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동가, 활동가다움 원칙 토론회 후기(1) 활동가의 공직 진출
2주 전, 지음에서 주최한 ‘활동가, 활동가다움 원칙 토론회’에 다녀왔다. 끝난 직후부터 쓰고 싶었는데, 공개하지 않은 글을 비롯해 앞서 여러 글을 쓰느라 이제야 후기를 쓴다. 오랜만에 청소년 인권 운동 단체에서 주최하는 행사에 와서 마치 ‘집’에 온 것 같은 느낌에 막 편하게 질문하다가 시간이 다 가 버렸다. 나중에는 다른 사람들이 말할 기회를 빼앗은 건 아닐까 미안하고 민망했다. 아무튼 그만큼 재미있는 자리였고 많은 생각이 들었다. 한 번에 다 쓰기 어려워 일단 한 주제에 집중해서 정리하고 다음에 나머지 이야기를 또 쓰기로 한다.
활동가 원칙과 관련한 흐름은 크게 두 가지가 있다. 1. 활동가 개인의 출세를 위해 또는 출세에 의해 운동이 사유화되는 것을 경계하기 위함이다. 활동가 개인이 운동의 성과를 독식한다는 점에서 사유화이고, 명망가가 됨으로써 운동을 떠난 후에도 일정한 영향을 끼친다는 점에서도 사유화라고 할 수 있다. 또 다른 하나는 2. ‘고용주’가 따로 없는 구조, 그래서 생계든 역량 강화든 업무 관리든 활동가들이 서로 또 스스로 책임져야 하는 데서 나오는 문제를 조율하기 위함이다. 두 가지 다 제대로 이야기되지 않고 있는, 또 내 삶에서 아주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문제라서 스스로 생각도 정리할 겸, 다른 사람들과도 나누고 싶다. 이번 글은 1.만 다룰 것이다.
운동은 정치를 견인했는가, 정치에 끌려갔는가
활동가들이 하는 일은 자신의 생각을 대중에게 표현하고 설득하는 일이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누군가는 유명해질 수밖에 없고 또 전략상으로도 운동/조직을 대표하는 매력적인 스피커가 반드시 필요하다. 그런데 그 스피커가 정당 정치나 공직으로 이동하면 이상한 일이 벌어진다. 그 사람이 가지는 상징성이나 대외적으로 던지는 메시지는 유지된 채로, 그가 함께하는 사람과 결정하는 것들, 행동의 목적은 달라진다. 멀리서 보기에는 정의로운 활동가가 더 큰 영향력을 가지게 된 것처럼 보이지만, 운동에는 때로 파괴적인 효과를 불러온다.
가장 큰 문제는 운동의 정체성과 주도성이 위협받는 것이다. 예를 들어 전교조 지부장이 교육감이 되었을 때, 다음 지부장은 그 교육감을 사용자이자 교섭 대상으로만 대할 수 있을까? 우리는 이제 아예 전교조 지부가 적극적으로 그 전임 지부장을 교육감 후보로 추대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오늘날 전교조 간부직이 교육감이 되기 위한 발판으로 이용되지 않을 거라고, 전교조 지부가 교육감의 정치적 목적에 휘둘리지 않고 독자적으로 운동을 개척하고 있다고 누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 공현은 “진보 교육감이 더욱 ‘진보적’인 쪽으로 견인되었다고 평가할 수 있을까? 반대로 교육운동 주체들이 더 ‘보수적’인 쪽으로 견인되지는 않았는가?”라고 지적했다.(《한국 교육의 오늘을 읽다》, 2023) 교육감 선거만은 정당이 개입할 수 없다는 특수성 때문에 교육 운동에서 두드러지기는 하지만, 비단 전교조에만 해당되는 문제는 아닐 것이다.
공직 진출하면 생까야 한다?
이번 토론회에서 참여자들이 낸 의견의 상당수는 이 부분에 집중되어 있었다. “운동 팔아서 대학원에 가는 등 자기 입신양명에 활용하는 사람 너무 많다”, “공직 진출한 사람들을 ‘생까야’ 한다”, “진보 정당의 성장은 사회운동의 자원을 끌고 가서 되는 것은 아니다” 등의 이야기가 오갔다. 이에 대용은 “과거 민주노총과 민주노동당의 관계가 그랬듯 운동이 정치를 이끌었던 역사를 없던 것처럼 할 수는 없다. 다만 그 힘이 지금 작동하지 않는다고 했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가? 원칙과 윤리로만 해결하기 어렵다고 본다”고 말했다.
캬, 운동이 정치를 견인했던 역사라니. 정치도 위태롭지만 운동은 더 자원과 영향력이 미미한, 그래서 정치가 운동의 발목에 빨대 꼽고서 살찌지도 못하는데 운동은 그걸 제대로 내치지도 못하는 그런 기묘한 시대에 꿈만 같은 이야기다. 나는 그냥 정치와 운동의 관계 설정을 처음부터 다시 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된다. 활동가의 성장 트랙과 정치인의 진로 트랙은 달라야 하고, 서로 자리를 이동하는 것이 아니라 협업하고 견제해야 한다는 전제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활동가의 윤리에 관한 원칙이 필요하다.
