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찬휘의 만화 살롱 #12
대중문화를 사랑하는 이들에게는 각자 조금씩 특별한 해가 있게 마련이다. 바로 특정 작품의 배경이 된 연도다. 그 가운데에서도 특히 미래를 다룬 작품 속의 어떤 해는 마치 올 것 같지 않던 머나먼 어느 시점인 줄만 알았다가 불현듯 현실로 다가와 있음에 화들짝 놀라곤 한다. 당장 지난해인 2019년만 해도 영화 <블레이드 러너>와 더불어 만화이자 애니메이션인 <아키라>라는 걸출한 작품들의 배경이 된 해였고, 그보다 조금 더 앞서서는 애니메이션 <신세기 에반게리온>에서 서드 임팩트라는 사건으로 아예 세계가 멸망에 이른 2016년도 있었다.
한데 이들 햇수가 특정 작품들의 팬 층에게 거론되었다면, 우리나라에서 사람들 사이에 오래 전부터 유난히 많이 거론되던 해는 따로 있었다. 바로 2020년, <2020 우주의 원더키디>(이하 <원더키디>)의 제목에 떡하니 붙어 있던 바로 그 해다. <원더키디>가 1989년 KBS에서 방영된 국산 애니메이션으로 30대 중후반 이상 연령대라면 본방사수는 아니어도 알고는 지나왔을 작품이고, 2020이라는 숫자가 주는 인상도 깊기 때문이기도 하겠다. 덕분에 사람들 사이에선 2020년을 앞두고 지난 수년 간 “이제 몇 년 뒤면(또는 내년이면) 우리도 우주에 갈 수 있는 거야?”이란 말이 농담처럼 곧잘 회자되어 왔더랬다.
기왕 <원더키디> 속 그 시기를 맞이한 지금, 애니메이션이나 영화만이 아니라 만화는 또 어떤 미래상을 그렸었는지 새삼 다시 한 번 들춰보고 싶어졌다.
우리 미래는 디스토피아?
<블레이드 러너>와 <아키라>가 그러했고 실은 <원더키디>가 그러했듯 2020년대쯤 되면 뭔가 인간 세상이 다 망했거나 또는 망하기 직전에 가까이 내몰릴 것 같았나 보다. 1989년에 처음 등장했을 당시엔 이렇게까지 온갖 프랜차이즈를 뻗쳐 나가게 되리라곤 상상도 못했던 만화와 극장판 애니메이션 <공각기동대>도 인간과 사이보그의 경계가 무너져 내린 2029년을 배경으로 일개 프로그램이 ‘네트워크에서 태어난 생명체로서 망명을 신청’하는 모습을 그려 충격을 준 바 있다.
환경 파괴로든 핵전쟁으로든, 또는 기술 발달이 생명체로서의 본질과 경계선을 따져 묻게 만들든 우리에겐 22세기 초 핵전쟁으로 황폐화한 지구를 그린 애니메이션 <영혼기병 라젠카> 삽입곡 ‘라젠카 세이브 어스(Lazenca save us)’의 가사가 말하듯 “스스로 불러온 재앙에 짓눌려” 가리라는 우려가 있다. 징후들은 현실 속에서도 쉴 새 없이 튀어나온다. 머신러닝으로 학습시킨 AI가 범위를 정확하게 지정하지 않은 명제에서 거리낌 없이 일부 인간 집단을 배제하고 살해하라는 답변을 내놓았다는 뉴스가 곧잘 튀어나오는 요즘이다.
만화 <카페 알파>(원제 <요코하마 매물기행>)와 같이 해수면 상승으로 조용히 물속으로 잠겨 사라져가는 인간의 도시에서 자리를 지키고 있는 인간형 로봇을 딱히 슬프거나 비극적이지 않게 그리는 만화도 있지만, 결국 그 <카페 알파> 속에서도 인간은 터전과 함께 점점 사라져 가고 있다. 이탈리아 베네치아나 인도네시아 자카르타는 근래 연례행사처럼 홍수로 물에 잠기고 있으니 이 문제 또한 단순히 미래의 어떤 날이 아니라 이미 엄연한 현실이다. 최근의 호주 전역을 뒤덮은 화마도 결국은 기후변화가 원인이라는 주장이 대두되고 있는 상황이다.
