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 변희수 하사 2주기 추모제에 다녀와서
집회를 싫어한다. 주제와 형식을 불문하고 한 번도 온전히 가고 싶어서 간 적이 없다. 집회에 가면 힘을 받는다는 말을 동료로부터 처음 들었을 때 적잖이 당황스러웠다. 나에게 집회 참석 동기는 순전히 효용성(머릿수 보태기)과 의무감의 결합이었기 때문이다. 사람이 많은데 익명성이 보장되지 않는 공간에 있기가 무섭고, 오래 서 있기 곤란한 발을 달고 있다. 그래서 집회에 갈지 결정할 때면 1) 갈 수 있고 2) 가야 하는지를 면밀히 따지는 편이다.
이번 변희수 하사 추모제도 가지 않을 생각이었다. 소식을 알기 전에 정해진 일정이 있었기 때문에 갈지 말지를 두고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그런데 오늘 오후 두 시쯤 갑자기 상대방이 일정을 취소했다. 갑자기 갈 수 있게 되어 버렸다. 그러자 가야 할 것 같았다. 급히 같이 갈 사람을 구하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그냥 조용히 빠르게 다녀오자고 생각했다. 그가 커밍아웃하고 죽어가기까지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던 것이 죄책감으로 남아 있음을 새삼 깨달았다.
저녁 6시 반쯤, 성산동에서 종각으로 가는 271번 버스를 기다리며, 다시 한 번 나는 이 집회에 왜 가는 것일까 생각했다.
그는 나와 나이가 같다. 그가 처음 기자회견을 했을 때부터 알았다. 그뿐이었다. 그는 나와는 아주 멀게 느껴졌다. 군대라는 보수적인 공간에서, 왜 대중 앞에서 이름과 얼굴을 드러내고 커밍아웃을 하면서까지 계속 복무하고 싶어하는지 이입이 되지 않았다. ‘그냥 인권활동가로 살면 될 것 같은데.’ 오만하게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1년 뒤, 부고가 전해졌을 때, 나는 의도적으로 그와 관련된 소식을 찾아 보지 않았다. 그가 죽도록 내버려진 현실을 견디기 버거웠다. 아니, 그 1년 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은 내가 부끄러웠다. 그러나 회피한 것은 회피한 대로 마음 속에 남았다. 지금이라도 의도적으로 그를 생각하는 시간을 가지고 싶었다.
집회는 역시 늘 그렇듯 즐겁지 않고 긴장됐다. 그에 대해 생각하려고 애썼지만 자꾸 생각이 다른 곳으로 튀어 나갔다. 그를 추모하고자 하는 사람들과 모여 있다는 사실은 특별했지만 그뿐이었다.
생각을 정리한 건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였다. 구글에 그의 이름을 검색했다. 위키 문서 속 ‘변희수는 소속 부대원과 군단장, 간호 장교 등에게 성전환 수술 결단에 대한 절대적 지지를 받았다고 주장했다’라는 대목이 눈에 띄었다. 무심코 PD 수첩에 보도된, 그가 받은 카카오톡 메시지와 메일 캡처 화면 이미지를 열었다가 한동안 스크롤을 멈췄다.
변희수 “통일! 5기갑(가려짐) 변희수입니다! 수술실 이제 들어가겠습니다. (가려짐) 나오겠습니다! 통일!”
5기갑여단장 OOO 준장님 “지금쯤 수술 시작했겠구나 수술 잘 마치길 바라고, 건강했으면 좋겠다. 수술하고 회복되면 그때쯤 다시 한 번 연락 주라. 너를 위해 기도할게.”
변희수 “통일! 55전차대대 하사 변희수입니다 어느정도 회복 완료되었습니다 지금 걷기 연습하고 있습니다!”
5기갑여단장 OOO 준장님 “그렇구나 수술 잘 되었다고 대대장한테 보고받았다. 다행이고, 축하한다. 빨리 건강 회복하고, 귀국 무사히 잘 하길 바란다”
보낸 사람 : OOO
받는 사람 : 변희수
변하사! 편지 보내주어 고맙고 수고가 많다.
군단장은 누구나 자란 환경과 여건이 다르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나는 변하사를 존중하고 있네.
여러가지 어려운 점이 많겠지만
변하사를 많이 생각해 주고 있는 여단장과도 잘 상의하곤 해서
슬기롭게 잘 극복하고 건강하기 바란다!
화이팅하게!
기자회견을 열었을 때 그의 나이는 스물한 살, 군특성화고를 졸업하고 임관한지 3년차가 막 되어가는 시점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어렸던 그가 군이라는 조직 안에서 사람들에게 자신의 정체성 실천을 지지받는다고 느끼기까지 얼마나 많은 용기냄과 화답, 혹은 배반의 사건과 대화들이 있었을까. 그는 전략적으로 지지를 강조했겠지만 어찌 조직 생활, 더군다나 공동 숙식하는 생활 속에서 지지만 있었겠는가. 무수히 많은 오해와 갈등, 분노와 좌절이 있었을 것이다. 어쩌면 그랬기에 그 부대가 더 소중했을지도 모른다. 내 저항의 장, 처음으로 내가 나로 설 수 있었던 조직, 나를 직업인으로 인정하는 조직. 자신의 수술을 돕기로 한 결정이 잘못되었다고 판단되어 그 리더들까지 한직으로 좌천당하는 상황도 그를 괴롭혔을 것이다.
수술 후 그가 처한 상황은 누구도 견딜 수 없는 일이었다. 19세에 직업 생활을 시작한 사회초년생에게는 더더욱 가혹한 일이었다. 기자회견 후 1년 동안, 그는 후회했을까. 그랬다면 어디까지 후회했을까. 실명과 얼굴을 드러내고 기자회견을 한 것? 성 전환 수술을 한 것? 부대 안에서 커밍아웃한 것? 감히 저항을 꿈꾸기 시작한 것? 아무도 걸어 보지 않은 길,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아무도 알려 줄 수 없었던 길을 가기로 했던 마음, 그리고 그 결말을 견딜 수 없을 때의 절망의 깊이는 어땠을까. 감히 상상하기 어렵다.
오늘 추모제에서는 4대 종교별 기도식이 있었다. 종교에 대한 무지와 거부감으로 거의 모든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냥 흘려보냈지만 어떤 한 마디만큼은 마음에 콕 박혔다. 모두를 위해 차별과 폭력에 맞서다 홀로 희생된 사람으로서 그를 예수에 빗대는 듯한 말이었다. 희생, 그렇다. 그는 희생했다. 자신을 드러내고 저항하기로 했을 때 이미 평범한 익명의 삶을 희생했다. 내가 그랬듯 무지하고 오만한 채로 누구나 그를 재단할 수 있게 되었을 때 그는 이미 십자가에 달려 있었다. 한편 그는 잔혹하게 희생당한 국가폭력의 피해자이기도 하다. 불의에 맞서 싸운 의인이자 국가폭력에 희생된 피해자, 동시에 그의 고통을 가중시켰던 대중의 차별과 무관심, 그 모든 것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차분히 결을 고르고 그가 역사에 부당하게 기록되지 않게 해야 한다고, 그 다음의 누군가를 대함에 있어서는 나부터 다르게 행동해야 한다고 다짐한다. 그의 죽음으로부터 2년 뒤인 이제야, 그를 추모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