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찬휘의 만화 살롱 #15
설날, 일본 만화 속 설 풍경을 떠올리다
유난히 이르게 찾아왔던 음력 설 연휴가 대체 공휴일까지 모두 지나갔다. 민족 대명절이라고는 하지만, 설은 만화와 애니메이션을 오랜 시간 즐겨 보아 온 이들에게는 굉장히 기묘한 기억으로 다가오는 날이기도 하다. 보아온 작품들 가운데 상당수가 일본 작품들이고, 일본 작품들에서 설 풍경이 워낙 반복되어 등장해 왔기 때문에 어느 사이엔가 익숙해진 탓이다. 이를테면 이런 장면들이다. “세밑에 코타츠(화로 등 난방 기구를 탑재하고 이불을 둘러 온기를 가두는 좌식 탁자)에서 TV로 홍백가합전(일본을 대표하는 인기 가수들이 나오는 연말 NHK의 TV프로그램)을 시청하며 놀다가 새해의 시작인 자정에 종소리를 들으며 토시코시소바(해를 넘기는 때에 먹는 메밀국수)를 먹고 새벽에 기모노 차림으로 신사에 가서 손바닥을 마주치며 참배하고 오미쿠지(운세 제비)를 뽑아 그해의 길흉을 점친다” 직접 손으로 쓴 새해 연하장을 제 때 도착하게 하기 위해 새해를 앞두고 일찌감치 엽서 지옥(?)에 빠지는 모습은 별첨이다.
이와 같은 풍경은 우리나라와는 분명 거리가 있고, 심지어 일본이 메이지 유신 이후 음력 설을 폐지해 시기마저 다름에도 ‘일본 설날’ 하면 무의식적으로 떠오르는 장면들이다. 일본의 대중문화들은 이런 풍경들을 시간과 인물들의 감정의 흐름을 묘사하며 일상성도 확보하는 장치로 곧잘 활용해 왔는데, 특히 만화와 애니메이션, 게임 등에서 등장하는 설 풍경은 금붕어 뜨기나 야키소바(볶음국수), 야시장 풍경 등 마츠리(축제) 하면 떠오르는 풍경과 더불어 일종의 클리셰 같은 역할을 한다. <러키스타> 같이 주요 인물이 아예 신사의 딸들로 설정돼 있는 경우가 아니라도 마찬가지다.
한국적인 것에 관한 집착의 정체
반복 학습의 효과는 꽤 놀라운 편이다. 명백히 다른 나라의 풍습인데도 설 하면 자동 재생되듯 떠오르는 건 그만큼 많은 작품들이 같은 장면을 ‘일본의 일상’으로서 그려내 왔기 때문이다. 적당히 전통적인 듯한 느낌과 적당히 가족적인 분위기 등이 뒤섞여 표현된 이들 풍경은 한국에서는 일본 대중문화가 지니고 있던 시장적 우월성, 서구권에서는 오리엔탈리즘과 결부되며 일종의 ‘로망’화한 면도 있었다.
실제로는 한국이 바로 그 일본에게 전통과 과거의 흔적을 모조리 파괴당했던 입장인지라 굉장히 이율배반적인 감정이 들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작품이라는 형태로 생활 문화 속 일면을 반복해 담아내는 모습은 한편으로 부러움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이러한 클리셰스러운 장면들은 비단 설 풍경에만 국한하지 않고, 또 장면 장면을 집요할 만큼 예쁘고 자연스레 묘사하는 점도 있어서 한 때 많은 이들이 만화와 애니메이션을 비롯한 일본 대중문화의 특징을 설명할 때에 중요한 대목으로 언급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런 언급의 뒤엔 늘 “우리는 왜 이런 걸 만들어내지 못할까”라는 자조가 깔리곤 했다.
그래서 한 때 한국 사회 전반은 물론 한국 만화와 애니메이션의 주요 논점이자 화두가 바로 ‘한국적인 것은 무엇인가’였다. 이는 비교적 후발 주자로 대중들에게 들어선 라이트노벨 장르에서도 고스란히 치열한 논쟁으로 이어진 바 있다. 가깝게는 앞서 언급한 설 풍경 같은 ‘일본적인 장면’의 대립항에 놓을 만한 우리의 장면이 무엇이 있는가?라는 점부터 멀리는 작품 속에 담아야 할 한국의 정취와 그림체는 무엇인가에 이르기까지, 한국의 현실 위에서 답이 딱히 나올 수 없을 이야기에 많은 이들이 목을 매 왔다. 이는 역사적인 측면에서 오는 감정과는 별개로 일본의 영향을 강하게 받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었던 일군의 대중문화들이 어쩔 수 없이, 또 오래도록 끌어안고 있던 일종의 콤플렉스들이다. 물론 한국적인 것이 대중 반응의 척도는 아닐 테고 일본 대중문화가 그저 일본적이어서 흥했던 것도 아니겠지만, ‘우리만의 것을 만들지 못할 만큼’ 체급이 낮았다는 패배의식이 자리하고 있었단 사실을 부정할 순 없다.