이렇게 문명의 산물이 재앙으로 돌아오고 있다는 징후를 읽을 때면, <북두의 권>이나 <남자 이야기>와 같이 문명의 극단에서 맞이한 종말 이후를 그린 만화들이 원초적인 힘에 좌우되는 모습을 그리고 있는 점이 한층 더 섬뜩하게 다가온다. 1959년 첫 등장한 한국 SF 히어로 만화의 효시 <정의의 사도 라이파이>의 대표적 악역 ‘녹의 여왕’도 고도로 발달한 과학 문명을 이루었다 핵전쟁으로 멸망했다고 설정된 잉카의 생존자로, 우주로 향했다가 22세기에 돌아와 본인이 지닌 잉카 외의 과학 문명을 모조리 박살내려 한다. 역설적이게도 ‘녹의 여왕’은 앞선 과학 문명의 향유자이면서도 과거의 원초적 복식과 사회 체제를 보여주어 종말 이후 인간이 맞이할 삶의 방식과 형태를 은유하고 있다.
결국은 사람이 먼저, 인간성 회복이 답
작품 속 미래상이 내처 비관적이기만 하다고 하면 끝도 없이 암울해지니 조금은 덜 비관적인 이야기를 꺼내 보자. 2014년 개봉한 영화 <인터스텔라>는 <원더키디>와 마찬가지로 인류의 잘못으로 식량 부족에 시달리는 인류가 외계 행성을 찾아 나선다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인터스텔라>가 화제를 모았던 건 물리 이론을 반영한 블랙홀 시각화도 있지만, 이러한 비관적 상황 속에서 던진 “우린 답을 찾을 것이다. 늘 그랬듯이”라는 강력한 메시지 때문이기도 하다. 한데 이 메시지를 보면서 나는 문득 강경옥의 만화 <라비헴 폴리스>를 떠올렸다.
공중부양 에어카가 돌아다니고 달 왕복선이 돌아다니는 2025년 근미래의 남녀 경찰 콤비를 그린 <라비헴 폴리스>에서 주목해 볼만한 건 과학기술이 만들어낸 무언가가 아니라 그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전기차와 수소차도 아직 완전히 보급 안 된 마당에 지금부터 5년 뒤가 되어도 길거리에 딱히 공중부양 자동차가 돌아다닐 것 같진 않지만, 어쨌거나 그 안에서도 사람들은 사랑을 하고, 누군가에게 호감을 품으며, 열광하고 있기도 하다. 그 모습 자체는 지금의 우리 모습과 그리 다르지 않다.
<라비헴 폴리스>의 작가 강경옥은 2025년으로 배경을 정한 이유를 “시간적 배경을 지닌 SF들이 그 시간을 넘긴 후에 가지는 괴리감을 조금 줄여 보자”였다고 밝히며 “어느 시대, 어느 곳이든 결국 인간이 있어 생기는 일들은 변하지 않는다”는 너무나 원론적이고도 정곡에 해당하는 발언을 내놓은 바 있다. 결국은 그 안에서도 인간은 살아갈 것이고, 살아가기 위해 무언가를 하려 들 터다.
물론 끝 갈 데 없이 으르렁거리는 최근의 세계정세에 비추어 보자면 <라비헴 폴리스>보다는 같은 작가의 SF 만화 <노말시티>가 그랬듯 역시 핵폭발 이후 사람 사는 구역과 오염된 채 방치된 구역이 나뉘는 미래가 현실에 더 가까울 수도 있다. 김혜린이 그린 미완의 걸작 SF 만화 <아라크노아> 또한 핵전쟁 이후 과학 기술을 앞세운 파시즘에 젖어든 지구 연방과 그 우주식민지로서 개발된 화성에 모여든 루저들을 비춘다는 점에서 지극히 비관적이다.
<아라크노아>가 주인공 리안 그리피스 프로크너를 비롯한 인물들을 통해 보여주듯, 인간은 종말에 이를 수 있는 참극을 벌여놓고도 그 참극으로 말미암아 겪어야 하는 사람들의 고통을 먹이 삼아 오히려 거대한 힘을 키우기도 한다. 하지만 작품은 “우주가 바다라면 모래알과도 같은 인간”들이 서로의 상처를 알아보고 보듬을 수 있다면-이라는 전제를 끊임없이 되새긴다.
어쩌면 재앙 이후는 물론, 재앙을 일으키지 않을 유일한 방법 또한 그 인간성이라는 지점에 닿아 있지 않을까. 데스 메탈 음악을 소재로 한 개그 만화 <디트로이트 메탈 시티>의 크라우저 2세가 외친 “인간이 죽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친환경이다!!”에 찬성하지 않는 이상에야, 디스토피아임이 확정된 미래에서 그나마의 위안을 찾기보다는 그래도 디스토피아로 향하지만은 않을, 그리고 극복해낼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찾아보고 싶은 심정이다.
(2020.01.04. 작성, 2020.01.07. 일요신문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