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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바람 Jan 11. 2019

서른여덟, 6개월 만에 결혼하다 #1

2대에 걸친 소개팅

날씨가 따듯해지면 연애를 하고 싶다. 크리스마스는 혼자서 잘 보내면서도 봄에는 외롭다. 서른여덟 살의 봄도 예외는 아니다. 대학생 때는 연애가 쉬웠다. 선후배와 스터디를 하고 뒤풀이를 하다가 사귀었다. 20대 중반에는 소개팅이 많이 들어왔다. 30대 초반까지도 기회는 있었다. 연애는 언제든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기회가 드물어진 건 34살 때부터였다. 또래의 남자를 만나면 기혼인지 확인해야 했다. 미혼인 남자들은 20대를 만나고 싶어 했다.


서른다섯 살이 되면서 남자에 대한 관심이 떨어졌다. 결혼해야 하는 이유를 찾지 못했다. 결혼보다 재미있는 건 많았다. 평일에는 일에 몰두하고, 주말에는 동호회를 가거나 자기 계발을 했다. 외식 프랜차이즈 회사의 본부장이라는 직책은 곧 자신감이었다. 일 년에 서너 번은 해외출장이나 해외여행을 갔다. 공항 면세점과 해외 백화점에서 쇼핑했다. 마음에 드는 물건은 큰 고민 없이 샀고, 카드는 일시불로 긁었다. 당장 집을 산다거나 결혼할 생각이 없어서 계획 없이 돈을 썼다. 통장 잔고가 만족스럽지는 않았지만, 오늘의 생활에 만족했다.


주말에는 스윙 댄스 동호회에 나갔다. 낮에는 연습실에서 강습을 듣고, 저녁에는 바에서 소셜 댄스를 즐겼다. 곡이 바뀔 때마다 파트너가 바뀌었다. 3분마다 새로운 사람과 춤을 췄다. 밤 10시까지 재즈 음악에 맞춰서 땀을 흘리고, 집에 오면 곯아떨어졌다. 자고 일어나면 동호회 단톡방에 수백개의 알림이 쌓여 있었다. 단톡방의 대화를 따라가다 보면 하루가 금방 갔다. 번개가 넘쳐나고, 매일 건수가 생겼다. 체력만 따라주면 한 달에 20일도 놀 수 있었다. 데이트를 하지 않아도 외롭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하지만 동호회 활동 5년차에 접어들면서 밀려나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동호회는 20대와 30대 초반의 회원들이 움직였다. 게시판에 공지된 번개 외에도 또래들끼리 소모임을 하는 눈치였다. 서운했다. 그런 자리에 빠지지 않고 초대받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밀려났다. 나는 이제 핵인싸가 아니다. 내 나이는 마흔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한 달 정도 빠져도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을 것 같다. 동호회에 점점 흥미가 떨어졌다. 쓸쓸함과 허무함이 밀려들었다.


쓸쓸함보다 시급한 건 지루함과 심심함이다. 서른여덟 살이 되니까 주말이 심심하다. 평일은 혼자 돌아다니거나 영화를 보면 시간이 잘 간다. 주말이 문제다. 약속 잡기가 쉽지 않다. 동호회에서 나이를 잊고 지내는 동안 친구들은 결혼하고 애 엄마가 되었다. 친구들을 되찾을 방법은 애를 낳아서 키즈 카페에 가거나, 친구들의 아이가 고등학생이 될 때까지 기다리는 수 밖에 없어 보인다.


연애할 때가 된 것 같다. 누구든 만나면 잘해줄 마음의 준비가 돼 있다. 하지만 만날 데가 없다. 주변은 온통 여자다. 운동하러 다니는 요가원은 여성 전용, 사무실이나 매장 직원들도 여자. 남자라고는 스무 살을 갓 넘긴 알바뿐이다. 기댈 건 소개팅이나 선밖에 없다. 침대에서 떼굴거리고 있을 때 엄마가 방문을 열고 들어왔다.


“너 선 볼래? 동갑이래.”


기가 막힌 타이밍이다. 엄마가 하는 말은 귀담아듣지 않던 나였다. 엄마가 소개해주는 사람 중에 마음에 드는 남자가 있을 가능성은 작다. 하지만 이제는 모든 기회를 열어두어야 한다. 언제 어디에서 인연이 나타날지 모른다. 동갑이라는 점도 마음에 들었다.


3일 뒤에 약속이 잡혔다. 본사 직영 매장에서 저녁을 먹기로 했다. 나는 외식 프랜차이즈 본사에서 근무한다. 매장은 사무실에서 5분 거리고, 홈그라운드라 마음이 편하다. 와인색 블라우스에 검은색 정장 바지를 입고, 검은색 구두를 신었다. 첫 만남에는 보수적인 옷차림이 좋다. 나를 드러내는 건 두 번째 만남도 늦지 않다.