어느덧 극복한 일본 콤플렉스
재밌는 건 이러한 콤플렉스들이 어느 사이엔가 많은 부분 해소가 되어 가고 있다는 점이다. 분명 일본 문화는 한 때 강점과 우월성을 지니던 시기를 맞았었다. 버블 경기와 그 여파가 남아 있던 시기 많은 돈과 인적 자원이 몰리며 만들어냈던 소프트웨어 파워는 지금 와서 당시의 작품들을 봐도 실로 대단했고, 한국은 많은 부분에서 압도당해 왔다. 하지만 지금도 이러한 우열이 명확하게 갈리느냐 하면 그렇지 않다고 할 수 있다.
원인은 일본 대중문화의 강점을 ‘일본의 우수성’ 따위로 단순하게 해석해선 안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다분히 복합성을 띠고 있다. 한국의 소프트웨어 파워가 올라간 점, 일본의 소프트웨어가 사회·정치 분위기와 더불어 답보와 침체를 거듭하고 있다는 점, 그리고 한국 대중문화의 시장 판도 자체가 바뀌면서 일본의 영향권에서 벗어나 있다는 점 등이 함께 작용한 결과다.
문법과 형태 자체가 완전히 다른 웹툰을 상업적으로 정착시키며 작가와 독자의 세대 교체를 이뤄낸 만화는 물론, 청소년 이하 연령대에 특화하며 오히려 유아·아동 콘텐츠에 특화한 발전을 이뤄낸 캐릭터와 애니메이션은 이제 많은 부분에서 일본의 영향권에서 벗어나 있다. 여기에 혹독한 트레이닝으로 노래와 고난도 퍼포먼스를 겸비하며 양적 질적 수준을 높여 세계 음악 시장에 K-POP 아이돌이라는 상품군을 선보이고 있는 음악에 이르면 어느덧 일본 대중음악을 상징하던 J-POP의 위치를 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2020년 1월 27일 열린 미국 그래미 어워즈에서 호스트를 맡은 앨리시아 키스가 여러 다양한 음악 장르군에 K-POP를 직접 거론한 점은 사소할 수 없는 상징성을 보여준다.
분명 일본 대중문화의 한 시기가 대단했다는 점은 인정해야 하고, 지금도 그 시장 규모가 내수만으로도 나름대로 유지되고 있음을 부정할 순 없다. 하지만 지금의 일본 대중문화가 과거만한 소프트웨어 파워를 내고 있는가, 또한 아시아권의 대표성을 지닐 만한 상품을 만들어내고 있는가 하면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물론 한국의 현 상황이 마냥 긍정적이지만은 않다. 한국은 좁은 시장과 적은 제작비용에 비해 대중의 기대치와 눈높이가 높아 창작자들 입장에서는 분야를 막론하고 가혹한 환경을 자랑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웹툰이 주도권을 쥔 만화가 그러하듯 한국의 대중문화는 전반적으로 상향화한 품질 위에서 구현된 압도적인 다양성을 기회로 삼아 수익 다변화와 수출을 꾀함으로써 열악한 부분을 상쇄하려고 들고 있다.
만화와 애니메이션 속 ‘일본적인 것’을 보며 ‘한국적인 것’을 찾자는 외침은 결과적으로 답을 찾을 수 없었다. 하지만 한국의 대중문화는 어느 사이엔가 전통을 억지로 끼워 넣으려 노력하기보다 음으로든 양으로든 한국의 현실과 실제가 담긴 모습을 드러내고 사회·문화 트렌드에 맞춰 섞음으로써 어느 나라와도 다른 색채를 드러내고 있다. 정답은 아닐지 몰라도 최소한 이제 일본을 마냥 부러워하지 않아도 되겠다 싶은 점만은 분명해졌고, 그 점이 참 좋다.
게재 제목 <‘한국적인 것’ 대한 집착도 안녕… 굳건하던 일본 콤플렉스를 넘어서>
(2020.01.27. 작성, 2020.01.28. 일요신문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