말도 안 되는 현상을 해결해 보리라 마음먹었다. 정신이 안 따라주면 논리로 돌파하는 수밖에 없는 법, 조용히 내 과거를 훑으며 힘겨운 시간들을 이겨냈던 기억을 떠올려 보았다.


사람 심리는 의외로 민감하다. 단지 기억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당시에 느꼈던 감정의 편린을 일부 가져올 수 있게 된다. 그 기억이 생생할수록 더욱 그렇다. 그런데 그것이 나에게는 해당 사항이 없는 원리였다.


분명 내 인생을 기억하는 것인데도 불구하고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처음 입사 통지를 받았을 때의 기쁨과 안도감도, 전 여자친구와 함께 보냈던 시간들 속에서 느꼈던 따스함도, 상관에게 한 주 내도록 혼이 나며 진땀을 뺐던 아찔함도, 중요한 프로젝트에 사활을 걸며 성공을 기도하던 간절함도... 내 안에 없었다.


기억은 남고 감정은 사라지니 내 인생은 껍데기보다 못한 것이 되어 있었다. 껍데기는 차라리 버리고 그 자리에 다른 걸 놓을 수라도 있지, 내가 살아온 시간들의 무가치는 무엇으로 어떻게 대체할 수 있는가? 심지어 그 기억이라는 것들도 전부 희미하기 짝이 없었다.


현재의 나에게 기억 속 아픔은 깔끔히 거세되어 있었다. 그리고 기쁨도 함께... 어쩌면 나는 아팠던 기억을 잊으면서 그것들과 섞여 있던 내 모든 시간들에 무뎌졌는지 몰랐다.


'산타, 이 망할 도둑놈 새끼!'


퇴근하자마자 집을 향해 달렸다. 평소라면 지하철을 탔겠지만, 지금은 그저 달리고 싶다. 문득 내가 느끼는 이 이질감이 크리스마스 때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을 떠올렸다. 이제 방법은 하나뿐이다. 모든 것을 원래대로 돌려야 한다.


'025-1224-1225.'


집에 들어오자마자 이 웃기지도 않은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지금은 영업시간이 종료되었사오니 다음에 다시 걸어 주시기 바랍니다. 다음 영업시간은 12월 31일 22시 30분부터입니다."


아, 맞다. 영업시간! 2시간 남았다. 정말 이런 장난질에 놀아나줘도 되나 싶지만, 달리 이 골 때리는 현상을 설명할 길이 없다. 무슨 수를 써서든 확인은 해야 한다. 식사도 거르고 집구석을 서성이며 시간을 보냈다. 천천히 120분이 갔다.


"구매는 1번, 반품은 2번을 눌러 주세요."


진짜 이게 맞는가? 정확히 밤 22시 30분에 전화를 걸었을 때 들려온 멘트는 저게 다였다. '안녕하세요, 어디어디입니다.' 뭐, 이런 안내 하나 없이 간결했고, 그래서 수상하기까지 했다.


'반품?'


반신반의하는 마음으로 2번을 눌렀다. 혹시 몰라서 내 통장 안에 있던 돈들은 전부 우리 엄마 계좌로 옮겨 두었다. 신종 사기인지 뭔지는 모르겠지만, 어디 털 수 있으면 털어 봐라!


"반품을 선택하셨습니다. 소거되었던 기억 속 감정 일체가 활성화되며, 관련 기억들이 보다 선명하게 복구됩니다. 계속 진행하시려면 1번, 취소하시려면 2번을 눌러 주세요."


잡았다, 요놈! 역시 원인은 이 전화였다. 기억 속 감정 일체가 다시 살아난다는 말에 잠시 망설였다. 만약 지금 이 상태가 내가 원해서 도달한 결과라면 나는 도대체 얼마나 그 기억들로 인해 아팠던 걸까? 한 번 지우고 싶었을 정도로 고통스러운 감정들이었다면, 다시 그것들을 돌려받았을 때 나는 견딜 수 있을까?


고민은 찰나였다. 견딜 수 없는 건 어차피 현재 상태도 마찬가지다. 이래도 고통, 저래도 고통이라면 차라리 내가 살았던 시간들의 가치를 되찾기로 했다. 위아래로 쭉 뻗은 숫자에 손가락을 올렸다.


"반품 신청이 정상적으로 완료되었습니다. 진정 행복해질 수 있는 사람은 그 행복을 한 번이라도 추구한 적이 있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이용자 박세준 님의 행복한 미래를 응원하겠습니다."


처음과 다르게 은근히 감동 섞인 멘트가 있고 나서 전화는 끊어졌다. 직후 내 머릿속에 하나의 상이 맺혔다. 투명한 유리병이었다.


유리병 안은 전반적으로 잿빛이었다. 정확히는 암울한 회색의 액체가 가득 들어차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그 사이사이로 반짝이는 가루 같은 것들이 보였다. 반짝이는 가루는 그리 많지 않았지만, 짙은 회색과 대비되어 아름다웠다. 마치 탁한 토사 속에서 발견된 사금 같았다. 이윽고 병을 막은 봉인이 열렸다.