“네가 진영이니? 예뻐졌네.”


약속시각보다 일찍 주선자가 도착했다. 주선자인 순희 고모는 어렸을 때 한동네에 살았던 이웃이다. 엄마와 아빠를 소개해주신 분이기도 하다. 소개팅이 잘 된다면 순희 고모는 2대에 이어 매칭에 성공하고, 엄마는 결혼한 지 40년 만에 A/S(애프터 서비스)를 받는 셈이다.


소개팅 상대는 순희 고모의 조카라고 했다. 약속 시각이 다가오자 긴장된다. 어떤 사람일지 궁금하다. 안경을 썼을까? 말수가 많은 편일까? 집은 어디일까? 술을 좋아할까?


전화를 받고 나간 순희 고모가 남자와 함께 돌아왔다. 그는 보통 키에 머리숱이 많고, 마른 편이다. 정장을 단정히 입었다. 무난한 첫인상이다. 마케팅 대행사에서 팀장으로 근무한다고 했다. 마케터라면 내가 여러 번 이력서를 냈지만, 서류에서 떨어졌던 직업군이다. 호감이 간다. 순희 고모는 어색하지 않을 만큼만 분위기를 만들어놓고 일어났다. 마지막에 남기신 말이 뼈를 때린다.


“지금은 괜찮을지 몰라도, 마흔다섯에는 외로울 거야. 애는 없어도 결혼은 해야 해.”


마흔다섯 살. 생각해 본 적 없는 나이다. 서른여덟 살에도 이렇게 심심하다면 마흔 다섯 살에는 같이 놀 사람이 없을 것 같다. 무섭다. 혼자서도 잘 논다고 생각했는데 요즘 들어 생각이 바뀌었다. 혼자는 한계가 있다. 외출할 의지가 생기지 않는다. 놀거리, 읽을거리를 찾는 것도 귀찮아서 집에서 텔레비전을 본다. 예전에는 술이라도 마셨는데 이제 그런 자리마저 뜸하다. 나를 집 밖으로 꺼내 줄 사람이 필요하다.


“진영 씨는 직장이 어디예요? 혹시 이 매장에서 근무해요?”

“사무실은 여기서 5분 거리예요. 외식 프랜차이즈 본사에서 일하고 있고요. 이 매장은 직영점이에요.”


우리는 서로에 대해 아는 게 없었다.


“직원들 있어서 불편할 텐데 나가서 맥주 한잔할래요?”

커피가 아니라 맥주를 마시자고 한다. 예전의 경험에 비추어봤을 때, 좋은 신호다.


잠실새내역 먹자골목을 돌아 이자카야에 들어갔다. 대형 스크린에서는 야구 중계가 한창이다. 맥주 두 잔을 시켰다. 순희 고모에 따르면 그는 말수가 적고, 수줍음이 많다고 했는데 그렇지 않다. 그가 적극적으로 대화를 리드한다. 비속어를 사용하지 않고, 언어 습관이 반듯하다. 나는 국어를 잘하는 남자가 좋다.


“진영 씨는 몇 학번이에요?”

그가 내 학번을 묻는다.


“전 공공(00) 학번이에요.”

“아, 공오(05) 학번이요?”

“아니요. 공. 공. 학번이요.”


나는 또박또박 힘주어 말했다. 그의 눈동자가 흔들린다. 뭔가 잘못됐다. 알고 보니 그는 02학번이었다. 나보다 두 살 어리다. 순희 고모의 실수다. 고모들은 조카의 나이를 정확히 알지 못한다. 걔가 초등학교 4학년이든가 5학년이든가… 이런 식이다. 나는 연하라 좋지만, 그의 생각이 중요하다. 삼십 대 남자는 연상을 만나고 싶어 하지 않는다. 어쩌면 오늘이 우리의 마지막 만남일지도 모른다.


“이번 주 토요일에 만나요.”

안주와 술을 거의 다 먹어갈 무렵 그가 말했다.


이번 주 토요일에 뭐하세요, 다음에 언제 볼까요, 가 아니라 ‘만나자’고 한다. 밀고 당기지 않는 직설적인 말투가 마음에 든다. 그는 적당한 타이밍에 필요한 말을 할 줄 알았다.


“영화 보고 저녁 먹을래요?”

내가 말했다. 첫 번째 데이트는 남들과 비슷한 게 좋다.


“좋아요. 예매하고 연락할게요."

우리는 지하철역에서 헤어졌다. 밤 10시. 첫 만남에서 헤어지기에 적당한 시간이다.


그는 모든 게 적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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