활동가가 정치인이 되어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공현은 발제문에서 “겸직의 금지, (이동 시 최소 1년의 텀을 둬야 한다는)기간 제한, 경력 활용 제한”을 지음의 원칙이자 다른 운동에서 참조할 만한 원칙으로 제시한다. 가장 논란이 될만한 부분이 아마 경력 활용 제한일 것이다. 그 사람이 살아온 삶은 통합적인 것인데 일부를 어떻게 의도적으로 숨기라는 말인가? 지음은 “조직의 결정이 있으면 허용한다”라고 예외 규정을 두고 있다. 이는 달리 말하면 활동가의 공직 진출은 조직의 결정에 따른 것이어야 한다는 말이다. 나는 애초에 조직이 활동가를 공직으로 진출시켜야 할 상황이 대체 무엇일까 자문하게 된다. 그 개인이 아무리 올곧고 훌륭한 사람이며 우리가 입법시켜야 할 제도가 아무리 산적해 있더라도 반드시 그가 정치인이 되어야만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더군다나 그 사람이 운동을 대표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면 말이다. 우리가 지향해야 할 것은 운동의 영향력을 더 키워서 정당 및 정치인과 대등하게 제대로 협업하는 관계가 되는 것이 아닐까?
다시 대용의 말로 돌아가면, 이것이 원칙을 만드는 방식으로 해결하기 어렵다면 뭐가 더 필요하다는 의미일까 하는 질문이 남는다. 이건 다음 편에서 더 생각해 보자.
P.S.
- 이 토론회를 지음에서 연다고 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강민진 전 청년정의당 대표와 일련의 사건들을 떠올렸을 것이다. 그러나 토론회에서는 그가 언급되지 않았다. 그 일은 청소년운동의 거의 모든 사람들에게 (그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상처와 관계 단절을 남겼다. 내 삶에서도 어떤 분기점이라고 할 만한 사건이다. 가장 소중했던 몇몇 사람들과의 관계가 순식간에 또는 서서히 단절되었다. 그때를 떠올리면 생각이 다른 사람을 대하는 내 언행이 얼마나 경솔하고 즉각적이었는지를 반성하게 되기도 하지만 내가 누구인지를 스스로 확인하기 위해서 미움받을 용기를 내야 하는 순간이 있음을 되새기게 된다.
인권운동 안에서도 그의 행보에 대한 판단이 분분한 것을 알고 있다. 어쨌든 그 운동 안에 있었던 사람으로서 내 입장을 일부 밝혀 두고 싶다. 그는 1.의 문제에 대해 동료 활동가들과 논의하기를 회피하고, 2.의 문제를 섞어서 자신에게 유리한 사실들을 조합해 조직이 자신을 착취하고 자유를 제한하려 한다는 입장문을 발표했다. 그전까지 나는 지음 바깥에 있는 입장에서 판단을 유보하면서 ‘운동에 피해가 덜한 대응 방향이 무엇일까’를 생각하는 스탠스였는데, 그 입장문을 보고서는 그와의 관계를 단절해야겠다, 이런 입장에 동의하는 사람들과도 뜻을 같이하지는 못하겠다고 판단했다. 나는 그와 지음 활동가들 사이에 있었던 일들에 대해 판단하기를 경계한다. 내가 아는 것은 그는 운동의 목적을 위해 정치인이 되기로 결정한 것이 아니라, 정치인이 되기 위해 자신이 하던 운동과 동료들을 비방하고 분열시키는 결정을 했다는 것, 그 결과를 누구보다 정확히 알면서도 그 결정을 했다는 것이다.
혹자는 그가 그런 입장문을 내기 전에 그를 내치고 사퇴를 요구한 지음의 입장문이 있었다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지음의 입장 발표는 널리 이해받기는 어려운 방식과 내용이었지만, 청소년운동의 활동가 단체로서 지음이 지향하는 바를 담고 있었고 적어도 그 지향을 함께 만들었던 강민진은 이해할 수 있는 언어였다. 그리고 강민진은 그 문제 제기에 응답하는 대신 운동으로부터 착취당하는 피해자 개인의 위치에 놓이기를 선택했다. 이는 윤리적이지 못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후 이어진 일련의 사건들을 보면서, 나는 그가 평안을 찾기를 바라게 된다. 이는 정의당 안에서 있었던 여러 사건들에 대한 판단을 포함하지 않는다. 누구나 잘못된 판단을 할 수 있다. 누구나 반성하고 관계를 다시 만들어 갈 권리가 있다고 믿는다. 그가 청소년의 성적 권리를 위해 했던 활동들, 썼던 글들을 지금도 사랑한다. 현실성 없는 이야기인 걸 알지만, 다른 동료들의 충분한 치유와 양해하에 그와 다시 동료가 될 수 있기를 소망한다. 내가 죽기 전에 그와 어떤 대화를 할 수 있을까? 그 일이 나뿐 아니라 특히 가까운 동료들에게 미친 여파가 너무나 컸기에, 멀게만 느껴지는 일이다.
- 2.와 관련하여, 사실 지금도 일과 상관없는 글을 쓰고 있다는 사실에 다소 죄의식을 느낀다. 내가 일을 마치기를 기다리고 있는 저자 분의 눈치가 보인다. 하지만 직업/활동에 잠식당하지 않기 위해서 바로 이런 시간을 의도적으로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