'신입이라고 봐주는 것도 한두 번이야! 일 이따위로 할래? 니가 무슨 사장 아들이라도 돼? 내가 매번 따라다니면서 똥이나 치워야겠어?'


'그래도 박 팀장님이 우리를 팔아넘기기야 하겠어? 믿을 만한 사람이잖아.'


'여기는 또 언제 예약했대? 우리 서방님 능력자네!'


'더는 힘들 것 같아. 결혼은 없던 걸로 하자.'


"끄으으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앗!!!"


밀려드는 기억과 감정의 홍수에 머리보다 가슴이 먼저 터져버릴 것 같았다. 희미하던 기억이 선명해지고, 그와 연결된 감정들이 고개를 들자, 정신을 온전히 유지하기 힘들었다. 속수무책이었다. 그대로 죽은 듯이 기절했다.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는 새벽이었다. 영하를 기록하는 날씨였지만 무엇 하나 걸치지 않고 집 밖으로 뛰쳐나갔다. 이미 목은 갈라져 소리조차 마음껏 지를 수 없었다. 어떤 식으로든 이 갑갑함을 떨쳐내야 했다. 근처 공원 벤치 위에 쓰러지듯 누워 하늘을 보았다.


"하, 진짜, 겁나 메리 크리스마스였네."


이제야 모든 것을 잊고 무덤덤하게 지내던 때가 축복이었음을 알았다. 그 망할 유리병이 열리고 내 안으로 쏟아졌던 수치심, 모멸감, 허탈감, 절망감은 여전히 곳곳에서 숨을 쉬고 있었다. 심장이 맥동하는 사이클에 맞춰 불쑥불쑥 드러나며 나를 괴롭혔다. 그래, 그 유리병이 문제였다.


돌연 그 망할 물건을 다시 떠올리는데, 이번에는 뭔가가 달랐다. 회색 액체로 가득 차 있었던 병은 어느새 비워져 있었다. 다만, 중간중간마다 존재감을 드러내며 떠 있던 빛가루들은 아직도 그 병 속에 남아 있었다. 바닥으로 침전해 쌓여 있었다.


병 안이 잿빛으로 가득했을 때에는 몰랐는데, 빛가루들만 남고 나니 그 양도 제법 적지 않았다. 나는 찬찬히 그 아름다운 것들에 의식을 집중했다. 그러다 바지 주머니에서 울리는 진동에 주의를 빼앗겼다. 휴대전화에 새로 입사한 회사 부장님의 카카오톡 메시지가 떠 있었다.


'다시 새해가 밝았습니다. 지난날의 과오와 상처는 잊고 또 한 번 도약할 우리 모두의 1년을 응원하겠습니다!'


우리 부장님, 참 고루하시다. 인기 없으실 텐데... 피식거리면서 스크롤을 올리는데 부장님의 다른 메시지가 보였다. 퇴근 바로 전에 받은 메시지라 이미 확인한 내용이었다.


'이제 막 들어와서 회사 적응하기도 바쁠 텐데 이렇게 어려운 일 맡아 줘서 고맙습니다. 너무 스스로를 몰아세우지 말고, 힘들 때 쉬어 가면서 합시다. 간만에 회사에 인재가 들어오니 연말이 풍성해요.'


어려운 일이라... 아마도 다음 주부터 시작하는 프로젝트의 총괄을 보조하기로 한 일을 말하는 것일 터다. 이 부장님, 컨셉은 고루한데 은근히 정이 많은 스타일이다.


"예솔?"


부장님 톡을 종료하고 메시지함 전체를 훑는데, 미처 읽지 못했던 톡이 하나 보였다. 성이 예고 이름이 솔, 친구 놈이 소개해준 그녀였다.


'혹시, 이번 주말에 시간 괜찮으세요?'


신기하다. 첫 만남에서의 나는 거의 소시오패스 상태였어서 그녀에게 그다지 즐거운 시간을 선물하지도 못했는데 애프터가 왔다. 그런데 톡을 열고 나서야 알았다. 내가 읽지 못했던 그녀의 메시지는 두 개였다.


'시우 씨한테 조금 들었어요. 요즘 여러 일로 많이 힘드시다고. 그런데도 저랑 만나는 내내 웃어 주시고 흔쾌히 시간 보내 주셔서 감사했어요.'


'혹시, 이번 주말에 시간 괜찮으세요?'


회사에서 하루 종일 방황이나 하는 놈을 인재라고 반겨주는 부장이나, 로봇처럼 무성의하게 대답하면서 실실거리기나 하던 놈을 이해하고 다시 만나자는 여자나 참, 문제 많은 인간들이다. 그런데 이 사람들을 위해서 뭐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이 갑작스럽게 들었다.


다시 누군가의 기대가 되고, 기쁨이 되고, 벅찬 추억이 되고 싶었다. 그렇게 행복해지고 싶어졌다. 진정 행복해질 수 있는 사람은 그 행복을 한 번이라도 추구한 적이 있는 사람이라고?


벤치에서 일어나 동이 트는 하늘을 보았다. 새해가 밝아오는 도시의 한 켠에서 나는 내 작은 기원을 속삭여 말했다.


"아! 해피 뉴 이어."

매거진의 이전글<크리스마스 특별 기획 단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